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 창작, 예술가, 리더 그리고 이야기의 본질
내가 좋아할 것 같다며 남편이 틀어준 추석 특집 2부작이었다. 박찬욱 감독에 대한 다큐멘터리. 큰 기대 없던 처음이 무색하게, 치킨 먹으며 보다가 빠져들어 허겁지겁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바람에 급기야 체하기까지 했고- 두 시간이 넘는 영상을 단숨에 다 본 뒤에는 거장의 서사와 뚝심에 압도 당해 밤새 잠을 설쳤다.
그리고 쓴다. 기록하여 기억하기 위해서.
1. 보이는 것은 성공이나, 그 뒤엔 언제나 실패가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ㅡ 실패했다는 건, 도전했다는 뜻이다.
놀랐던 점은 그에게도 실패가 있었다는 것이다. 처음 두 번, 그의 영화는 실패했다. 하고 싶은 일로 돈을 벌 수 없게 되자 평론가로 잠시 살며 생계를 유지했던 것 같다. 망한 감독과 망한 배우가 만나ㅡ 아마도 모든 것을 걸었을 그 시작이 <공동경비구역 JSA>이였고, 그것이 내가 아는 박찬욱 감독의 시작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보이는 성공 뒤에는 보이지 않는 처절한 실패가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실패해 봤다는 것이다. 실패는 도전한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이기에ㅡ 해보는 용기, 밀어붙인 뚝심이 있는 자만이 실패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아무것도 실행하지 않는 나에게는 어서 빨리 뭐라도 해보라는 신호탄처럼 들렸다.
2. 창작의 본질: 필요한 이야기를 한다.
쓰지 않고는 못 배기는 이야기를 쓰자.
요즘 읽고 있는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 Letters To a Young Poet>에서 릴케가 카푸스에게 예술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는 구절이 있다.
(...): by what measure do we reckon a poem worthy or unworthy?
Not by any measure that the outer world has to offer. Only one rule applies: ‘A work of art is good if it has arisen out of necessity.’
우리는 어떤 기준으로 시가 훌륭하거나 그렇지 않다고 판단하는가?
그 기준은 외부 세계가 제공하는 어떤 잣대도 아니다. 오직 한 가지 규칙만 존재한다: “예술 작품이 ‘필연성(necessity)’에서 비롯되었다면, 그것은 좋은 것이다.”
박찬욱 감독의 인터뷰에서 릴케의 구절이 겹쳐 들렸다. 끝끝내 영화 한 편이 만들어지는 건 그것이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중간에 엎어졌을 거라고 그는 말한다.
'쓰지 않고는 못 배기는 이야기'를 쓸 때, 그것은 예술이 된다. 남들이 하는 이야기, 해야만 할 것 같은 이야기ㅡ 즉 외부에서 오는 이야기는 힘이 없다. 거기엔 진짜 내가 없기 때문이다.
3. 예술가의 본질: 참고 견디는 자
어떤 시간을 통과할지라도, 계속 써야 할 지어니.
위에 인용한 같은 책에서 릴케가 <Rodin에 대하여 / Über Rodin>라는 평전을 쓰며 적은 문장이 있다.
‘There is in Rodin a deep patience which makes him almost anonymous, a quiet, wise forbearance, something of the great patience and kindness of Nature herself, who … traverses silently and seriously the long pathway to abundance.’
“로댕 안에는 그를 거의 이름 없는 존재로 만드는 깊은 인내가 있다.
그것은 자연 그 자체의 인내와 친절을 닮은 조용하고 현명한 자제력이다.
자연은 묵묵히, 진지하게 풍요로 향한 긴 여정을 걸어간다.”
두 번의 참담한 실패 후 평론가로 살던 그 시절에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마 그 시간을 잠시라 생각하며 견뎠던 것 같다.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 하기 싫은 일을 하는 시간이라 여겼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는 그 시간 동안에도 계속 썼다. <복수는 나의 것>, <박쥐> 같은 작품은 그 당시에 탄생했다. 낮에 평론가로 방송을 한 뒤 밀려오는 허무함을 동력으로, 밤에는 시나리오 작업에 몰두했다고ㅡ 그의 책 <몽타주>에 그렇게 적었다.
그리고 그에게 JSA라는 기회가 왔다.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 하기 싫은 것을 하며 견디는 시간이 없었다면ㅡ 현실에 안주해 계속 쓰지 않았다면. 그의 인생은 다른 식으로 풀려나갔을 지도 모르겠다.
결국 이건 1번으로 다시 돌아간다. 써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4. 리더의 본질: 존경을 받는 자
존경은 결국 존중에서 온다.
류승완 감독은 박찬욱을 '선비'라 표현했다. 여러 배우들이 한목소리로 말한다. "화 한 번을 내지 않는 감독이다." 어떻게? 왜?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동시에,
위의 로댕에 대한 릴케의 묘사가 겹쳤다. 그리고 2번도 맞물려 생각이 났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 창작의 본질을 기반에 둔 예술가로서 살고 있는 그는. 그렇게 살기를 택한 그는. 천천히 인내하고 성실히 견디며 풍요로 향한 긴 여정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는 진정한 의미로서의 예술가로, 내 눈에는 보였다. 그런 그의 인생은ㅡ (감히 추측하건대)ㅡ 얼마나 충만할까?
그렇지만 이것만으로 '화 한번 내지 않는 선비'가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내가 겪어온 수많은 리더들을 떠올려 봐도, 짧고 얇게나마 내가 직접 겪은 리더십의 경험으로 미뤄 봐도ㅡ 권력을 가진 자가 다른 사람을 이끌어야 하는 위치에 서서 짜증이나 화를 내지 않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화를 내지 않는다. 초기 작품을 할 때, 화를 크게 내려하는 와중에 한 선배가 해준 조언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감독이 촬영장에서 화를 내면, 스태프들이 가진 감독에 대한 존경심이 사라져"
두고두고 곱씹어봐야 할 말이다. 존경은 결국 존중에서 온다. 내가 상대를 존중하지 않으면, 그가 나를 존경할 수 없다. 나이나 연륜에 의해 싫든 좋든 권력을 부여받게 되는 나라는 인간이 다시 한번 되새겨야 하는 말이다.
5. 이야기의 본질:
보편적 메시지 + 새롭게 + 재밌게
이건 감독의 인용은 아니지만, 두 시간짜리 다큐멘터리를 본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이다. 세계적 거장으로 불리는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얻은 힌트 같은 거랄까.
결국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가 닿으려면 재밌어야 하고, 그러려면 새로워야 하며, 동시에 보편적인 가치를 품고 있어야 하는 것 같다.
박찬욱 감독이 스토리를 만들 때 자주 하는 말이 있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천 년 전에도 있을 법한 이야기인가? 시대가 달라져도, 사람이 달라져도 통용되는 메시지인가?"
당연한 것 같으면서도 어려운 이 본질을ㅡ 나도 유념하면서, 끝끝내 글을 써 나가야겠다고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