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여행과 나날(2025)> 리뷰
<여행과 나날>, 평범해 보이지만 언뜻 보면 기묘한 구석이 있는 제목이다.
우선 사람들을 설레게 하는 단어인 '여행'과, 설렘과는 다소 거리가 먼 듯도 한 '나날'이 자리하는 구성이 그렇고, 그 둘을 연결하는 조사가 '과'라는 점 역시 그러하다. 주제가 여행이라면 여행'의' 나날이라고 하면 됐을텐데, 굳이 그러지 않은 데에는 두 단어와 개념을 구태여 분리하겠다는 미야케 쇼 감독의 의도가 자리하고 있을 것이리라.
다소 늦게 들어간 영화관. 스크린에서는 이미 각본가 '이(李, 심은경)'가 노트에 연필로 꾹꾹 글씨를 눌러가며 영화 첫 장면 구상에 한창이다. 그리고 외딴 바다 마을에 잠시 놀러 온 소년, 그리고 소녀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멈춰있던 차에서 단잠을 깬 한 소녀. 그녀는 파란 셔츠, 하얀 꽃이 그려진 검은 치마를 바람에 나부끼며 조용한 동네, 초록 빛깔 숲, 작은 박물관, 어두운 터널을 지나 푸르른 바다에 다다르고, 그곳에서 한 소년과 마주친다. 마치 서로가 올 것을 예감하기라도 했던 것처럼 스스럼없이 인사를 건네고, 대화를 시작하는 그들.
바람을 피운 연인에 의한 상실감을 견디는 중인 듯한 소녀, 좀체 풀리지 않는 일상에서 도망쳐 온 소년은 별 감정 없이 실없는 문답을 이어간다. 간식을 먹으면서도, 수영을 하면서도 계속되는 그들의 대화. 그곳이라서인지, 두 사람이 만났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둘은 모처럼 현실에서 벗어나 목적 없이도 이어지는 대화, 기대 없이도 계속되는 관계 속에서 서서히 잊고 있던 생의 감각을 회복한다.
...라는 스토리의 짧은 영상이 막을 내린 어느 대학교의 강의실 안. 이곳에서 주인공 '이'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필자가 간략하게 풀어놓은 소년과 소녀의 이야기를 독자분들께서 어떻게 보셨을지는 모르지만, 그걸 만든 '이' 본인은 스스로의 스토리 메이킹 능력에 전혀 자신이 없는 모습이다. 도망치듯 일본에 온 이후 말에 쫓기는 듯 사는 일상에 지쳐있었던 그녀는 자신의 창작물, 그리고 그녀 자신에게 쏟아지는 학생들의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한 채 마치 도망치듯, 눈이 소복이 내리는 외딴 설원으로 훌쩍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미처 숙소를 구하지 못했기에, 어쩔 수 없이 저 멀리 산 너머 외딴 여관으로 향하게 되는 '이'.
밤늦게 겨우 여관에 도착한 '이'는 다소 퉁명스럽고 무뚝뚝한 인상의 여관 주인(츠츠미 신이치)과 독대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작가이며, 아직 스타일을 못 찾았다고 털어놓는다. 그런 그녀에게 여관 주인은 무심하게 "각본은 인간의 슬픔을 얼마나 담아내느냐가 중요하다"라는 조언을 해준다.
자 우선 여기까지. 여행을 떠나 우연히 멘토와 마주하며 깨달음과 지혜를 얻고 힐링하는, 이른 바 클리셰적인 구성에 가깝다고 느껴질 법도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미야케 쇼 감독은 관객의 생각대로 영화가 흘러가게끔 놔두지 않았다.
다음 날, '이'는 본격적으로 그녀를 괴롭히고 힘들게 했던 '말'과의 거리 두기를 시작한다. 스승의 유품인 카메라로 풍경과 물고기를 담고, 뽀득거리는 눈을 만지며. 시끄럽던 전철 소음 대신 잔잔한 물소리와 바람 소리로, 여관 주인의 정겨운 톱질 소리로 귀와 마음을 가득 채운다. 그리고 미소 짓는다.
그럼에도 각본 작업은 잘 풀리지 않지만, 그 한 줌의 미소에 관객들은 지금껏 꼬여온 실타래가 서서히 풀리고 있음을, 그리고 '이'를 연기하고 있는 배우가 다른 누구도 아닌 '심은경'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배우가 러닝 타임 내내 감춰왔던 본인 최고의 무기를 꺼내들며 파괴적인 위력을 발휘하는, 아주 보기 드문 순간이다.
사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이 장면 이후에도 한참 동안 필자의 눈에는 '배우 심은경'이 아닌 '아역 배우 심은경'이 보였음을 고백한다. 다소 어울리지 않는 캐릭터를 입고, 서툰 일본어로 기존의 이미지를 감추고, 또 부정하려 애쓰는 그녀의 모습은 사뭇 어색하고, 때로 안쓰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필자에게 심은경은 <광해>에서의 시녀 '사월이'같은, 쾌활하고 밝은 이미지의 캐릭터에 지나지 않았다. 많은 분들이 <써니>의 '나미' 혹은 <수상한 그녀>의 '오두리'로 그녀를 기억하고 계시듯 말이다. 마치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아놀드 슈워제네거 같았다고 하면 좀 너무한 비유일지는 모르지만, 그 정도로 필자에게 그녀는 상당히 전형적이고, 한정된 연기 폭을 가진 배우였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도 그런 모습을 예상했는데, 그렇지 않았기에 이상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하지만 영화의 말미에 가까워질수록 그런 그녀의 모습을 조금씩 응원하게 되는 나 자신이 보였다. 번데기를 뚫고 성체가 되려 애쓰는 유충을 보면 '힘내라!'라는 생각이 드는 것처럼, '심은경'이라는 캐릭터를 깨고 진짜 자신의 존재를 찾고자 노력하는 한 배우, 그리고 한 사람이 보였던 탓이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지금껏 알아왔던 '심은경'은 정말 본인이 맞을까?
