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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과 비상계엄령, 그리고 다수의 상식에 대하여

다수가 가지는 힘

by 옹봉
#1 - 다수의 비상식, 그리고 미투 운동

입사를 영업 사업부로 했다. 대부분이 남자 직원이었고, 영업 팀장님들 또한 모두 남자였다. 팀에 일반직 여자는 나밖에 없었다. 그것이 당시의 상식이었다.


온갖 성희롱이 범람했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처음 사회에 발 디딘 나로서는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조차 판단하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다수의 언어와 행동은, 소수의 불편함과 관계없이 마치 상식처럼 흘러갔다. 나 말고는 누구도 불편해하지 않았으므로, 나 혼자서는 불편함을 말할 용기가 없었다. 묵히고, 삭혔다. 때로는 울화통이 터졌으나, 조용히 눈물로 씻어낼 뿐이었다. 남자뿐 아니라 여자 직원들까지ㅡ남녀 할 것 없이 상식처럼 뱉어대는 부적절한 언행 속에, 다들 즐겁게 웃고 떠들었다. 그러한 다수가 만들어내는 분위기 안에서, 그것이 문제라는 점을 인지시키는 것ㅡ 그러니까 밑바닥부터 깨부술 용기가 없었다. 내 잘못이 아니라고. 다수가 틀린 세상도 있다고, 비뚤어진 상식도 있는 거라고 말해주는 어른 또한 없었기 때문에. 나만 불편하고 다수는 허용하는 언어, 행동, 상황이ㅡ잘못이 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 확신이 없었다. 긴가민가했다.


미투 운동이 터졌다.


전세는 역전되었다. 누군가의 용기 하나로 인해, 그 불씨로 인해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 판국이, 정세가 뒤집혔다. 문화가 생겨났다.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팀장님들은 이후로, 같은 수준의 농담을 하더라도 스스로 그것이 문제임을 바로 알아챘다. 이제는 그들이 소수가 되었으므로. 불편해하는 다수의 존재 자체만으로, 부적절한 언행 뒤에는 곧바로 묘한 기류가 따라왔다. 그러면 그는 곧바로 사과했다. "아이 미안 미안, 나 미투 끌려가는 거 아니지?"


그것이 내가 살면서 처음 느낀, 다수의 힘이었다.


#2 다수의 상식, 비상계엄령 해제

한 나라의 수장이, 국민이 투표로 만들어낸 대통령이, 개인의 절박함에서 비롯된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개인의 안위에 의해 군사력을 동원하여 국가를 비상사태로 만들어버렸다. 상식적으로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 버렸다.


비상계엄 선포 이후, 역시나 국민의 손으로 선출한 국회의원들이 즉각 한 자리에 모여 비상계엄을 해제했다. 선포된 지 2시간 30여분 후였고, 외신들도 놀란 대단히 빠른 속도이다. 민주주의에 반하는 비상식적인 일이 발생했으나, 상식적인 다수의 사람들로 인해 그것이 비상식이라는 것이 빠르게 받아들여졌고, 다시 상식의 균형이 맞춰졌다.


12월 3일과 4일에 걸쳐, 나는 다수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 한번 똑똑히 느꼈다. 그리고 12월 7일 오늘, 특검법은 다수에 의해 부결되었고, 탄핵안은 다수가 참석하지 않아 부결되었다.


#3 1987, 진실을 좇는 소수의 사람들

영화 1987을 봤다. 다수의 부정 세력과 진실을 좇는 소수의 사람들. 비상식이 다수였던 세상에서, 상식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은 얼마나 외로웠을지, 얼마나 억울했을지, 얼마나 무력했을지ㅡ 상상도 가지 않는 현실에 눈물이 쏟아졌다.


2015년 나의 신입 시절이 생각났다. 다수의 부정 가운데 한 명의 소수자로서는 도저히ㅡ 상식과 비상식을 논할 수조차 없던 그 분위기를 기억한다.


비상식이 문화로 자리 잡은 세상에서, 소수의 상식은 도저히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판국에서, 끝까지 용기를 내고 목숨을 걸고 싸워 투쟁하는 이들의 감히 헤아릴 수 없는 그 마음을 깊이 새긴다.






그리고 생각한다.

상식에 힘을 보태기로.

상식이 다수가 될 수 있게, 힘을 가질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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