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D

감정이 지나간 자리

by 온새미로

여기까지 왔다.

아주 조용히, 아주 천천히.

하나의 감정이 끝날 때마다,

나는 조금씩 무너지고,

조금씩 다시 일어섰다.


기쁨과 슬픔, 분노와 두려움,

외로움과 사랑, 질투와 그리움, 후회와 희망.

이름을 붙이고,

손끝으로 만지고,

조심스레 꺼내어 글 위에 눕히는 동안

나는 내 안의 수많은 얼굴들을 처음으로 마주쳤다.


감정은 늘 나를 아프게 했다.

때로는 나를 구원하기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남은 것은

무너진 것도, 치유된 것도 아닌,

그저 살아 있다는 감각이었다.


살아 있다는 것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느끼는 일이다.

아플 만큼 기쁘고,

설렘만큼 불안하고,

사랑만큼 외롭고,

그리움만큼 후회하며,

희망만큼 두려운.


그 모든 감정의 잔해를 품은 채

나는 오늘도 조용히 숨을 쉰다.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도, 거리를 두어도,

그들은 늘 다른 모양과 온도로

내 곁에 머문다.


나는 이제, 그 사실이 두렵지 않다.

내 안에 감정이 있다는 것은,

내가 여전히 누군가를 바라보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내일을 꿈꿀 수 있다는 뜻이니까.


그리고 그렇게,

나는 또다시

내가 모르는 어떤 감정의 이름을 배우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지나온 감정들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다.

그리고 앞으로 만나게 될 감정들이

나를 다시, 어디론가 이끌어 갈 것이다.


끝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감정의 여정은 끝나지 않는다.

이건 단지,

잠시 숨을 고르는 순간일 뿐이다.


지금,

조용히 눈을 감는다.

마음 한가운데,

작은 불빛 하나가

아직 꺼지지 않은 채

은은히 타오르고 있다.


나는 그 불빛을 따라

다시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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