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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주말 목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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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천고래 Dec 09. 2018

장수탕이 있었다

주말 목욕_서울특별시 마포구 <장수탕>


우리 동네에는…… 아주아주 오래된 목욕탕이 있다. 
큰 길가에 새로 생긴 스파랜드에는 불가마도 있고, 얼음방도 있고, 게임방도 있다는데……
엄마는 오늘도 장수탕이다.

_백희나 작 「장수탕 선녀님」 中


내가 너무나 좋아해 마지않는 동화 「장수탕 선녀님」의 첫 문장이다. 냉탕과 온탕이 하나씩 있고 연세 지긋한 어르신이 프런트를 지키고 있는, 울지 않고 때를 밀면 요구르트 하나를 얻어먹을 수 있었던 평범한 동네 목욕탕을 배경으로 작가는 재기 발랄한 상상력을 펼친다. 불가마와 얼음방과 게임방이 있는 스파랜드에서는 벌어질 수 없는 이야기를 말이다. 더 쓰면 스포일러가 될 테니, 목욕을 좋아하는 여러분이라면 꼭 읽어보길 바란다. 


오늘 소개할 건 책이 아니라 목욕탕이다. 동화 속 목욕탕과 이름이 똑같은 장수탕에 다녀왔다. 물론 이름만 같고 전혀 다른 장소긴 하다. 지도에 검색하면 전국의 장수탕은 약 서른 두 곳. 안타깝게도 지금 이곳은 세상에 없다. 지난 2018년 6월 12일을 끝으로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5월의 어느 날,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장수탕에서 몸을 담갔다. 


장수탕의 입구
2018년 5월 기준 요금표. 대인 6,000원으로 저렴한 편. 새벽 일찍 열어 밤에는 일찍 닫는다.


누가 봐도 이 동네 사람이 아님을 알아볼 수 있는 행색이었다. 한 손에는 캐리어를, 다른 손에는 스마트폰 지도를 들고 낯선 동네의 목욕탕을 찾았다. 장수탕은 의외로 번화가와 꽤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그러니까 CGV 신촌아트레온 건너편 골목에 있었다. 희한하게도 골목에 들어서자마자 전혀 다른 세상으로 온 것만 같았다. 목욕탕 간판을 물끄러미 쳐다보니, 어쩐지 더 그랬다.


아주머니가 홀로 프런트를 지키고 있었다. 요금을 내고 나니 앞에 놓인 수건 더미에서 필요한 만큼 수건을 가져가라고 일러주셨다. 나는 두 장을 망설임 없이 집었다. 주황색 수건에는 약간 색이 빠졌지만, 그래도 선명하게 보이는 글씨가 적혀있었다. '♨ 장수탕 사용 후 돌려주세요' 


여탕은 1.5층에 있었다. 프론트에서 딱 다섯계단만 오르면 여탕이라, 1층은 아니고 1.5층이라 하는게 맞지 않을까.
사물함과 달력과 허리 맛사지기(?)와 선풍기와, 너무나 평범한 풍경.
플라스틱 번호판이 떨어져서 숫자를 적어 둔 사물함.
동전을 넣고 쓰는 드라이어.
탈의실 전경


안으로 들어서자 제법 널찍한 탈의실이 나왔다. 이 정도 규모라면 전성기 때는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으리라는 짐작이 들었다. 여기저기 손때가 묻고 낡아서 고치지 않은 것들도 재미있었다. 매직으로 숫자를 크게 적은 사물함. 삐그덕 거리지만 제 나름대로 현역에서 뛰고 있는 너른 평상. 탈탈탈탈 소리를 내며 세상 시끄럽게 마사지를 해주는 마사지기. 한참 오랫동안 못 봤던 물건과도 조우했다. 동전을 넣고 쓰는 드라이어라니. 90년대의 어느 시간 속으로 잠시 들어온 것 같았다. 



탕 안으로 들어갔더니 동네 할머니와 아주머니 몇 분이 모두 탕 안에 있었다. 낯선 사람임을 알아보는 듯 힐끗거리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여행용 파우치에서 일회용품들을 꺼내 오늘의 목욕재계를 시작했다. 오롯이 몸을 돌보는 시간이 그렇게 평화로울 수 없다. 평일의 휴가, 출근 때문에 후다닥 샤워만 마칠 필요가 없으니 더 행복했다.


