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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이상동몽

25.02.28

by Anavrin

2월의 마지막 날을 어떻게 보내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미술관 봉사활동을 다녀왔다.

일은 단순하고 쉬웠다.

1. 관람객이 없는 동안엔 의자에 앉아 있어도 되지만, 관람객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의자에서 일어나 그들을 지켜볼 것.

2. 혹여라도 관람선을 넘는다면 그에 대한 주의를 줄 것.

3. 잘 모르는 내용에 대해 물어보면 안내데스크를 안내해 줄 것.


밀물과 썰물처럼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전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살아가는 것 역시 이렇게 단순하고 쉬울지 모른다.

애를 써서 무엇인가를 얻고 지키고자 할 때에는 일어서되

그럴 필요가 없을 때에는 어깨에 힘을 풀고 앉아서 쉬기도 하고

선을 넘지 않도록 신경 쓰되 넘었다면 곧바로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면 된다.

잘 모르는 일을 마주했을 때 다른 사람에게 묻거나 도움을 청하면 된다.


그동안 모르는 척 아닌 척 외면해 왔던 사실을 직면하기로 했다.

지금은 내가 앉아야 할 때구나. 너무 오랫동안 일어서서 온몸에 힘을 주고 있었구나.

3년간 준비해 온 시험이 있었다.

처음 1년은 처음이니까, 그다음 2년은 이제 좀 알 것 같아서, 마지막 3년은 내 모든 것을 쏟아부었는데도

결과는 내가 원하는 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3년이라는 시간을 쏟아버리고 나니 이제 더 이상 어떤 것을 준비해야 하는지

이 시험 말고 어떤 준비를 하고 어떤 일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고 알려줄 수도 없는 길고 긴 물음 속에 빠져들었다.


드라마와 영화에선 진심을 다하면 언제나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받는다.

제대로 된 결과를 내지 못한 내가 진심을 다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괴로웠다.

하지만 내 진심과 어떤 결과 간에는 아무런 인과가 없다는 것을

이제는 조금씩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모든 것을 운이나 운명에 맡기는 듯한 태도는 옳지 않지만

실제로 많은 것들이 노력이나 진심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걸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알량한 자기 위안이 아니라는 걸 이제야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다른 사람의 진심도 모두 다 받아들여지지 않는 세상에서

내 진심이라고 뭐가 특별해서 꼭 받아들여져야 하는가.

어떤 불운이 발생했을 때 '왜 하필 나인가?'라고 하늘을 탓해봤자

'반드시 내가 아닐 이유'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오늘 하루도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내게 드리운 이번 회차의 절망을

겸허히 받아들이며 내 것으로 만들어 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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