그동안의 밝은 이미지 역시 타의적으로 씌워진 것은 아닐까?
몇 년 전, 그녀가 혈혈단신으로 일본 영화계로 떠났던 이유 역시 그런 '말', 그러니까 타인들이 세워놓은 '심은경'이라는 정의에서 탈피하고 싶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싶다. 어린 시절부터 아역 배우로 활동하며 굳어진 이미지를 한국에서의 활동만으로는 깰 수 없다 판단했던 것이리라. 그러니 '말에서 도망치고 싶다'라는, '고향을 떠난 순간부터 계속 여행 중인 느낌이다'라는 이의 대사에 진정성이 실릴 수밖에. (미야케 쇼 감독에게 심은경이라는 배우가 얼마나 좋은 주인공이자 소재였을지!)
이 영화를 통해 심은경이 증명한 것은 두 가지다. 혼자 여행을 떠나야 하는 이유, 그리고 떠나야만 했던 이유.
우선 필자의 경우 주인공 '이'를 통해 '혼자 떠나는 여행'의 가치에 대해 다시금 확인하고, 또 재정의할 수 있었다. 다소 우연에 기댄 부분도 있지만, 스스로에 대한 회의감과 압박감을 피해 홀로 도망치듯 떠난 예술인이 영감을 회복하고, 일상으로 돌아갈 원동력을 얻는 과정이 꽤나 주체적이고, 설득력 있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그동안 삶 속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구체화해 '영감'이라는 형태로 만들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내면을 비워내는 과정이 필요하며, 그런 환경을 만들기에 가장 좋은 수단은 결국 혼자 떠나는 여행이라는 이야기인 셈인데, 필자 역시 비슷한 경험을 한 입장에서 공감되는 부분도 많았고, 또 새롭게 알게 된 부분도 있어 좋았다.
덕분에 심은경 본인에게도 이번 <여행과 나날>이 필모그래피 상에서 굉장히 의미 있는 작품으로 자리매김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우선 최근 일본 최고 권위의 영화 매거진 '키네마 준보'가 선정한 '제 99회 키네마 준보 베스트 10' 시상식에서 <여행과 나날>이 1위 작품에, 그녀 자신 또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그야말로 기염을 토하는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녀를 뿌듯하게 만드는 것은 이 영화를 기점으로 그녀가 10년 전 <널 기다리며(2016)>를 시작으로 시도했던 이미지 변신이 대중들에게도 본격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는 데에서 오는 뿌듯함이 아닐런지. 영화 <신문기자(2019)>를 시작으로 무려 7년,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일본으로 호젓이 떠나 묵묵히 연기 생활을 지속해 온 심은경의 나날들 역시 이제야 빛을 발하기 시작한 느낌이다.
일상과의 건강한 거리 두기에 성공한 캐릭터, 그리고 배우. 이들을 통해 미야케 쇼 감독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어쩌면 이런 것은 아니었을까.
일상이 여행보다 중요한 것은 맞지만,
여행 없이 지속되는 일상은 없다는 것.
제목을 통해 '과'라는 단어로 여행과 나날을 묶은 것 역시 두 개념을 단순히 분리하려는 의도에서가 아닌, 상호보완적인 역할로서 동등한 무게를 갖도록 만들고 싶었던 건 아닐지. 자동차도 핵심 부품인 엔진이 잘 기능하기 위해서는 오일로 윤활을 하는 것이 필수인 것처럼, 건강한 삶과 나날을 위해서는 여행의 역할 역시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거창하진 않을지언정, 잠시 일상과 거리를 두고 보다 건강한 삶을 영위하려는 행위는 어떤 것이든 가치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물론 '이'와 같은 직업 예술가들에게 더 와닿을 법한 형태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전형적인 힐링 영화를 기대하는 분들께는 실망감을 안겨드릴 가능성도 없진 않아 보인다. 하지만 도심의 삶에 지쳐 훌쩍 어딘가 떠나고 싶은 분들, 뭐가 잘못된 지는 모르겠는데 인생이 꽉 막힌 것처럼 느껴지는 분들께는 기대 이상으로 좋은 영화가 될 거라고도 생각한다. '혼자서 여행을 떠나며 하게 되는 환기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은 생각보다 많지 않으니 말이다.
영화가 끝난 이후에도 '이', 그리고 배우 심은경의 여행과 나날은 계속될 것이다. '아역 배우 심은경'이 아닌 '배우 심은경'의 밝은 미래를, 그리고 평범한 나날들을 열심히 살아내고 있는 수많은 '이'들에게 멋진 턴어라운드를 선물할 여행이 가득하길 기원하고, 또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