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개인을 해고한다

2. 소유의 증명

by NT
"We define an electronic coin as a chain of digital signatures."
(우리는 전자 화폐를 '디지털 서명의 사슬'이라고 정의한다.)

- Satoshi Nakamoto, Bitcoin Whitepaper Section 2


은행 앱을 켜고 비밀번호 6자리를 누른다.


로그인 성공.


우리는 이 과정을 내가 내 돈에 접근하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이것은 요청(Request)이다. 내가 은행 서버라는 거대한 성벽 앞에서 문을 두드리면, 문지기(은행)가 내 신분증을 확인하고 문을 열어주는 구조다. 만약 문지기가 기분이 나쁘거나(계좌 동결), 시스템 점검 중이라면?


나는 내 돈을 만질 수 없다. 문지기가 열어주기 전까지 내 돈은 내 것이 아니다.


사토시 나카모토는 백서 2장에서 이 오만한 문지기를 해고해 버렸다. 대신 그는 '수학(Mathematics)'을 고용했다.


백서 2장의 제목은 'Transactions(거래)'다. 여기서 사토시는 돈을 아주 독특하게 정의한다.


"코인은 곧 디지털 서명의 사슬이다."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일까?


현실의 5만 원권 지폐를 보자. 신사임당 그림이 그려진 종이다. 이 종이가 내 지갑에 있으면 내 돈이다. 하지만 디지털 세상에는 '종이'라는 물체가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이건 내 돈이야"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사토시의 대답은 이것이다.


"과거의 주인이 '다음 주인은 너야'라고 서명해 준 역사(History) 자체가 곧 돈이다."


이 과정을 이해하려면 '디지털 서명(Digital Signature)'이라는 마법을 들여다봐야 한다.


중세 시대 왕들은 편지를 보낼 때 촛농을 떨어뜨리고 그 위에 자신의 반지를 찍어 봉인했다. 누구나 그 무늬를 보면 "아, 왕이 보낸 것이구나"라고 알 수 있다. 그 무늬를 찍을 수 있는 사람은 반지를 가진 왕뿐이까.


비트코인의 원리가 이와 같다. 나에게는 나만 아는 개인키(Private Key)가 있다. 이것은 왕의 반지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에게는 나의 공개키(Public Key)'가 알려져 있다. 이것은 내 인장의 무늬다.


내가 철수에게 1비트코인을 보낸다는 건, 네트워크에 이런 외침을 던지는 것이다.


"나는 이 코인의 다음 주인이 철수임을 선언한다! 여기 내 반지로 찍은 도장을 봐라!"


이때 찍히는 디지털 서명은 기가 막히게 정교하다. 단순히 똑같은 도장을 계속 찍는 게 아니다. 거래할 때마다 내용(누가, 언제, 얼마를)을 바탕으로 매번 전혀 다른 모양의 도장이 생성된다. 즉, 누군가 내 옛날 서명을 오려내서 위조할 수 없다.


수학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반지(개인키)가 없으면 절대 그 도장 모양을 만들어낼 수 없다. 반대로 반지만 있다면, 은행장의 허락 따위는 필요 없다. 내가 서명하는 순간 소유권은 확실하게 철수에게로 넘어간다.


이것이 바로 '검열 저항성'의 원천이다. 은행 시스템에서는 은행이 "너 이 돈 쓰지 마"라고 막을 수 있다. 내 장부를 그들이 가지고 있으니까. 하지만 비트코인 시스템에서는 누구도 나를 막을 수 없다. 내가 내 키를 가지고 올바른 수학적 서명을 만들어내면, 전 세계 그 어떤 컴퓨터도 이 거래를 거부할 명분이 없다. 수학적으로 참인 명제를 거부할 권한이 누구에게도 없기 때문이다.


사토시가 만든 이 시스템에서 우리는 더 이상 계좌(Account)를 갖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열쇠(Key)를 갖는다.


계좌는 은행이 관리해 주는 공간이다. 열쇠는 내가 관리하는 권력이다. 잃어버리면 누구도 찾아줄 수 없지만, 가지고 있는 한 누구도 뺏을 수 없다.


사토시는 비트코인 백서 2장을 통해 선언했다. 돈은 은행 데이터베이스에 적힌 숫자가 아니다.

"내가 나임을 증명하는 서명(Signature)들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 순수한 소유권의 사슬이다."


이 2장의 설계도가 세상에 나온 순간, 인류는 처음으로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는 완벽한 소유를 손에 쥐게 되었다. 물론, 사토시에게는 아직 풀어야 할 숙제가 남아 있었다.


"서명은 확인했는데... 그 돈을 아까 딴 놈한테 몰래 쓰고 또 쓰는 건(이중 지불) 어떻게 막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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