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에스파가 ‘가상세계의 아바타’ 컨셉을 들고 등장하던 때를 기억하시나요? 에스파는 현실 세계의 4인멤버의 데이터로 만들어진 또 다른 멤버(ae-카리나, 윈터, 지젤, 닝닝) 4인이 함께하는 그룹으로 데뷔했습니다. 여기서 ae들은 실제 멤버들이 목소리 연기를 하고, 멤버들의 동작을 모션캡처로 적용해 만들어진 아바타입니다.
에스파의 컨셉은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과 의구심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는데요. 성상품화 문제부터, 현실 아이돌의 비인간화가 반영된 결과물이라는 얘기까지 결국 ‘비용이 드는 데다, 늙지도 않고, 사회적 윤리적 문제도 없는’ 완벽한 아이돌을 만드는 엔터회사의 궁극적인 목표를 위한 초석인 것인가 하는 데에 논란을 불러일으켰죠.
물론 지금의 에스파는 SM 3.0 이후로 이수만 프로듀서의 손을 벗어나 ae 니 블랙맘마니 광야 등등 하는 컨셉들을 싹 다 지운 것 같긴 하지만요. 에스파만의 독특한 컨셉이 사라진 채 다른 그룹과의 차별점은 없어졌지만, 지금의 에스파가 4세대 아이돌의 대표 주자 중 한 팀인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최근 이 에스파의 멤버 카리나를 두고 벌어진 사건들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는데요. 애초에 ‘가상 세계’ ‘가상아이돌’을 컨셉으로 등장한 데다, 가상 아이돌이 인간 아이돌의 한계를 대체할 수 있을지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그 에스파의 멤버였기 때문이죠. 게다가 “카리나는 신이에요” 밈이 있을 정도로 완벽함에 가깝다고 칭송받기도 했던 카리나가 열애설로 인해 팬덤과 대중에 이러한 반응(특히 일부 팬덤이 잘못에 대한 사과를 요구했고 실제 사과문을 올린 것)을 불러왔다는 사실이 좀 아이러니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최근에 유튜브에서 장안의 화제라는 플레이브의 멤버들을 재재가인터뷰한 영상을 보게 되었어요.
저는 이 인터뷰를 무척 재밌게 보았어요. 버추얼 아이돌도 다르지 않구나하고요. 왜 유독 플레이브가 많은 아이돌 중에서 덕후몰이를 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습니다.
초동 56만 장을 넘을 정도로 플레이브의 팬덤은 놀라운 화력을 보여주고 있죠. 음원 차트에서도 상위권을 유지했는데, 미니 1집의 타이틀곡 '여섯 번째 여름'은 지난해 데뷔한 신인그룹의 노래 중 멜론에서 한 해 동안 가장 많이 재생된 곡으로 꼽히기도 했습니다.
플레이브가 사랑받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도 아이돌 팬으로서, 케이팝 문화에 관심이 많은 대중의 한 사람으로서 이들이 누구인지 무척 궁금해졌습니다.
AI는 단순 노동뿐 아니라 예술의 영역까지 침범하고 있고 정말 예상치도 못한 속도로 우리의 일상을 잠식하고 있는 중인데요. 지금의 기술발전 속도라면, AI를 본격적으로 활용한 버추얼 아이돌이 등장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생각이 드는 요즘인데요. 인간이 가진 리스크가 없는 완전한 형태의 아이돌로서, 버추얼 아이돌이 인간 아이돌을 대체할 수 있다는 발상에 불을 지필 수 있을까요?
이번 카트에서는 플레이브를 중심으로 버추얼 아이돌의 성공과 그들의 존재가 케이팝 아이돌 산업에 던져주는 시사점에 대해서 이야기해 봅니다.
오늘의 카트 목록
플레이브의 성공과 카리나의 자필 사과문 사이에서 던지는 질문,
버추얼 아이돌은 인간 아이돌의 발전된 형태일까?
1. 버추얼 아이돌, 뒤에 사람 있습니다
2. 버추얼 아이돌 계보를 알아보자
3. 에스파 이후 플레이브의 성공이 의미하는 것
4. 결론 - 아이돌 산업을 바꿀 수 있을까?
