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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0 넝쿨

7-1코스(서귀포 버스터미널←제주올레여행자센터, 15.7 km) 2

by 커피소년

이번 올레길에 일주동로와 종종 만났다. 길이 끊겨 횡단보도를 건넜던 도로가, 도로에 닿을 듯하다 다시 해안가로 내려갈 때 만난 도로가 일주동로였다. 일주동로는 일주대로의 일부분이었다. 일주대로는 제주도 해안가를 주로 4차선으로 한 바퀴 도는 1132 지방도로이고, 북쪽의 제주시와 남쪽의 서귀포시가 기점과 종점이 되어 서쪽 구간을 일주서로로, 동쪽 구간을 일주동로로 부른다. 하논분화구에서 올라와 만난 도로는 일주동로였다.

20250521_093427.jpg <일주동로>


일주동로를 따라 오른쪽으로 내려가다 횡단보도를 건너 일주동로에서 갈라진 2차선 도로를 걸었다. 고요한 느낌의 도로였다. 사람도 없고 차도 간혹 한 대씩 지나갈 뿐이었다. 한참 동안 걷고 있는데 기분이 싸했다. 이 도로 어딘가에서 다시 작은 길로 꺾어야 했는데 화살표가 보이지 않았다. 너무 깊이 들어온 것 같았다. 카카오맵은 지나쳤다고 알리고 있었다. 이런 일로 자신에게 화내는 것을 포기했다.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지나온 길을 걸으며 화살표를 찾았다. 화살표는 충청고철 간판 아래에 있었다. 오른쪽으로 펼쳐진 고근산을 보며 걷다 이렇게 되었다. 산이 생각보다 크다고 생각하며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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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치선 도로와 화살표>


충청고철의 파란 철판 담을 따라 걸었다. 길은 바로 다시 오른쪽으로 꺾었다. 한쪽은 비닐하우스가 이어진, 다른 쪽은 공간이 트인 감귤 나무밭이 있는 길이었다. 열린 공간으로 산들이 보였다. 산들이었다. 하나는 봉긋 솟은 작은 산이었고 다른 하나는 옆으로 넓게 펼쳐져 육중하게 솟은 큰 산이었다. 전자가 고근산이었고 후자는 한라산이었다. 하논분화구에서 올라와 바로 보였던, 그리고 좀 전 2차선 도로에서 이상하게 크다고 생각했던 산은 고근산이 아니라 한라산이었다. 한라산을 멀찍이 옆에 두고 고근산을 향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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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본 한라산과 고근산>


비닐하우스와 밭이 번갈아 길을 이었다. 높이 자란 나무에는 어김없이 넝쿨이 있어, 나무를 휘감아 타고 올랐다. 나무는 얼마나 귀찮을까? 넝쿨은 건물의 외벽을 덮어 햇빛을 차단하여 실내 온도를 5~10도 낮추는 효과를 준다. 인간에게도 귀찮은 존재지만 어느 정도 인간에게 도움을 주는 식물이다. 그러나 넝쿨에 의해 햇빛을 차단당한 나무도 그럴까? 넝쿨식물의 한 종류인 칡넝쿨은 감아 오른 나무에 상처를 입히기도 하고, 나무의 영양분을 흡수하며 자란다고 한다. 그리하여 나무의 생명을 위협하기도 한다. 나무에 손이 있다면 넝쿨을 떼어냈을 것 같았다. 너무 나간 상상일지도 모르지만 저런 나무를 보고 있으면 미켈란젤로의 조각상, ‘라오콘 군상’이 떠오른다. 라오콘은 트로이 전쟁에서 그리스군이 보낸 트로이 목마를 성안 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고, 목마의 배에 창에 던져 그리스군을 위험에 빠트렸다. 그리스군을 지지한 포세이돈은 이에 분노하여 큰 바다뱀인 피톤 두 마리를 보내 라오콘과 그의 두 아들을 휘감아 죽게 했다. 휘감긴 뱀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며 고통스러워한 모습을 포착한 것이 ‘라오콘 군상’이다. 넝쿨에 둘러싸인 나무의 내면은 저런 라오콘 군상의 모습이 아닐지 생각했다. 참고로 넝쿨은 감는 방향(시계방향, 시계 반대 방향)이 정해져 있다. 시계 반대 방향이면 아무리 인위적으로 방향을 바꾸어도 결국 시계 반대 방향으로 감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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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넝쿨에 감긴 나무들>


돌로 된 모든 것을 수집한 듯한 독특한 집을 지난 길은 호근동으로 들어갔다. 호근동은 고즈넉한 동네였다. 집합주택, 단독주택 등 다양한 주택들이 초록의 식물들과 조화를 이루며 길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호근동 복지회관에서 호근동 지형을 볼 수 있었다. ‘생태관광호근마을’이라는 안내판이었고 호근동은 칠레처럼 길었다. 어제, 오늘 걸으며 거쳤던 몇몇 곳이 호근동에 있었다. 삼매동, 외돌개, 돔베낭골, 속골, 하논분화구, 하논성당터, 봉림사 등이었다. 또한 쇠소깍에서 봤던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이 여기에도 등장했다. 2002년에 몇 곳에만 지정했던 것을, 2019년에는 제주육상전역과 해안선에서 5.5km 이내의 바다까지 생물권보전지역으로 확대되었다. 호근동은 지역이 가지고 있는 자연을 이용하여 환경부로부터 ‘생태관광지역’으로 지정되었다. 올레를 걸으며 여러 마을을 지나쳤지만 이렇게 지정되어 그 사실을 알리는 마을은 보지 못했다. 이런 안내판에서 마을이 가진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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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근동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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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근동 복지회관에 서있는 안내판들>


