델리 | 여행의 시작
스물셋, 아직은 어리숙한 나이. 많이 덜어냈지만 배낭도 마음도 무거웠다. 빈약한 내 육체가 그 무게와 시간을 잘 버텨낼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멀리 떠난 건 태어나 처음이었다. 그 거리는 가늠할수록 짜릿하면서 동시에 무서웠다.
어릴 적 나는 매우 왜소했다. 학창 시절 내내 깡 마른 체격, 키도 많이 작았다. 덩치 큰 친구들을 반사적으로 피해 다녔고 내가 이길 수 있는 상대인지 아닌지 알아내는데 단련된 촉을 가지고 있었다. 신체적 한계를 깨달은 후론 부당한 일에도 섣불리 누구에게 덤비지 않았다. 자존심을 부렸다가는 손쉽게 나뒹굴어지는 게 그 당시 내 인생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비겁해졌고 그런 이유로 매일이 사투였건만 엄마는 안일했다. “친구끼리 싸우다 토라지고 그럴 수 있지. 뭘 울고 그러니.” 엄마는 매사에 흔들리지 않는 자기 평화의 소유자였고 나는 사랑을 필요로 하는 의존적인 성향의 여자아이였다.
입국장을 빠져나오니 택시들이 즐비하다. 너나 할 거 없이 나를 모셔가려 혈안이 되어 있다. 거절해도 굴하지 않는 그들의 의지가 내 목젖이라도 칠 만큼 가깝다. 나는 위축되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지만 책에서 읽고 준비한 태세로 아닌 척 당돌한 연기를 시작한다. “노 땡큐! 이미 배정받은 택시가 있어요!” 그러나 감지력이 좋은 소라게처럼 잠시 움츠려들뿐 다시금 모르는 얼굴을 하고 달려든다. 꼴을 보니 얼른 내빼야겠다는 생각이 앞선다. 애써 모른 척하지만 마음은 이미 북채로 휘갈겨지는 듯 크게 진동한다. 기사가 날아드는 불나방을 거둬내듯 팔을 세차게 흔들며 확실한 거절 의사를 내비치니 그제야 하나 둘 단념하는 사람들. 드디어 차머리 나갈 공간이 나타난다. ‘참, 여간 매몰찬 마음을 작동하지 않고서는 쉽지 않겠어.‘
눈꺼풀이 기력을 다한 고무줄처럼 늘어진다. 이동하는 내내 긴장을 놓지 못한 탓이다. 차 창 너머 푸석한 땅 위에 마른나무들이 지나간다. 그래도 여행의 시작은 마음을 들뜨게 했다.
택시가 쓰레기 쌓인 어느 골목 앞에 세워진다. 허공에 선을 찍찍 긋더니 이 안으로는 사이클 릭샤를 제외한 이동수단은 진입이 불가하다 한다. 1월, 여행하기 나쁜 계절이 아님에도 이미 더위가 기승이었다. 축축하게 젖은 바닥은 그대로 눌어붙어 울퉁불퉁한 지형이 되었고 거리엔 악취가 가득했다. 나는 코를 틀어막고 걸었다. 더 쌔게 일그러뜨리는 만큼 감내가 되는 거 같기도 했다. 오감에서 멀미가 나고 있었다. ‘내게 덤비고자 하는 이가 있다면 나는 어떡해야 할까.’ 너무 겁을 먹은 나머지 얼토당토 아닌 상상을 하고 있었다. 어깨에 매달린 배낭끈을 잡아당겨 고쳐 맸다. 가방 무게에는 긴장이 가중되어 있었다. 모두가 제 일을 하느라 여념이 없건만 나는 지독히 그들의 표정 하나, 몸짓 하나를 신경 썼다. 그렇게 자초되어 누군가 나를 따라와 끈질긴 말을 늘어놓기라도 하면 나는 사색이 되어 여행 초짜 티를 팍팍 내게 되는 것이다. 바보 같은 짓이 아닐 수 없지만 나도 나를 어쩌지 못한다.
