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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는이모 Nov 01. 2024

그리고 떠나는 것

사는 건 자기 집을 찾는 여정

9.           


단 하나의 순간으로 일렁이는 온전한 날, 화영은 진하의 어깨에 가만히 기댔다. 반 뼘도 채 안 되는 어깨가 화영은 아늑하기만 했다. 진하의 어깨는 분명 몇 달 새 자라 있었다. 호박전과 나물 무침, 잔치국수를 먹어서 그런 걸까.


편지를 꼭 보내라며 곧 다시 만나자며 진하는 몇 번이고 뒤를 돌아봤다. 총총 걸어가는 진하의 뒷모습을 보며 화영은 생각했다. 키도 가슴도 자신보다 자그마한 아이가 우주만큼 드넓은 품을 가졌다고. 잠시 빌린 어깨 덕분에 하늘을 볼 수가 있겠다고. 다가오는 봄도 이제는 두렵지 않다고.


버서석 소리가 날 정도로 낙엽 같은 얼굴을 한 엄마는 차근차근 이별의 잔해를 수습했다. 절차는 간단했다. 팔 수 있는 건 뭐든 팔고 가벼워지는 것. 더 이상 억울하다고 말하지 않는 것. 그리고 떠나는 것.      


누군가 말했다. 사는 건 자기 집을 찾는 여정이라고.


진하를 만나고 일주일 뒤 화영은 엄마와 함께 버스에 올라탔다.  잊기 위해, 잊히기 위해 다시 살기 위해 떠났다. 화영과 엄마는 자기 몸집만 한 가방을 들고 버스와 기차를 갈아탔다. 


새로운 집을 찾기 위한  여정은 야멸찬 2월의 공기를 뚫고 계속 됐다. 이모집에서  외삼촌집으로, 그리고  다시 이모집으로. 거주지를 옮기는  피로감이 화영의 한쪽 볼에 핀 마른버짐을 손등에도 퍼트렸다. 3월을 한 주 앞두고 엄마와 화영은 다시 커다란 가방을 나눠 들고 기차역으로 갔다.


엄마가 매표소에서 마산행 티켓 2장을 사는 사이 화영은 능숙하게 화장실 위치를 봐두고 가장 여유로운 벤치를 찾아 가방을 올려뒀다. 두리번거리는 엄마를 향해 화영은 손을 흔들었다.


"엄마랑 같이 여행가나 보네."


이런 걸 여행이라 한다면, 화영은 오늘이 마지막 여행이길 바랐다. 당분간 아주 당분간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다고.

편지 봉투 위 보내는 사람에 덩그러니 이름만 적는 대신

주소를 빼곡히 채우고 싶었다. 안전하게 답장을 받을 수 있는 주소지, 화영은 그거면 됐었다.


하얀 김이 서린 열차 안 창문에 손가락으로 하트를 그리던 화영은 문득 궁금했다.      


‘엄마가 한 게 사랑일까?’

    

물음에 대한 답이 YES든, NO든 속상했다. 사랑한 대가로 집을 잃는 것도, 사랑하지 않는 남자의 밥을 시도 때도 없이 차리는 것도 다 거지 같았기 때문이다.      


차라리 아빠를 만들어 주고 싶어서 엄마가 그런 선택을 한 거였음 했다. ‘아빠 따위는 필요 없다고, 예전도 지금도 내게는 없던 사람이라 아무렇지 않다고, 채워 줄 수 없는 건 그냥 포기해도 괜찮다고.’라고 말하면  엄마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질 테니까.                


창문에 그린 하트가 스르르 사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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