버추얼 아이돌, 뒤에 사람 있습니다
버추얼 아이돌은 가상의 캐릭터로 활동하는 아이돌을 뜻합니다. 그 안, 그러니까 본체에 사람이 있는 경우도 있고 없는 경우도 있는데요.
최근 끝도 없이 생산되고 있는 콘텐츠로 AI 밤양갱 시리즈가 있죠. ‘AI OOO가 부르는 XXX’ 콘텐츠들이 인간의 목소리를 활용한 기계의 음악이라면, 기계에 인간을 입힌 것이 버추얼 아이돌(가상 아이돌)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작년 화제가 되었던 ‘메이브’라는 그룹은 AI버추얼 휴먼 즉 가상 인간들로 구성된 아이돌 그룹입니다. 이들은 넷마블 자회사인 메타버스엔터테인먼트와 카카오엔터의 합작으로 만들어졌습니다. TV광고에 출연하며 화제를 모았던 로지 같은 버추얼 인플루언서들은 실체가 없는, 소프트웨어적으로 구현된 인물에 가까운데요. 이런 버추얼 휴먼들로 조직된 그룹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그러나 최근 인기를 얻고 있는 버추얼 아이돌인 플레이브, 이세계아이돌의 경우는 뒤에 사람이 있습니다. (아이돌 뒤에 사람 있어요) 그러니까 펭수라는 캐릭터 안에 내장(?)이라고 불리는 본체가 존재하듯이요. 이세계아이돌의 경우는 버튜버 문화(버추얼 유튜버)에서 시작된 그룹이고요. 플레이브는 버튜버 보다는 기반이 케이팝이란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이건 조금 뒤에 다뤄볼게요.
아이돌은 엔터사가 만들어낸 ‘컨셉과 이미지’가 있고, 능력이나 외모나 성격에 따라 팀 안에서 맡고 있는 포지션도 캐릭터도 다르기 마련입니다만. 한 사람의 모든 것, 그러니까 과거와 현재 모든 것이 다 콘텐츠화되어 소비되죠. 그렇기 때문에 ‘아이돌’이라는 직업은 노동의 측면에서 비인간적인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플레이브와 같은 버추얼 아이돌은 다릅니다. 자신의 현실은 완벽하게 감추고, 버추얼 아이돌이라는 새로운 자아, 그러니까 아바타로서 활동하는 점이죠. 노동 강도로 보면 큰 차이가 있죠.
사이버 가수? 버추얼 아이돌? 계보
버추얼 아이돌은 1990년대의 사이버 가수(직업이 가수로 설정된 가상 인물), 보컬로이드(야마하에서 개발한 음성 합성 엔진과 이 엔진을 사용해 노래를 만들 수 있는 소프트웨어 혹은 이미지 캐릭터), 버추얼 인플루언서, 버튜버(영상 콘텐츠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버추얼 인플루언서)까지 다양한 ‘가상인간’의 계보 속에서 등장한 “기술적으로 발전된 형태의 사이버 가수”라고 볼 수 있습니다. (‘메타버스 환경에서의 가상 아이돌 콘텐츠 연구 : 이세계 아이돌을 중심으로, 박성련’)
버추얼 유튜버, 아이돌이 이미 서브 컬처씬에서나 일본에선 인기를 많이 얻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저 같은 머글이 알 정도로 양지로 올라온 것은 불과 몇 년 사이인 것 같아요. 특히, K-POP과 버추얼 아이돌의 결합이 본격적으로 알려진 건 에스파가 시작이 아닐까 싶습니다.
에스파 이후 플레이브의 성공이 의미하는 것
케이팝, 에스파, 플레이브 레츠고
에스파가 버추얼휴먼을 활용한 세계관을 선보이긴 했지만, 현실에는 4인의 진짜 멤버들을 기반으로 만들어낸 가상의 ae들은 팬들과 직접 소통한다던지 단독으로 활동했던 적은 없었습니다.
