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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의대화 #2

아이는 한마디로 나를 살린다.

by 온오프

동생과 내가 오래전부터 우스갯소리로 주고받는 농담이 있다.

잠을 안 자면 그건 결국 빚으로 남는다는 것.

그리고 그 빚은

웬만한 사채보다 무서운 속도로 불어난다.

잠이 부족해질수록 사람은 퀭해지고

그 빚은 언젠가는 반드시 갚아야 했다.

몇 날 며칠 쌓아 둔 피로가 도저히 버티지 못할 만큼 되면

낮잠을 자러 가면서 동생은 내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언니야, 내 오늘 빚 갚는 날이다.

빚 갚으러 간다.”

그러곤 늘어지게 낮잠타임을 가지곤 했다.



그날의 나도 그랬다.

며칠간 매일 잠이 부족했고,

피로가 잔뜩 쌓여 있어서

온종일 비몽사몽한 상태였다.

해야 할 일들을 대충 처리하고 나니

이제는 집안일이 한가득 쌓여 있었고,

숨 돌릴 틈도 없이 어느새 하원 시간이 다가왔다.

결국 단 1분도 쉬지 못한 채

아이 셋을 데려와 먹이고, 씻기고 챙기고,

그 과정에서 나는 이미 진이 빠져 있었다.

장난감을 서랍에 정리하면서

나도 모르게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 힘들다.”

그 짧은 한숨을

5살 큰아이가 놓치지 않았다.

아이는 내 표정을 살피더니

작은 발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엄마 힘들어요? 엄마 아파요?”

나는 놀랐지만 태연한 척 답했다.

“응, 엄마 오늘은 좀 힘드네. 괜찮아.

아들 보니까 힘난다. 불끈불끈.”

그런데, 그 다음 순간.

아이가 마치 드라마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내 볼을 양손으로 감싸더니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엄마, 장난감 정리하지 마요.

아무것도 하지 마요.”

그리고 아주 진지하게, 결의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다 포기해요.”

푸, 실소가 나왔다.

포기… 하라고?

하지만 아이는 멈추지 않았다.

“엄마 다 포기해요.

내가 할게요.

내가 정리할게요.”

잠시 멍해졌다.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싶은 순간이었다.

어찌 너는 다섯 살임에도

나보다 더 대견할까.

철없는 엄마가 감추지 못한 투정을 내뱉었는데,

아이의 마음은

그걸 책임지려 하고 있었다.



세상은 나에게 늘 말했다.

포기하지 말라고.

엄마니까 견디고, 버티고, 해내야 한다고.

하지만 아이는 말했다.

“엄마, 다 포기해요.”

그 한마디가

내 어깨 위에 얹힌 모든 책임을 가볍게 풀어냈다.

나는 그날 알았다.

포기하지 않는 것이 강함이 아니라,

포기해도 된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게

진짜 힘이라는 것을.

어쩌면 어른과 아이의 차이는

책임의 무게가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아이의 한마디는

늘 이렇게 나를 살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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