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의 노력과 최고의 투자를 하는 인생 최(선/악)의 선택
“남편 복이 있는데, 이혼수가 있네.”
선생님의 말 한마디에도 희로애락이 오고 가던 청소년기, 왠지 나를 편애하던 도덕선생님이 내 손금을 보고 한 말이다. 그 이전의 친구들에게는 무병장수, 꽉쥔금이라 엄청 성공한다는 둥의 칭찬을 해주더니, 내게는 왜 그런 말을 남겼을까? 남편 복이 있는데, 이혼 수가 있을 수 있나? 그보다, 이혼이라니, 내 미래는 그럼 결혼이 반드시 전제되는 거겠네? 어이없게도 나는 청소년기에 내 미래의 결혼과 함께 이혼까지도 예상했다.
그래서 그런지 남들은 나쁜 남자도 만나보고, 여러 연애를 경험해보던데, 나는 오로지 내게 올인하는 착한 남자를 만났다. 이 사람과 결혼하지 않으면 누구와 결혼하겠어? 라는 생각이 들 때쯤 그는 청혼했고, 그로부터 몇 년 뒤 결혼했다.
결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도 평탄했다. 집안의 반대라면 고작 내가 좀 더 늦게 결혼했으면 좋겠다는 엄마의 한탄 섞인 희망사항이 있을 뿐이었고, 시댁은 예비며느리를 아주 정성스럽게 대해주셨다. 그 즈음 엄마의 손에 이끌려 간 점집에서도 둘의 궁합이 매우 좋다며 결혼시켜야만 한다고, 남자가 여자를 많이 사랑해줄 거라고 했다.
그러니까, 굳이 정리할 필요도 없지만, 한마디로 결혼은 내게 복이라는 얘기였다. 실제로 결혼해보니까 그랬다. 불안정한 내 상황을 가뿐하게 눌러주는 안정감. 누군가로부터 계속해서 관심을 받는 그런 충족감.
그런데 자꾸만 의문이 드는 거다. 결혼이 복이라는 게,
우리 나라에서 여자에게 가능한 얘긴가?
구(舊)기혼 현(現)이혼의 타이틀을 단 엄마는 차라리 할 거면 빨리 하는 게 나았다는 얘기를 했다. 결혼이? 아니, 이혼이. 그만큼 과정보다 결과가 중요한 게 결혼이다. 삼십 년 남짓 지켜본 엄마의 결혼생활은 그야말로 이상했다. 마찬가지로 이혼 역시도 이상했다.
“끝이네. 이렇게 쉬울 줄 알았으면 빨리 해서 너희나 한부모 혜택 받게 할 걸 그랬다.”
지극히 실리적인 경제론이라니. 감정적인 위로를 위해 대기하고 있던 내가 민망해질 정도의 소회였다. 길고 긴 결혼생활을 돌이켰을 때 남는 게 ‘좀 더 빨리 할 걸’ 하는 후회였다. 결혼이 복은커녕 흉이었던 사람이 할 수 있는 얘기였다. 딸은 엄마와 비슷한 인생길을 걷는다는데 내게도 이혼이 찾아오게 되는 날이 있을까? 선생님의 한 마디 덕에 결혼생활의 시작과 함께 끝을 늘 생각하게 됐듯이, 엄마의 소회에 결혼이 어떻게 이상해지나 고민하고 있다.
대부분 결혼은 좋은 사람과 한다. 종종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는 질문에는 좋은 사람이라고 답한다. 좋은 사람. 그 말에는 많은 것이 함의되어 있다. 인간성이 좋은 사람, 조건이 좋은 사람 등등 여러 의미의 ‘나에게 좋은 사람’이겠지. 하지만 중요한 건 무엇이 좋은 사람인지가 아니다. 나에게 좋은 사람은 높은 확률로 다른 이에게도 좋은 사람일 경우가 많다. 내게 잘하는 사람은 높은 비율로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잘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좋은 연인, 좋은 남편일 수도 있지만, 마찬가지로 좋은 친구, 좋은 아들, 좋은 딸일 확률이 높다는 얘기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대부분의 결혼은 좋은 사람과 한다. 우리가 결혼하는 사람은 좋은 아들, 딸일 경우가 많다. 어떠한 문제상황에서 그 사람이 좋은 아들이나 딸의 위치를 선택할 지, 좋은 남편이나 아내의 위치를 선택할 지는 그 상황이 와봐야 안다. 백 번의 시뮬레이션도 한 번의 실제 상황보다 명확할 수는 없다.