플레이브의 경우는 다릅니다. ‘동시성’이 추가된 것이죠. 이건 기술력 덕분인데요. 모션캡처 기술을 활용해서 사람이 움직이면 캐릭터도 실시간으로 따라 움직이는 게 가능하죠. 플레이브는 MBC 사내벤처로 시작한 ‘블래스트’라는 스타트업이 만들었다고 하는데요. 게임이나 영화 제작 기술에 사용되는 언리얼엔진 기반의 아바타를 실시간 방송에 사용합니다.
기획부터 사람들의 거부감이 있는 가상 인간은 제외하고, 이미지도 한국 웹툰에 나오는 것과 유사하게 접근했다고 하네요. 그러니까 플레이브는 버튜버 쪽보다는 케이팝 아이돌에 가깝고, 그렇게 본다면 ‘버추얼’이라는 것이 하나의 컨셉인 신인 아이돌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플레이브의 성공 이유 - 쌍방향 의사소통
3세대 케이팝 팬덤은 많은 변화를 겪어왔는데요.
특히 <프로듀스 101> 시리즈로 대표되는 육성형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 등을 통해 생산 단계에 직접 참여해 본 ‘3세대 팬덤’은 과거에 비해 양적으로 확장한 동시에 주체성과 기획 능력을 갖추게 되었고, 소통의 방식도 쌍방향에 가까워졌습니다. 애정을 기반으로 아티스트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도 소비자 행동주의를 장착한 세대기도 하죠. 팬과 아티스트의 관계성, 진정성 등이 중요한 상황이죠.
그러므로 지금의 문화에서는 반짝이고 고급스럽고 좋은 음악도 중요하지만 ‘쌍방향 의사소통’ , 하나의 팀으로서 함께 성장한다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주는 그룹이야말로 더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플레이브가 인기를 얻은 이유도 이 후자가 크다고 봐요.
플레이브의 성공요인을 찾아보면 ‘직접적인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이 빠지지 않고 등장합니다. 버추얼 휴먼 아이돌의 가장 큰 맹점으로 꼽히던 팬들과의 즉각적인 소통뿐 아니라, 실제 아이돌 그룹을 좋아하면서 팬들이 접할 수 있는 콘텐츠나 행사부터 콘서트까지 소화가 가능합니다.
플레이브는 주 2회 유튜브 라이브를 진행하고 있는데요. 그것들이 쇼츠로 재생산되며 알고리즘을 타고 유입되는 경우가 많다고 하네요.
버추얼이 중요한 게 아니라, 케이팝이다 - 신선한 컨셉의 성공사례
플레이브는 K팝 팬들부터 버추얼 휴먼, 2D 캐릭터 등을 좋아했던 팬덤, 버추얼 휴먼의 기술에 관심을 갖는 이들까지 다양한 분야의 팬층을 흡수했습니다.
그럼에도 근본적으로 케이팝 아이돌입니다. 이 부분이 다른 버튜버와는 다른 점이죠.
플레이브의 성공은 버추얼 아이돌의 성공보다는 대형 기획사 출신이 아닌 아이돌 제작경험이 없는 중소기획사의 성공 사례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공중 분해되어 버리긴 했지만, 트렌디한 음악으로 빌보드 HOT100에 오르는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낸 피프티프티처럼요.
사실상 버추얼이라는 건 그간 시도가 없었던 ‘신선한 컨셉’ 에 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신선함에 팬들이 반응한 것이고요. Z세대, 알파세대는 버튜버, 버추얼 아이돌에 대한 거부감이 적은 ‘버추얼 프렌들리’ 세대로 불린다고 하니까요. 물론 좋은 음악이나 퍼포먼스는 당연히 도움이 되었을 것이고요.
멤버 개인으로 보면은 외모가 아닌 실력이 있다면, 아이돌로 사랑받을 수 있다는 하나의 기회를 제공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아이돌들에게 매력적인 외모는 거의 디폴트 값이고 모든 것이 완벽한 육각형 아이돌이 사랑을 받는 시대니 까요). 버튜버, 버츄얼 아이돌의 경우는 이런 “가능성” 이 열려 있습니다. 이것이 플레이브 이후에도 유효할지에 대해서는 지켜봐야 하겠지말요.
