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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유 Jan 10. 2024

알베르 카뮈 [이방인] 7

2024 매일 필사 첫 번째

엄마는 종종 누구라도 완전히 불행해지는 법은 없다고 말하곤 했었다. 하늘이 유색으로 물들고 새로운 하루의 햇살이 내 감방으로 미끄러져 들어왔을 때, 나는 엄마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어쩌면 발걸음 소리를 들을 수도 있었고, 그리하여 내 심장이 터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여러 달 전부터 그 벽을 바라보았노라고 말했다. 내가 이 세상에서 그 벽보다 더 잘 알고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오래전에 나는 그 벽에서 하나의 얼굴을 찾으려 했었다. 하지만 그 얼굴은 태양의 불꽃과 욕망의 불꽃을 담은 얼굴이었다. 그것은 바로 마리의 얼굴이었다. 나는 마리의 얼굴을 찾으려 했으나 헛 일이었다. 이제는 그것도 끝이었다. 어쨌든 나는 이 돌의 땅에서 솟아나는 것을 아무것도 보지 못했었다. (...) 이제 나는 몸을 완전히 벽에 기대고 있었기에, 햇빛이 이마 위로 흘러내렸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나의 내면에서 무엇인가가 폭발했다. 나는 목이 터지도록 소리 질렀고, 그에게 욕을 퍼부었으며, 기도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그가 입은 사제복의 깃을 움켜쥐었다. 기쁨과 분노가 솟구쳐 오르는 감정의 역동과 더불어, 나는 마음속 깊은 곳을 그에게 송두리째 쏟아버렸다. 


오직 하나의 운명이 나를, 또한 나와 함께 당신처럼 내 형제를 자처하는 수많은 특권자를 선택하게 되어 있으니 말이야. 


잠시 잠이 들었던 것 같은데, 눈을 뜨자 얼굴 위로 별들이 가득 보였기 때문이었다. 전원의 소리가 내 귓전까지 올라왔다. 밤의 냄새, 흙냄새, 소금 냄새가 내 관자놀이를 시원하게 적셨다. 이 잠든 여름의 경이로운 평화가 밀물처럼 내 안으로 들어왔다. 바로 그때, 방의 어둠 저 끝에서 뱃고동이 울렸다. 그 소리는 어제 나와는 영원히 무관한 한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엄마를 생각했다. 어제 나는 왜 엄마가 삶이 끝날 무렵에 '약혼자'를 가졌었는지, 왜 엄마가 삶을 다시 시작하는 놀이를 했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듯했다. (...) 그처럼 죽음 가까이에서 엄마는 해방감을 느꼈고,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욕망이 일었음이 틀림없었다. (...) 그리고 나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준비가 되었음을 느꼈다.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내게서 고뇌를 씻어주고 희망을 비춰준 듯, 신호와 별들이 가득한 밤의 어둠 앞에서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다정한 무관심에 가슴을 열었다. 세계가 그토록 나와 닮았고 그토록 형제 같으며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고 느꼈다. 모든 것이 완결되도록, 내가 외로움을 덜 느끼도록, 내게 남은 일은 처형일에 모쪼록 많은 구경꾼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이해 주기를 소망하는 것뿐이었다. 


뫼르소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소설이 후반에서야 뫼르소가 아버지의 부재가 있었던 것, 어머니의 삶의 태도를 물려받은 것 등 조금의 의문점은 풀렸지만 뫼르소가 사형선고를 받을 정도인가에 대한 의문이 남았다. 물론 살인이라는 중범죄를 저질렀지만 검사가 주장한 대로 뫼르소가 계획범죄를 저질렀는지에 대한 확신은 내게 없다. 

우리 누구나 욕망을 갖고 있지만 감춘 채로 살아간다. 죽음 앞에 이르러서 진정한 해방을 느끼며 오히려 삶을 새롭게 살아볼 욕망을 느낀다는 것도 처음엔 이해하기 어려웠다. 계속 곱씹어 생각해 보니 우리도 '만약에 일주일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무엇을 할래?'와 같은 질문을 통해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는 것처럼 뫼르소가 그러한 마음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볼 뿐이다. 

자신의 마지막이 많은 사람들의 증오의 함성으로 가득 차길 소망한 뫼르소. 누가 그런 시나리오를 원했는지 알 수 없으나 그것이야말로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자신의 스토리의 완결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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