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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흔들림, 카뮈, 시지포스 신화

5코스(남원→쇠소깍) 1

by 커피소년

남원 포구에서 4코스 종착 스탬프와 5코스 시작 스탬프를 찍고 물 한 모금을 마셨다. 커다란 검은 표지석에 새겨진 올레 5와 화살표가 걸어야 할 방향을 가리켰다. 남원 포구를 예전에는 ‘재산이개’라고 불렀다 한다. 고기잡이, 미역 채취, 염전을 통해 재산을 모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래서일까? 남원 포구는 커 보였다. 포구가 아니라 포구를 둘러싼 마을이 그래 보였다. 지나온 포구들과 달리 번잡해 보였기 때문이다. 예전의 번성이 오늘의 번잡 속에 보이지 흔적으로 남아 있나 보다. 남원 포구에는 제주 자연석으로 쌓은 영문 J자 모양의 방파제가 아직도 남아 있어 예전 포구의 규모를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작았다. 이곳에 돌고래가 자주 출몰하는지 포구에 돌고래 석상도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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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19_150603.jpg <왼쪽에 돌로 쌓아 앞으로 쭉 뻗은 것이 옛 방파제다>


남태해안도로를 따라갔다. 포구를 벗어났을 때 마음이 쓰였던 등표가 보였다. 방파제 끝에 있는 등대와 달리 등표는 항상 바다에 나와 있다. 위험한 암초가 있는 곳에, 수심이 얕은 곳에 자신을 세워서 바다와 온몸으로 부딪치고 있다. 그러나 지나는 배가 아닌 뭍에서 지나는 이 중 누가 등표를 알아줄까? 우리 사회에서 평소에는 알아주지 않지만 중요한 일을 하는 등표 같은 이들은 누구일까? 군인이 떠올랐다. 평소에 그들은 보이지 않아 전쟁이 상존하지 않는 것처럼 우린 느낀다. 그러나 그들은 안 보이는 곳에서 존재 그 자체로 전쟁의 위협을 온몸으로 막으며 지우고 있다. 멀리 희미하게 두 개의 섬이 보였다. 지도를 보니 지귀도와 섶섬 같았다. 길의 가드레일 위로 두 줄이 처져 있고 줄이 늘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세로로 세워진 철로 된 봉들의 꼭대기에서 바람개비가 바람에 돌고 있었다. 알고 보니 여기는 오징어를 말리는 곳이었다. 1코스 목화휴게소가 떠올랐다. 햇살에 오징어가 건조되고 있었고, 밀키스와 구운 오징어를 먹었던 장면이 스쳤다. 그리고 빨리감기처럼 1코스가 쓱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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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19_151157.jpg <오른쪽 수평선에 희미하게 두 개의 섬이 보인다>


