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의 담금질 끝에 이룬 극적인 이미지 전환
그야말로 금의환향, 기염을 토하는 행보다. 배우 심은경이 지난 1월, 영화 <여행과 나날(2025)>로 일본 영화계 최고 권위 시상식 중 하나인 ‘키네마 준보 베스트 10’에서 최고 작품상은 물론, 한국인 최초 여우주연상까지 거머쥔 것이다.
그런데 그녀를 감싼 분위기, 그리고 스타일이 사뭇 달라졌다. <써니>, <수상한 그녀>에서의 깜찍한 소녀는 간데없고, 전혀 딴판인 시크하고, 염세적인 인상의 톰보이*가 한 명 서 있다. 너무나도 극적인, 생각지도 못했던 이미지 체인지가 어색하기도 하지만, 어딘지 달관한 모습에서 편안함이 읽히는 듯도 하다. 대체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이런 변화를 가능케 만들었을까. 이제는 무려 24년 차 배우, 심은경의 필모그래피를 따라가며 그녀의 캐릭터 및 스타일 변화 과정을 짚어본다.
*톰보이(Tomboy): 남자의 성역할을 하는 여성이나 중성적인 매력을 띠는 여자를 가리키는 용어.
‘혜성 같은 등장’만큼 심은경에게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 또 있을까. 2003년 드라마 <대장금>으로 데뷔한 그녀는 이후 드라마 <안녕, 프란체스카>, <황진이>, <태왕사신기> 등으로 탄탄한 아역 배우 경력을 쌓았다. 전설적인 ‘헥토파스칼 킥’으로 유명한 <단팥빵>도 빠지면 섭하다.
그리고 2011년, 첫 주연작이었던 영화 <써니>로 830만 흥행 홈런을 친 그녀는 이후 <광해(2012)>에서 시녀 ‘사월이’ 역할로 일찍이 천만 배우 대열에 합류한다. 여기에 대선배 나문희와의 투 톱 주연작인 <수상한 그녀(2014)>마저 히트시키며 백상예술대상 최우수 연기상을 수상, 국내 영화계의 떠오르는 신성으로 자리매김한다.
그러나 이른 성공은 그녀에게 은퇴를 고민케 할 정도로 깊은 슬럼프가 되어 돌아왔다. 갑작스레 쏟아진 사랑과 칭찬의 무게를 감내할 수가 없었던 것. 설상가상 그녀 최고의 무기였던 ‘밝은 캐릭터’ 역시 한계에 봉착하고야 만다. 흥행과 평가 모두 참혹했던 드라마 <내일도 칸타빌레(2014)>를 시작으로 첫 독립영화 <걷기왕(2016)>, 심지어 최민식과 함께했던 <특별 시민(2017)>마저도 그랬다. 2018년에는 영화 <염력>, <궁합>이 연달아 고배를 마시기도 했다.
하지만 심은경은 다양한 작품 속에서 큰 폭의 이미지 변화를 시도하며 이 시기를 버텨냈다. 2016년 <널 기다리며>에서는 아버지를 살해한 범인을 쫓는 딸 ‘희주’를, 2017년 <조작된 도시>에서는 히키코모리 천재 해커 ‘윤여울’을 연기하며.
새로운 돌파구를 발견했던 것일까. 2017년 갑작스레 일본 진출을 선언한 그녀는 2019년, 일본 첫 작품이자 주연 영화 <신문기자>를 통해 진중한 캐릭터와 스타일을 시도한다. 이 작품을 기준으로 가장 최근의 <여행과 나날>까지, 그녀의 필모그래피는 전보다 일반적인 성격에 웃음기가 빠진 캐릭터들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물론 기존의 자신을 다시금 끄집어냈던 <블루 아워>같은 영화도 있었다. 하지만 ‘극단적인 캐릭터 + 심은경의 밝은 이미지’ 조합으로 시너지를 내고자 했던 이전과는 다른 성격의 작품들과 만났던 것이, 무엇보다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스타일을 재정립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됐을 것으로 보인다. 최근 도드라진 특유의 ‘톰보이 스타일’도 사실은 있는 그대로의 본인을 활용하기 시작하며 만들어진 셈.
그리고 지난해 8월,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수트를 입고 등장한 그녀는 한 달 뒤인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연이어 ‘여배우 = 드레스’ 공식을 깨며 보란듯이 자신의 새로운 아이덴티티를 선보였다. 기존에도 화보를 통해 보이시한 매력을 여러 차례 발산한 바 있으나, 공식 석상에서의 어필은 처음인 만큼 그녀가 일본 활동 가운데 스스로의 젠더리스한 스타일적 강점에 눈 떴음이 읽히는 대목이다. 여성과 남성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겠다는 포부, 허술함이 비집고 들 틈을 주지 않겠다는 의연함이 시크한 표정, 레이어드 헤어, 품이 넉넉한 오버사이즈 제품을 적극 활용한 착장 모두에서 느껴진다. 심지어 이제는 예술가로서의 카리스마마저 풍긴다.
그동안 강렬한 인상을 남긴 배우는 많았지만, 그들 대부분이 고착화된 스스로의 이미지를 깨지 못한 채 스러졌다. 일부는 엇나가기도 했다. 하지만 심은경은 살아남았고, 다시금 용기를 내 우리 앞에 서 있다. 10여 년의 ‘담금질’ 끝에 단호해졌고, 무뚝뚝해졌고, 차가워졌지만, 그 모습이 썩 보기 좋다. 매체로부터 부여된 것이 아닌 자신만의 언어로 대중과 소통하겠다는 단호함, 그리고 이제는 자신이 웃을 장소를 스스로 선택하겠다 말하는 듯한 당당함에 뿌듯함마저 생긴다. 스크린 속 그녀와 함께 같은 시대를 살아온 한 사람으로서의 소감이다.
앞으로 배우 이상의 ‘뮤즈’로서, 우리에게 한층 깊은 영감을 선사할 그녀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