팬을 결집시키는 이유
이들은 ‘팬사랑이 대단한, 재미있는, 실력 있는, 음악이 좋은’ 아이돌로 꼽히고 있습니다.
실제로 팬들 중에는 “버추얼이라서” 좋아하는 사람들은 없다고 합니다. 외모, 비주얼 등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사실상 실력이나 그들이 가진 서사에 더 집중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고군분투하는 멤버들의 성장기를 보고 감동을 받아서, 웃긴 자컨(자체콘텐츠)를 보다 보니 빠져들어서, 우연히 노래를 들었는데 노래가 너무 좋아서…등등. 다른 아이돌을 좋아하는 이유들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게다가 기술적 오류 등은 하나의 입덕 포인트로 작용하죠. 너무 완벽하면 사랑을 받지 못합니다. 사랑을 받는 캐릭터는 매력적인 결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아주 딱 맞죠.
플레이브의 멤버들은 실제 현실의 아이돌 그룹처럼 형동생 관계를 기반으로 하고, 멤버 각자의 취향도 실제를 반영하는 등 확실한 캐릭터성을 가지고 있어요. 멤버들 간의 조합(케미)은 덕질의 중요한 요소인데요. 여느 아이돌과 다르지 않은 것이죠.
플레이브는 우주에서 온 외계인이라는 설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상 세계 카엘룸에 살던 캐릭터들이 지구의 개발자로부터 능력을 부여받아 아스테룸으로 오게 됐고, 지구(테라)와 소통할 수 있게 됐다는 세계관인데요. 이런 SF 적인 설정은 만화적인 외양+기술적인 요소들과 만나 꽤 그럴듯하게 어우러집니다.
게다가 ‘버추얼 아이돌의 편견을 부셔야 한다’는 대의도 팬들을 뭉치는데 기여하는 것 같습니다.기존 아이돌 덕질에서도 중요하게 여겨지는 음원 스트리밍에 특히 공을 들인다고 하는데요. 일반인들에게 플레이브가 알려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음원 차트를 공략하는 것이 유효할 것이라고 본 것이죠. “플레이브를 사회에 단단하게 정착시킨다는 목표”라고 합니다.
‘버추얼’ 이므로 좋아하진 않겠으나, ‘버추얼 아이돌’만 갖는 속성 때문에 더 공감받는 지점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돌을 꿈꾸던 연습생 출신이라는 점, 여러 가지 한계를 극복하고 지금의 기회를 잡아 데뷔를 한 실제 본체의 이야기에 대리만족하는 팬들도 있는 것 같아요.
본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제 ‘본체’ 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요. 버추얼 아이돌은 본체에 대한 리스크는 존재하지 않을까요?
많은 버추얼 아이돌 팬들은 본체를 궁금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알고 싶어 하지 않는 것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알려고 하지도 말고, 알려주지도 말라’는 거죠. 본체가 누구인지 알게 되는 것을 영화 <매트릭스>에 나오는 먹으면 각성이 되는 약인 ‘빨간약’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사실 내가 보고 좋아한 이미지는 이 캐릭터인데, 실제 갑자기 전혀 다른 모습의 실제 인간이 나온다면 뭔가 불일치되는 느낌이 들 것 같긴 합니다. 본체를 별개로 생각하고, 긍정적이 혹은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플레이브로서 일하고 있는 것을 존중할 뿐이라고 해요. 이러한 점이 일반적인 일반적인 케이팝 아이돌과 다른 부분인 것 같습니다.
플레이브 소속사 대표는 "'디지털 펭수'라고 생각을 한다. 펭수라는 캐릭터를 소비할 때 어떤 분이 뒤에 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이 있지 않나. 그 본체를 파는 걸로 IP를 소비하진 않는다. 플레이브도 그 뒤에 시연자가 있는 게 맞다.” 고 말하기도 했죠.