산처럼 포개진 폐지 더미가 탄력 있는 푸딩처럼 좌우로 뒤뚱거리며 자전거에 실려간다. 뒷 축에 늙어빠진 체인 소리가 불쌍할 지경이다. 이중 삼중 짐을 이고 가는 할머니의 익어버린 주름살이 그 부담보다 겹겹이 쌓여있다. 나는 어릴 적 본 할머니의 까만 얼굴에 그것을 떠올린다. 여든이 넘도록 혼자 살기를 고집하시던 할머니는 2남 4녀를 두셨다. 내 엄마가 젊어서 창창일 때도 할머니는 할머니였다. 그 주름은 뭘 해도 고집쟁이 부채처럼 접혀 돌아갔다. 할머니가 활짝 웃어도 소용없었다. 한낮의 불볕더위가 사람들 옷에 스민 찌듬을 데우면 나는 금방 알아차렸다. 그 꼬릿한 냄새도 할머니 등에 업혀 맡았었다는 사실을.
하지만 불현듯 냉철해진다. ‘나는 지나쳐 갈 사람’이란 자각이 꼿꼿해지면 어지러운 이 역동의 거리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무슨 기이한 내 안의 현상인지 모르겠으나 나는 갑자기 매우 명료한 인간이 되어 입력된 좌표를 따라 길을 내지르기 시작한다. 델리의 여행자 거리. 빠하르간즈라는 이름의 이 거리는 뉴델리 기차역과 T자형으로 바로 만나 있어서 다음 행선지로 떠나기 좋은 곳이고 그래서 항상 여행자들로 북적인다. 페인트 딱지가 나부낄지언정 숙소는 5층 옥상에 소유한 식당을 운영할 정도로 제법 규모가 있었다. 나는 화장실이 달린 트윈룸을 얻었다. 배낭 내려놓을 정신도 없이 숨을 몰아쉬는 내 앞으로 낡은 선풍기 머리를 돌려주는 남직원. “여권 주고, 체크인 명부 적으면 돼.“ 얼마 전에 새로 산 게 아닐까 싶은 빳빳한 터번 빛깔이 발광하고 있다. 몇 가지 중요한 정보만 전달하고 그는 뒤에서 대기 타던 의자에 철퍼덕 앉는다. 벵그르- 회전하는 동시에 드러나는 무심한 얼굴의 옆면. ‘흥, 너는 내가 부르면 와야 하는 서비스맨이다’ 알량한 마음으로 썰렁해진 공기를 대치해 본다.
인도인들의 큰 눈은 짙은 피부색과 대조되어 더욱 맹렬해 보이는데 나처럼 쎈 척 가면을 쓴 사람의 마음을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설령 그 붕괴가 소리라도 낼까 싶어 나는 얼른 도망가기로 한다. 층고가 낮은 건물은 계단 한 개의 높이도 고만해서 오르기 좋았다. 괜찮으면 연장할 생각을 하고 있는데 위층에서 찌린 냄새가 풍겨왔다. 사람이 저질러놓은 정체가 분명했다. 2층에 다다르자 가운데 중정같이 환풍 구조인 미음자의 복도가 펼쳐지고 그 중앙으로 얼굴을 쳐드니 하늘이 뻥 뚫려있었다. 복도 끝에 아랫니가 빠진 오래된 나무 문이 벌렁거리자 그때마다 여지없이 분비물 냄새가 달려들고 있었다. 그 기세는 코를 비틀어 죽인데도 막아질 게 아니었다. 망설일 거 없이 3층까지 두 계단씩 뛰어올라 재빠르게 호 수를 탐색한다. 냄새가 뒷목이라도 부여잡는지 얼른 눈에 띄지 않고 들이 마실 숨도 없이 고역이다. 그래도 바닥면을 따라 곱게 이어 붙인 형형색색 데코타일은 예뻐 보인다.
문을 열자마자 정면에 작은 테라스가 보인다. 들이치는 볕이 그 유리와 얼룩진 커튼을 차례로 통과해 내 발 끝에 꾸역꾸역 다다랐다. 내 가방을 받아내는 엄마처럼. 나는 그대로 움직이지 못한 채 물끄러미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내일은 알겠지만 당장엔 모르는 그런 감정에 휩싸였다. 나만의 공간에 안착한 순간은 바깥 상황을 모두 잊게 했고 여기가 어느 나라인지 어떤 계절인지도 망각되었다. 조악한 줄무늬 벽지 위로 개미가 기어 다녀도 수도관이 염증처럼 짓물을 짜내도 다 괜찮은 거 같았다. 얼덜결에 켜 본 텔레비전에서 힌디어로 더빙된 <짱구는 못 말려>가 방영되고 있었고 생경한 외국어를 유창히 나불대는 짱구를 보고 있으니 내 고향과 낯선 타지가 신세계적 합일을 이룬 것 같은 요상한 감각이 일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