호근동 복지회관에서 얼마 못 가, 파란 지붕의 여염집인, 그래서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서점이 좁은 인도 옆에 조용히 자리하고 있었다. ‘느긋한 책방’이었다. 처음 시선을 잡은 건, 하얀 벽을 배경으로 길게 서 있는 올리브나무였다. 이런 단순한 구도에 나도 모르게 눈이 가기 때문이었다. 매우 깨끗한 외로움이 전해져 온다. 그리고 출입문 유리창의 ‘2025년 5월 주말 책방’에 눈길이 옮겨갔고, 갈색 나무 의자 위에 있는 ‘느긋한 책방’에서 눈길은 멈췄다. 책방이라 하기엔 너무 작지 않을까? 다시 ‘주말 책방’에 시선이 갔다. 주말에만 문을 여는 것일까? 그런데 정말 그랬다. 주말에만 문을 열었다. ‘느긋한’ 의미가 이런 건가? 생각했다. 일주일을 아등바등하지 않고, 일주일 중 이틀만 손님을 맞이하는, 그래서 들어온 이도 느긋하게 둘러보고 가는 그런 책방이 떠올랐다.

20250521_100246.jpg <느긋한 책방>


길은 본류에서 갈라져 지류로 나아갔다. 그러면서 낮은 집담에도 우거진 나무들의 밀도가 높아, 드문드문 있는 집들이 가려진 호젓한 길이었다. 마을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중산간동로를 건너 한라산 기슭을 향한 2차선의 도로를 만나고 나서야 마을을 벗어났음을 느낄 수 있었다. 주변에 갑갑한 것이 없어서 그런지 도로는 2차선임에도 넓은 느낌이었다. 게다가 차들이 간혹 다닐 뿐이었고 사람은 보이지도 않았다. 혼자였다. 마치 아주 넓은 공간을 혼자 쓰고 있는 느낌이었다. 심심하고 쓸쓸했다. 뭐라도 없을지 둘러봤지만, 솟은 나무와 귤 농장뿐이었다. 쭉 뻗은 도로를 보며 영화 ‘아이다호’에서 리버 피닉스가 한가운데로 걸었던 도로가 떠올랐다. 메마르고 황량한 그리고 서늘하게 쓸쓸했던 도로였다. 이 도로는 메마르지도 황량하지도 않은데 그 도로가 떠오른 이유가 무엇일까? 정서 때문일지도 모른다. 쓸쓸함. 어쩔 수 없이 혼자 걸을 수밖에 없는 쓸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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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했던 도로 / 영화 아이다호 : 출처 네이버 영화 >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하늘은 잔뜩 물 머금고 있는, 여러 겹이 겹쳐 어두운 한지 같은 먹구름으로 덮여있었다. 사부작사부작 내릴 것 같지 않았다. 쏴~쏴~ 쏟아질 것 같았다.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비가 쏟아지면 아무래도 청바지는 물기를 잔뜩 먹어 무거워져 걷는데 무리였다. 챙겨 온 등산바지로 갈아입어야 했다. 카카오맵을 보니 도로에서 고근산으로 들어가는 길 입구에 서호마을 게이트볼장이 있었다. 거기라면 화장실이 있을 것 같았다. 그곳에서 갈아입기로 했다. 우산을 쓰고 빠르게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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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비가 쏟아질 것 같은 하늘>


서호마을 게이트볼장은 오랜 시간 사용되지 않은 듯 너무 낡아 있었다. 다시는 게이트볼을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버려졌다는 게 더 정확했다. 예전에는 회원들이 모여 쉬었을 컨테이너가 보여 가보니 잠겨있었다. 화장실이 있겠지 하며 둘러보았지만 없었다. 난감했다. 햇빛 가림막이 있는 벤치가 있었다. 최소한 한 방향을 가려주었다. 어차피 사람도 없는 길이니 염치 불고하고 갈아입기로 했다.

20250521_103507.jpg <서호마을 게이트볼장>


계속 올레길을 올려다보며 갈아입었다. 다행히 누구도 지나가지 않았다. 어제저녁 편의점에서 사둔 에너지바를 먹으며 짐을 다시 정비했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다시 걸었다. 우산을 쓰며 걸어서인지 주변을 볼 수 없었다. 아스팔트와 시멘트 길이었고 숲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짙었다. 사위는 너무도 조용했고 길 주변은 나무들로 빽빽했다. 화살표가 방향을 바꾸어 고군산으로 오르는 길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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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사부작사부작 내리고 있었다>


오르는 길은 정비가 잘되어 있었다. 야자 매트가 길을 덮어, 이렇게 비 오는 날에도 미끄러지지 않았다. 경사가 좀 더 있는 곳은 나무 데크를 만들어 놓았다. 이 길에서 두 명이 날 지나쳐 내려갔다. 올레를 걷는 이들이 아니라 고근산 정상까지 올라왔으나 비가 오니 급하게 내려가는 마을 주민 같았다. 정상 근처에 오니 나무들에 가려졌던 하늘 공간이 열렸다. 그리고 비가 예감처럼 쏟아졌다. 뒤를 보니 나뭇가지 사이로, 물안개 사이에서도 거대한 한라산의 능선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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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근산 오르는 길>
20250521_105030.jpg <공간이 열리면서 희미하게 보인 한라산 능선>

(2025.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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