길은 재촉했다. 재촉이 호기심을 이길 수 없었다. 대리석과 시멘트의 가드레일에 일정한 간격으로 검은 석판들이 붙어있고 그곳에 시가 새겨져 있다. 이생진 시인의 바다의 오후, 이해인 시인의 나를 위로하는 하루, 법정스님의 잠언인 살 때와 죽을 때 등등. 가드레일이 끊겼다 다시 시작된 사이 공간에 커다란 검은 표지석이 세워져 있었다. 표지석에 의하면 이곳은 문화의 거리였다.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며 피는 꽃’이 보였다. 읽으며 잠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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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형상화한다면 불안으로 흔들리는 무언가로 그릴 것이다. 나의 삶은 항상 불안했고 그래서 항상 흔들렸기 때문이다. 존재의 불안과 흔들림을 처음으로 감지했던 때가 20대 초반이었다. 그때 나는 어디에서도 속해있지 않았고 나를 증명할 무엇도 없었다. 뿌리 뽑힌 것처럼 부유(浮游)했고 내면은 폐허였다. 그 폐허의 땅에 불안의 꽃이 피기 시작했다. 그것은 굶주림의 여신 리모스가 심은 저주 같았다. 여신의 저주에 걸려 자신의 사지마저 먹어 치운 에리식톤처럼 당시 불안은 무성히 자라 나라는 존재마저 갉아먹고 있었다. 벗어나려고 발버둥 쳐고, 끝내 지쳐 경포대에 섰을 때 마주한 것은 파도였다. 그 속에서 카뮈의 ‘시지포스 신화’을 읽었다. 뭍을 향해 오르다 끝내 무너지는 그래면서도 무한히 반복하는 파도를 보며 그 무엇도 세울 수 없는 산 정상에 바위를 세우기 위해 노력하는 시지포스가 보였다. 바위를 산 정상에 세우면 형벌에서 벗어난다는 신의 약속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산 정상에서 굴러 내려온 바위를 무한히 다시 굴려 올렸다. 그는 형벌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인정하고 묵묵히 바위를 굴리며 살아내고 있었다. 삶은 원래 이런 것이었다. 그래서 부조리했다. 그가 형벌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인정했듯이 나도 불안을 거부하지 않고 인정하기로 했다. 고통스럽지만 온전히 흔들리기로 했다. 그것을 견뎌 살아내기로 했다. 불안과 흔들림이 있어 오히려 나는 나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불안과 흔들림은 내 삶의 본질일지 모른다. 흔들림이 있어야 고층 건물이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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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도로가 90도로 꺾였다. 모퉁이에서 올레길은 태위로를 만나러 간 남태해안도로와 작별하며 숲길로 들어갔다. 숲길은 ‘남원 큰엉 해안경승지’였다. ‘큰엉’은 큰 언덕이라는 의미였고 화산 용암 덩어리가 바다와 만나 아름다운 해안 절경을 만든 곳이었다. 이곳에서 ‘호두암·유두암’, ‘우렁굴’, ‘인디언추장얼굴’ 그리고 ‘한반도’를 볼 수 있다. 난 이것들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숲길로 들어서기 전에 다시 못 볼 것처럼 뒤돌아봤다. 두 개의 하얀 등대가 보였다. 남원 포구와 의귀천이 닿았던 태흥1리 포구 근처에 있던 등대 같았다. 숲길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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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반듯한 돌로 잘 닦였으나 이 길에서 나는 왠지 급했다. 뭔가에 홀렸는지 무척 바쁘게 걸었다. 시간에 대한 압박감일 수도 있었고, 나무들이 만든 터널의 갑갑함 때문일 수도 있었다. 곰솔을 봤다. 곰솔은 소나무였고 20m까지 자란다. 16코스 수산저수지에 있던, 400년 이상 된 천연기념물인 곰솔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그때는 곰솔을 보지 못했고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곳에 있었다. 주로 바닷가에 자라는 해송으로, 껍질이 검어서 흑송으로도 불린다. 아직 덜 자라서 그런가? 껍질이 검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일반 소나무 껍질의 색과 비슷했다. 가지가 사방으로 넓게 뻗은 것이 인상적이었다. 많은 기원을 담은 돌탑을 지났다. 틈틈이 바다로 열린 공간이 나왔고 그럴 때마다 숨을 쉬기 위해 수면 위로 떠오른 고래처럼 몸을 울타리에 바짝 붙여 바다 풍경을 봤다. 바닷가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이 길에서 바닷가로 향한 모든 길을 내려갔다. 급하게 걸으면서도 그래서 시간이 지체될 것을 알면서도 내려가고 싶었다. 그곳에는 용암이 바다와 만나 전진을 멈추고 세월에 식고 바람과 비와 파도에 닳은 모습이 펼쳐져 있었다. 때론 석이버섯 같기도 거북이 등짝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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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두암과 유두암 안내판을 보였다. 입을 크게 벌린 호랑이 얼굴을 닮아 호두암이라는데 아무리 봐도 알 수 없었다. 어머니의 젖가슴을 닮은 유두암은 볼 수 있었다. 호두암 아래쪽에 있다. 글을 쓰면서 찾은 호두암 사진은 정말 호랑이 모습이었다. 서 있는 위치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것 같았다. 우렁굴(쇠 떨어지는 고망)은 소들이 큰엉 일대 야초지에서 풀을 뜯다 더위를 피하려고 그늘을 찾아 숲 속으로 들어오다 거대하게 뚫려 있는 바위틈의 구멍으로 떨어져 죽었다고 해서 유래했다. 짧게 내려가는 길이 있었는데 그곳인지 모르겠다. 덤불이 우거져 볼 수 없었다. 인디언 추장 얼굴은 왼쪽의 바위를 봤어야 했는데 오른쪽 바위를 봤다. 그러니 아무리 봐도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내가 제대로 봤다 해도 그 바위에서 추장의 얼굴을 발견했을지 자신이 없다. 맘이 급했기 때문이었다. 급한 맘이 보여준 결정판은 한반도 모형이었다. 바위인 줄 알았다. 그래서 길옆으로 빠질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숲길이 끝나 확 트인 풍경이 넓은 바다와 함께 펼쳐졌다. 이곳에서 한반도 모형의 바위를 찾으려 했다. 당연히 없었다. 벌써 지나쳤기 때문이었다. 안내판도 보지 못했다. 알고 보니 한반도는 숲길의 끝에 나무들이 만들어낸 모양이었다. 그나마 어떤 느낌이 왔는지 그 지점에서 같은 방향을 향해 사진을 찍었다. 조금 앞에서 찍었는지 한반도 북쪽이 사라져 만주로 더 넓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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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호두암은 중앙에 있는 바위라는데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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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만주로 뻗어간 한반도 / 우: 원래 한반도 (카카오맵에서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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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추장얼굴바위, 엉뚱하게 반때쪽 바위를 봤다(사진 오른족). 그래서 볼 수 없었다>

바다를 봤다. 한 부분이 옥빛으로 빛났다. 바다가 출렁일 때마다 옥빛은 바다생물이 헤엄치고 있는 느낌이었다. 금호리조트 앞마당과 테두리를 지나 주차장으로 나오니 ‘남원 큰엉 해안경승지’ 안내판이 서 있었다. 여기까지가 그 숲길의 끝이었나 보다. 바다로 나가 있는 암석 지대에서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사진을 찍을 만한 곳이었다. 막힘 없이 트여 넓은 바다를 배경으로 멋있게 찍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옆을 보니 가는 풀들이 길게 솟아 있다. 느낌이 이상했다. 대략적인 인상이지만 해안가의 풀들은 바람 때문에 작고 단단하고 촘촘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저 풀들은 반대로 길고 하늘하늘하고 뒤가 보였다. 일반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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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펜션을 지나 다시 숲길로 이어졌다. 펜션 앞 잔디 마당에서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성 세 분이 빠른 리듬의 음악에 맞춰 춤 연습을 하고 있었다. 모임의 장기자랑을 위한 것 같았다. 몸짓 하나하나에 웃고 실수해도 웃었다. 마냥 즐거워 보였다. 느낌은 여고 동창생들이 모처럼 놀러 와서 예전의 그 시절로 돌아가 즐거워하는 듯했다. 그녀들을 보다 뒤도니 바다와 기암절벽이 보였다. 절벽은 철편으로 이루어진 갑옷을 입고 있는 것 같았다. 다시 길을 걸었다. 걸어갈 하늘은 엷은 회색 구름으로 덮여 있어 어두웠다. 그런데 방금까지 걸어온 하늘은 파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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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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