여기서 문제는 당사자, 즉 나 자신도 좋은 사람이라는 점이다. 나쁜(적어도 욕망에 충실한) 사람일 경우에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렇게 해달라, 저렇게 해달라 요구사항을 제시했었을 텐데, 상대방의 암묵적인 요구를 눈치 빠르게 알아채고 그에 맞게 살아내느라 고생한 나머지 자신의 요구도 어련히 알아줬으리라 믿는다. 하지만 우리 주변의 좋은 사람들이 늘 그렇듯, 좋은 사람은 자신의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기보다 자연스레 갈무리하는 데 도가 터있다.
종종 엄마의 소회를 돌이켜보면 아빠는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었기에 좋은 남편일 때도 있었고, 좋은 아빠일 때도 있었지만, 주로 좋은 아들을 택했던 사람이었다. 물론 엄마도 좋은 며느리로 노력했지만 매번 좋은 아들을 선택하는, 상대적으로 덜 좋은 남자와 사는 건 서운했다. 서로에게 좋은 사람이면 충분했던 연애가 서로의 가족에게까지 좋은 사람이어야 되면서 결혼의 비극이 온다. 그게 충돌하게 될 때 내 남편은 과연 어떤 역할을 택할까? 아내의 입장에서야 당연히 좋은 남편을 선택해주면 좋은 일이지만, 그로 인해 좋은 사람의 자리에서 박탈당할 나는 또 어떤 포지션을 취해야 할까?
나의 결혼은 타인이 봤을 때 일견 복일 거다. 나는 이른바 좋은 사람이고, 그로 인해 평안하고도 평범한 생활, 사랑 받는 아내, 예쁨 받는 며느리로서의 역할이 적합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안의 나는 그 복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결혼생활이 행복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내가 치열하게 버텨낸 기억들로 가득한, 지긋지긋하면서도 뿌듯했던 생활이 불행으로 치부되어버리는 것 같기 때문이다.
이 같은 자의식은 나의 결혼생활을 자랑할 수도, 자랑하지 않을 수도 없게 만드는 딜레마가 된다. 이런 딜레마 덕에 어느 누가 결혼해서 행복하냐고 물었을 때 망설여진다. 결혼을 추천하냐는 질문에도 역시나.
꽤나 오래 자립적이고 독립적으로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나는 아직까지 누군가와 가까운 거리를 설정하는 데 어려움을 먹는다. 종종 친구들에게도 하는 얘기지만, 나는 남자(사람)친구들에게 정서적 공감을 바라본적이 없다. 그들은 원치 않는 조언을 하길 좋아하고 원치 않는 농담으로 내 고민을 승화시키기 일쑤며, 나를 스테레오 타입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생의 동반자로 선택한 남편에게는 은근한 정서적 공감을 바랄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남편에게 내 결혼생활이 행복해서 고맙다고 얘기한다.
내가 느끼는 딜레마는 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미묘한 감정선이다. 굳이 따지면 그는 한 팀에서 다른 팀으로 이적한 케이스고, 나는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 뒤늦게 팀으로 입단한 케이스랄까.
이 괴리감.
결혼이라 함은 많은 주례사에서 등장하듯이 서로가 같은 곳을 바라보아야 한다는데 가끔은 외롭고, 때로는 섭섭하고, 종종 서러운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역설적이게도 서로가 손을 잡고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이 멋쩍고도 난해한 감정은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비롯된 것일까.
결혼...해도 될까요?
(Y/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