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무너질 거, 이왕이면 완벽하게.

권진아 - 밤

by 조미래


밤이 점점 길어져

가끔 비추는 햇살이

기쁘고 낯설다

익숙한 어둠 속

그렇게 또 한 번

완벽히 무너진다.



나는 우울을 두려워했다. 기분이 처지는 날이면 왜 우울하지, 그럴 이유가 없는데 라며 그저 받아들이면 될 것을 그러지 못하고 늘 애꿎은 원인을 찾으려 애썼다. 우울은 당연한 것이다. 이유 없이 올 때도 있고 이유가 있어서 올 때도 있다. 시시때때로 이유가 있든 없든 찾아오는 이 불청객은 나와 함께 저 밑까지 내려가자고, 함께 굴을 파자고 부추겼다. 예전의 나는 불청객이 내 방문을 두드릴 때마다 한 없이 밑으로 꺼지는 것 같은 침대 위에 무기력하게 누워 갑자기 이유 없이 나를 방문한 이유를 추궁하곤 했다. 그러곤 나를 끌고 함께 저 밑바닥을 찍으려는 불청객에게 손사래를 치며 저리 가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방 안에 혼자 누워 머릿속으로 질문폭탄을 날리면 늘 돌아오는 답은 같았다. 그냥이었다. 그냥. 늘 이유는 찾을 수 없었다.


어김없이 불쑥 우울이 급습한 날이 있었다. 집에 아무도 없는 고요한 휴일. 해야 할 일도 없고, 귀찮게 나가지 않아도 되는 평화로운 휴일. 그런데 갑자기 찾아왔다. 스멀스멀 올라온 우울한 기운은 나를 지치게 만들었다. 소파에 가만히 앉아 아 왜지, 왜 우울하지 하며 신세한탄을 하다가 문득 '그냥 우울하면 안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감정을 밀어낼 필요가 있을까? 그냥 받아들이자.


십 수년간 미워하던 불청객이 삽시간에 애증스러운 오랜 친구가 된 순간이었다.


어쩌면 우울을 불청객으로 취급한 건 나의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 우울은 이겨낼 수는 있지만 겪지 않을 수는 없는 감정이다. 인간은 본래 외로운 존재니까. 가족과 함께 있어도 외롭고, 친구를 만나도 외롭고, 미친 듯이 일을 해도 외롭고, 홍길동 마냥 밖을 싸돌아 다녀도 외롭다. 그냥, 원래 그런 거다. 그런 우울을 굳이 없애려고 하고, 밀어내고, 모른 척하고, 두려워했던 내가 웃긴 걸 수도 있다. 받아들이면 모든 것이 원만해진다.


오랜 불청객을 오랜 친구로 탈바꿈시킨 그날, 나의 머릿속에선 가삿말이 맴돌았다. '완벽히 무너진다.' 처음 오디션 프로에 나왔을 때부터 '내 가수'라고 점 찍어뒀던 권진아의 노래였다. 앨범이 발매된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 '밤'을 처음 듣고 가사를 보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있을까 싶었다. 우울에 빠지면 빠져나오려고 허우적대는 수영 생초보인 나와는 다르게 노래 속의 그녀는 어차피 수도 없이 무너질 거 차라리 시원하게, 완벽하게 무너져 버리자고 얘기하고 있었다. 그녀는 언젠가 라이브 무대에서 곡소개를 하며 '완벽하게 무너지는 순간이 있어야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 같다.' 라고 얘기한 적이 있었다. 나는 왜 그런 마인드를 가지지 못했을까 감탄하곤 나도 이렇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하며 들었던 노래였다. 마음에 새겨두었던 가사가 내 안을 맴돌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나에게 인생의 오랜 친구를 하나 만들어 주었다.


무너지는 걸 두려워하는 건 당연하다. 넘어지면 아프고 무너지면 처음부터 다시 쌓아야 하니까. 하지만 살면서 한 번쯤, 아니 여러 번 무너지는 것도 당연하다. 바닥까지 내려앉아도 괜찮다. 내려가다 내려가다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어지면 가만히 서서 주변을 돌아볼 시간이 생긴다. 찬찬히 재정비를 하고 힘을 내서 다시 지상으로 올라올 준비를 하는 시간.


그 가삿말은 나에게 우울해도 괜찮고 가라앉아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뭐가 되었든 괜찮다고. 지금이 있기에 다음이 있고 그 다음이 있기에 또 다른 나의 세상이 다시 세워지는 거라고. 사각사각 글씨를 쓰는 듯한 목소리를 귀에 꽂고 듣고 있으면 마음 속 어딘가에서 멋대로 엉킨 원인 모를 생각들이 한 올 한 올 풀려나가는 듯한 기분이 든다.


이왕 삽질할 거 끝까지 내려가 축축한 땅에 옷이 젖을 때까지 누워있어도 좋고, 이왕 끝 없이 떨어질 거 그냥 스카이다이빙을 한다고 생각하고 시원하게 떨어져보는 것도 괜찮다. 그리고 이왕 무너질 거 완벽하게 무너져도 괜찮다. 내가 완벽하게 무너지는 그 순간에, 모든 것이 허물어지는 그 순간에 더 성장한 내가 완벽하게 일어설 수 있게 될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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