탕은 두 종류로, 온탕과 냉탕이 나란히 있었다. 온탕은 온도도 안성맞춤이고 물도 깔끔했다. 얼마 가지 않아 그 비결을 알 수 있었다. 한 아주머니가 불쑥 일어나 온수를 콸콸 틀고 물을 걷어내고 나면 십오 분쯤 뒤 또 다른 아주머니가 들어와 온수를 콸콸 틀고 물을 걷어내고 있었다. 탕에 들어오는 사람마다 물을 갈고 있으니 어찌 깨끗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얼굴이 빨갛게 될 때까지 온탕에 머무르다 냉탕으로 옮겨갔다. 온탕에서 달아오른 몸이 상쾌하게 식는 기분이 좋았다. 때 불리지 않고 뭐하냐는 잔소리가 날아들 일도 없이 커버렸으니, 온탕과 냉탕을 제멋대로 들락날락하며 목욕탕을 누볐다. 


탕에서 아주머니와 할머니들이 서로 사이좋게 돌아가며 등을 밀어주는 모습이 보였다. 이런저런 동네 소식과 얘기도 오고 갔다. 나는 알 길 없는 이야기, 그들의 사이가 어떤지 알 수 없었지만 그냥 사람 사는 동네가 다 그러려니 하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속 편한 이방인의 목욕 시간이 그렇게 끝났다.


장수탕의 입욕권. 2018년 5월 22일.
영업신고증은 2011년 버전이었지만, 이곳의 개업년도는 1994년이라고 한다.


목욕이 끝나고 카운터로 나와, 아주머니께 괜히 말을 걸어봤다.


"여기는 몇 년 됐어요?" 

"한 25년 정도 됐으려나?" 

"아, 저 놀러 왔다가 여기 한 번 들러봤거든요. 좋네요."

"좋기는 뭐가 좋아. 요즘 좋은 목욕탕이 얼마나 많은데."

"저는 진짜 좋았는데요."

"낡아서 형편없지 뭐. 여기도 이제 문 곧 닫아요."

"네? 언제요?"

"요번 5월 말까지만 하고 그만둘 거예요."

"왜요, 너무 아쉬운데요."

"아이고, 말도 마요. 여기저기 물 새고 관리하려면 돈도 많이 드는데 예전만큼 사람은 안 오고. 힘들어."

"아……. 동네 분들이 아쉬워하시겠어요."

"안 그래도 난리지 뭐. 이제 여기 문 닫으면 어디 가냐고."


차마 뭐라 할 수 없었다. 잠깐 다녀가는 객이, 단골손님을 두고 문을 닫는 주인의 마음을 알 수 없는 법이니까. 불가마도 있고 찜질방도 있고 스파랜드도 있는 세상이지만, 아직도 장수탕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 그럼에도 문을 닫을 수밖에 없는 사정이라는 것도 있다. 오래된 것들이 사라지는 건 때론 자연스러운 일이고, 새로운 것들도 충분히 좋다. 단골손님들은 어떻게든 다른 장소를 찾아가겠지. 그런데도 한구석에 아쉬움이 남는 건 뭘까. 


엉뚱하게도 나는 이 시점에서 다시 동화 「장수탕 선녀님」이 생각났다. "장수탕에 사는 선녀님은 어디로 가야 할까요?" 날개옷 잃고 장수탕에서 사는, 냉탕에서 노는 법을 가르쳐 준, 요구룽 하나에 기뻐하던 선녀님. 우리는 미처 몰랐지만, 동화「장수탕 선녀님」처럼 장수탕에서만 태어날 수 있는 멋진 이야기가 분명 있다. 그동안 장수탕을 거쳐간 목욕객들의 수만큼, 너무나 평범하고 사소해서 주목하지 않았던 우리네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를 담은 공간이 하루아침에 사라진다는 게 못내 섭섭했다. 그럼에도 어떤 말도 더 할 수 없어, 물끄러미 바라보다 발걸음을 돌렸다.


이제 신촌에는 장수탕이 없다.




목욕탕 정보

장수탕(장수목욕탕) ㅣ 서울특별시 마포구 신촌로22길 10 

*1994년 12월 30일 개업, 2018년 6월 12일자로 폐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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