보통 케이팝 아이돌에게 평범한 욕망을 드러내는 일은 금기시되는 데다, 혹독한 자기 관리는 필수적인데요. 연예계에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지 않고, 윤리적인 문제가 없음에도 다른 어떤 직업군보다도 ‘개인적인 문제(연애부터 태도 문제까지)’에 대한 자기 검열을 요구받기도 하죠. 버추얼 아이돌 팬들이 본체를 궁금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확실히 인간 아이돌이 지닌 사생활에 대한 우려가 덜한 건 맞겠지요. (물론 범법행위를 했다거나 반윤리적인 행동을 한 게 본체임이 밝혀지는 건 다른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플레이브 같은 버추얼 아이돌은 버추얼 휴먼으로 구성된 메이브와 같지는 않으므로, 플레이브 멤버들을 맡아 활동하고 있는 본체가 다른 사람으로 대체되기는 힘들 겁니다. 펭수가 펭수 내장이 다른 이로 교체될 경우 지금처럼 사랑받을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고개를 젓게 되듯이요. 이 점에서는 아이돌 그룹의 태생적인 리스크가 사라지지 않는 것 같아요.
결론
다른 아이돌 그룹의 팬으로서 저 개인적으로 카리나의 사과 포스팅은 여러 감정이 드는 착잡한 사건이었습니다. 만약 내 아이돌에게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나조차도 무비판적으로 소비하고 공모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죄책감도 들었고요. 아이돌로 대표되는 케이팝 산업은 관심이 없는, 외부에서 보기엔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팬과 아이돌의 관계를 재료 삼아 수십 년 동안 확장되어 왔습니다. 아이돌은 아이돌로서의 성공 외에는 다른 욕망을 품거나 표현하지 못하는 ‘암묵적인 동의’를 전제로, 팬덤의 대가 없는 무한한 애정을 받는 구조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합니다.
이번 버추얼 아이돌에 대해 찾아보면서, 플레이브와 플리(팬덤명)와의 관계는 현재의 아이돌과 팬의 구조와는 달리 ‘서늘함’ 이 존재한다는 점이 신선하기도 했습니다. 본체보다는 역할로서 플레이브 멤버를 대하고 있다는 점이 케이팝 아이돌-팬덤의 관계와 확실히 다른 것 같았거든요.
하나의 팀이자 동료로서, 성공을 위해 함께 움직이는 팬덤과 아이돌의 끈끈한 유대감. 그만큼 아이돌로서의 성공 외에는 개인적인 감정(ex) 연애, 개인사, 숨겨야 하는 부정적인 감정들 등)은 모두 허용되지 않은 채, 24시간 감정 노동을 하는 것이 당연한 아이돌이라는 직업의 당연함에 대해 조금은 균열을 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버추얼 휴먼이 아이돌이라면 모두가 행복해질까요? 본체가 AI인 메이브는 그간 쌍방향 소통이 어려웠는데요. 1:1 실시간 채팅이 가능한 서비스를 선보였는데요. 페르소나 AI 기술을 반영해서 소통하는 아이돌 채팅 서비스와 달리 팬들과 프라이빗한 1:1 대화가 가능하다고 하네요. 과연 AI로 쌍방향 소통의 갈증을 해결할 수 있을지 궁금해집니다.
팬과 아이돌 사이의 감정적인 교류, 연대 같은 감정들은 다른 데서 얻지 못할 충만함을 느끼게 해주는 건 사실입니다. 이 점이 아이돌 산업만의 독특한 지점이기도 하고요.
언젠가 끊임없는 학습을 통해 AI가 인간의 감정을 똑같이 따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할 수 있겠지만, 시간은 더 걸릴듯 싶어요. AI란 것은 결국 확률을 찾는 과정인 것인데, 인간의 감정이란 너무 갑작스럽고 무작위적일 때가 많으니까요.
버추얼 아이돌은 K-POP의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을 수 있을까요? 에스파가 화두를 던진 후 4년이 흐른 지금, 그들이 연 새로운 가능성에 다른 플레이어들이 등장할지, 플레이브 그다음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