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도 20년이 넘은 이때...
<표지 이미지 출처: 아시아엔>
근현대 한국에서 무당의 이미지는 별로 좋지 않았다. 아니 근현대 이전에도 그리 좋았다고는 할 수 없다. 양반들까지도 걱정거리가 있는 이들은 은밀히 무당을 찾았으나 유학을 숭상했던 조선시대에서 무속은 기본적으로 천시의 대상이었다. 개화가 되고 현대화가 이루어지면서 무속은 더욱 탄압을 받았다.
일제는 조선의 전통을 부정하고자,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뭔가를 획책할지 모른다는 이유로 무속을 금지했고, 해방 후 들어선 정권들은 무속이 근대화를 가로막는 미신이라며 탄압했다. 신당은 불태워지고 무당집에는 돌이 날아들었다. 대대로 무업을 이어오던 세습무들은 자식들이 무당의 자식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직업을 바꾸었다.
2024년 현재 한국의 무속인 수는 80만 명에 이른다. 2000년대 초반 20만 명에서 네 배 가까이 증가한 수치다. 조사기관과 통계에 따라서는 100만 명에서 200만 명을 보고하는 경우도 있으나, 실질적으로 신당을 열고 무업을 하는 무당은 40만에서 60만 정도로 추정된다. 그 수도 수려니와 무엇보다 달라진 것은 무속과 무당에 대한 인식이다.
2023년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파묘>에는 이른바 신세대 무당이 등장한다. 가죽코트에 구두, 문신에 헤드폰을 갖춘 신세대 무당은 한복에 컨버스 운동화를 신고 굿을 한다. 힙함 그 자체다. 무속의 대중화(?)는 하루아침의 일이 아니다. 196,70년대만 하더라도 무당은 어두운 곳에서 누군가를 저주하는 음습한 이미지로 묘사되었으나 80년대 들어 무속을 전통문화의 하나로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굿의 형식과 기예를 보존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문화적 다양성이 주목받던 90년대와 케이블TV와 종편이 등장한 2000년대를 거치면서 무속은 문화콘텐츠가 된다. 납량특집, 심령물을 필두로 무당의 개인사를 다루는 프로그램과 다큐멘터리 등 무속과 무당에 대한 많은 프로그램들이 제작되었고, ‘무릎팍 도사’와 ‘무엇이든 물어보살’ 등 무속 컨셉의 예능은 물론 ‘신들린 연애’처럼 무속인들이 직접 출연하는 예능 프로그램도 등장할 정도로 무속은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이러한 흐름과 더불어 점점 커지는 현대사회의 불확실성 또한 무속인의 증가와 관련이 있다. 과거에 비해 우울과 불안을 호소하는 이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고 이 중에는 정신과나 상담으로 해결되지 않는 케이스들도 많다. 이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신내림을 받고 무당이 된다. 과거처럼 무당이 천대당하고 손가락질 받는 시대가 아니기에 상대적으로 선택이 쉬워진 측면이 있다.
물론 정신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이 곧 신내림의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조현병이나 해리 장애를 신병으로 착각하여 무속인을 찾는 환자들도 많고 절박한 이들을 이용해서 억지로 신내림을 받게 하는 나쁜 무속인들도 존재한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현대 사회에 정신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이 늘어났고 이들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요구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정신의학과 임상 및 상담심리학이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한국인들은 여전히 무당을 찾는다. 여기에는 콘텐츠로 접한 무속의 친숙함을 뛰어넘는 문화적 욕구가 있다.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도 정신과 진료나 상담을 받는 사람도, 정치인과 경제인, 심지어 과학자와 학자들도 무당을 찾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점집을 찾는 사람들은 미래가 궁금한 사람들이다. 새로운 사업이 잘 될지, 다음 선거는 어떻게 될지, 언제쯤 취업이 될지, 언제쯤 좋은 짝을 만날 수 있을지 등 지금 내 마음을 힘들고 어렵게 하는 이유는 미래에 있다. 정신과나 상담소의 선생님들은 내 마음을 이해하고 다스리는 법은 알려주실 수 있지만 미래는 가르쳐주지 않는다. 답답한 마음에 상담소를 찾았던 이들은 결국 무속인을 찾아간다.
그렇게 찾아간 무속인에게서는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있을까? 무속인이 이야기해주는 대로 하면 보장된 미래가 찾아올까? 꼭 그렇지는 않다. 그렇지 않다는 것도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무당을 찾는 이유는 통제감에 있다. 사람에게는 통제감의 욕구가 있다. 어느 정도 나의 환경과 주변을 통제할 수 있어야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건강해질 수 있다. 미래가 불안할 때 사람들은 통제감을 상실한다. 사람들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느낄 때 심각한 좌절과 우울을 경험한다. 이때 필요한 것은 내 감정을 이해하고 다스리는 일뿐만이 아니다.
무속인들은 정확한 미래를 알려주지 않는다. 콕 찝어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해야 잘된다고 알려주기보다는 ‘언제쯤 무슨 운이 들어오니 어떤 종류의 일을 해 보는 게 좋겠다’라는 식의 조언을 준다. 그러면 의뢰인들은 자신이 처한 환경과 조건에 무속인들의 말을 대입해보면서 지금 이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는다. 그러면서 불안을 해소하고 잃었던 통제감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취업이 안돼서 고민인 취준생이 무당을 만났다. 무당은 “지금은 취업운이 없고 2,3년쯤 뒤에 운이 있을 것”이라 이야기한다. 계속되는 취업의 실패를 자신의 불운과 능력부족이라 여기고 괴로워하던 취준생은 그것이 자기 때문이 아니라 시기의 문제였다고 귀인하고 마음이 편해질 것이다. 그리고 운이 찾아올 시기까지 다시 마음을 잡고 공부를 이어나갈 수 있게 된다. 한치 앞이 보이지 않았던 상태에 비해 많은 것들이 명확해진 것이다.
이것이 사람들이 무당을 찾는 이유이자 현대 사회에 무당들이 늘어나는 이유다. 또한 무당을 찾는 사람들이 명심해야 할 사실이기도 하다. 결국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는 주체는 본인이다. 노력하지 않고 시간을 들이지 않고 손쉽게 무언가를 얻으려 하는 이들은 사람들의 그러한 약점을 이용하는 질나쁜 무속인들을 만나게 된다.
아무 효력이 없는 부적을 사거나 비싼 돈을 들여 굿을 하며 오지 않을 미래를 기다리는 것이다. 플라시보 효과와 자기실현적 예언의 효과를 생각하면 부적이나 굿의 효과가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극히 드문 사례를 제외하고는 가성비가 매우 떨어지는 일이다. 중요한 점은 삶의 중심을 유지하는 것이다.
확실한 계획이 있고 가야할 인생의 방향이 있다면 자신의 삶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 점을 보는 행위로 당장의 불안을 줄이고 미래에 대한 통제감을 얻을 수 있다면 무속에 의지하는 것이 그렇게 나쁜 일만은 아니다. 다만 그 결과를 맹신하여 가산을 탕진하거나 중요한 시기에 꼭 해야 하는 일을 놓치는 우는 범하지 말아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