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네가 기댈 자리를 비워 둘게
8.
“나, 이제 곧 출발해. 너 나와 있을 거지? 늦지 마.”
딸깍, 동전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진하의 목소리도 끊겼다. 넉 달 동안의 공백을 깨는 말투가 화영을 안심시켰다. 하얀 입김이 사정없이 피어오르는 날, 화영은 집 근처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열렸다 닫혔다 하는 버스 문을 바라보며 벤치에 앉았다. 추위에 두 다리를 달달 떨면서도 가슴은 핫팩을 붙인 것처럼 따뜻했다. 슬며시 올라간 입꼬리를 겨우 내리고 화영은 생각했다. 최근 들어 가장 행복한 시간이라고. 30분, 1시간을 더 기다려도 괜찮다고.
부-웅- 진하가 탄다고 한 버스가 속절없이 지나갔다. 그것도 벌써 두 대째. 화영은 손목에 찬 시계를 보고 또 봤다. ‘왜 이렇게 늦지? 혹시 잘못 탔나… 다음 버스에서는 내리겠지.’ 버스 문이 열릴 때마다 울렁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쏟아져 나오는 얼굴을 샅샅이 훑었다. 화영이 고개를 쭉 내밀고 한참을 두리번거리자 뒤에서 '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진하였다.
“어, 너 43번 버스 타고 온다고 했잖아. 아니야?”
“탔지, 탔는데 모르고 한 정거장 전에 내려서 뛰어왔어. 헉헉헉.”
진하는 숨을 헐떡이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빨갛게 달아오른 두 볼에 찬바람이 부딪혔다. 주근깨 색이 조금 더 진해진 것 말곤 모든 게 다 그대로였다. 눈썹을 찌르는 앞머리도, 머리카락을 겨우 붙들고 있는 까만 고무줄도, 양념 자국이 베인 하얀 운동화도.
숨을 몰아쉬던 진하가 얼굴을 들었다. 눈빛이 말했다. 이제 괜찮다고. 뭐든 말해도 내가 다 들어주겠다고. 언제나 그랬듯 진하가 화영의 오른편에 서서 팔짱을 끼었다. 화영의 꽁꽁 언 두 손이 이제야 마음을 놓고 주머니를 찾아갔다. 둘은 화영의 집으로 향했다. 식탁도 소파도 없는 텅 빈 집, 커다란 이민 가방만이 진하를 반겼다.
“엄마가 너 온다고 하니까, 집에서 편하게 놀라고 나갔어.”
“아, 그래? 아줌마 계셔도 난 괜찮은데.”
“뭐 먹을래? 귤이랑 라면밖에 없긴 하지만.”
“그럼 라면 먹자. 나 라면 안 먹은 지 꽤 됐어. 할머니가 요즘 잔치 국수에 꽂혀서 그것만 먹는다니까.”
진하는 쉬지 않고 시장에서 벌어진 일을 생중계했다. 라면을 끓이는 내내 화영의 머릿속에서 재생 버튼이 눌러졌다. 주방에 퍼진 라면 냄새처럼 화영의 마음도 따뜻한 풍경으로 들어찼다. 라면 한 그릇을 싹 비운 진하는 손톱이 노래질 때까지 귤을 까먹었다. 진하는 화영에게 그 어떤 것도 묻지 않았다. 아빠라고 부를 뻔한 아저씨의 존재도. 터질 듯한 가방의 정체도. 그저 예전처럼 화영이 웃어줄 만한 이야기만 골라 입술을 움직였다.
“참, 너랑 들으려고 챙겨 왔는데.”
진하는 가방을 열어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를 꺼냈다. ‘철커덕’ 테이프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화영은 벽에 기대 두 손으로 무릎을 감쌌다.
이별이란 말은 없는 거야 이 좁은 하늘 아래
안녕이란 말은 없는 거야 이 세상 떠나기 전에
이별과 안녕이란 단어가 드럼 소리를 뚫고 화영의 마음을 흔들었다. 화영은 무릎 사이에 턱을 댄 채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때 어깨와 어깨가 슬며시 닿았다. 둘은 음악이 끝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화영은 진하의 목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늘 네가 기댈 자리 비워 둘게. 언제든 이렇게 내 어깨에 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