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매드랜드가 우리에게 던진 질문

우리는 모두 노매드의 삶을 살아간다.

by 김현승

(스포일러 주의)


런닝타임 내내 펀(프란시스 맥도먼드)과 함께 유랑했다. 삶과 죽음에 대한 복잡한 생각으로 알 수 없이 쓸쓸해져서 한참 동안 여운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광활한 대자연의 풍경을 향해 성큼성큼 걷다가 고단하고 주름진 얼굴을 문지르며 노을 아래 상념에 잠기는 펀의 얼굴이 눈을 감아도 자꾸 떠오른다. 이 여운의 정체가 무엇인지 차분히 확인하는 것이 이 영화를 제대로 이해하는 일이 아닐까 생각했다.


펀은 남편을 잃고 오래 다니던 직장까지 문을 닫자 단기 임시직으로 근근이 생계비용을 벌면서 밴을 타고 돌아다닌다. 노매드(유랑인)가 된 그녀는 우연히 알게 된 또 다른 노매드들과 어울리며 그들과 느슨한 연대를 이룬다. 그들은 밴을 집 삼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실용적인 아이디어나 물건을 주고받고, 일정 기간 밴을 세워둘 공간을 제공하는 일자리 정보까지 공유하면서 하루하루 생존을 위한 전쟁 속 전우애를 키워간다. 그러나 그들의 연대는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며 구속하려 들거나―그것이 지독한 외로움의 끝에서 선의로 벌어진 일이라도―긴 시간 함께 머물기를 원하는 순간 지속 불가능한 연대다. 노매드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모였다가 흩어지고, 우연히 스쳐 지나가다가 다시 만나는 그들에게는 저마다 정착해서 사는 삶을 포기한 사연이 있다. 사연은 다양하지만 그 밑에 깔려있는 것은 가까운 이들의 허무한 죽음이 남긴 상실감이다. 그들은 모두 고통스러운 상실감으로 인생에 회의를 느끼다가 이내 길 위에서 그들만의 방식으로 삶을 완성하고자 유랑길에 오른 것이다. 가슴 한 켠에 뻥 뚫린 구멍으로 대자연의 풍광과 자유의 해방감을 흘려보내며 살아간다. 구멍난 자리가 가끔 시원해지다가, 또 가끔은 쓰라리다.

이 영화가 저널리스트 제시카 브루더가 쓴 동명의 르포르타주를 바탕으로 한 것임을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화 자체가 2008년 글로벌 경제 공황 이후 일자리를 찾아 떠돌아다니는 미국인 노인들의 생존 문제만을 비판적으로 다루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런 현실에서 모티프를 얻은 것은 맞겠지만, 영화는 그들의 일상을 담담하게 그려내면서 ‘삶과 죽음의 문제,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로 나아간다. 이 땅에 태어난 우리 모두는 노매드다. 노매드랜드는 펀과 같은 사람들만의 세계가 아니라 모든 이들의 인생, 그 자체다. 잘 지어진 집의 지붕 아래 안락한 침대에서 잠드는 사람들조차 스스로 노매드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대출 빚까지 끌어모아 안간힘을 쓰며 돈을 벌어들였더라도 당장 밴을 끌고 돌아다니는 노매드들이나 그들이나 훌쩍 세상을 떠나야 하는 게 언제인지 예측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다. 함께하고 있는 이들과의 관계도 언젠가 이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모였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하는 노매드들의 삶이나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노매드랜드는 지구상에 영원한 안착이 허락되지 않은 모든 인간의 삶을 상징한다.


펀이 길 위에서 만난 스완키 할머니(샬린 스완키)는 경제계에서 20년 간 열심히 일하다가 동료의 죽음을 계기로 직장을 그만두고 여행을 시작했다. 요트를 사서 마당에 놓고 퇴임 일주일 전에 세상을 떠난 친구는 그녀에게 더 이상 짧은 인생의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평생 일해서 번 돈으로 요트를 사서 한 번 타보지도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인생은 얼마나 허망한가. 75세가 된 그녀는 암세포가 폐에서 뇌로 전이되는 바람에 7, 8개월 밖에 살지 못한다는 진단을 받았지만, 병원에서 시간을 낭비하면서 죽음을 맞이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추억이 담긴 알래스카 여행을 마지막 종착지로 하고 거기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겠다는 계획을 말하면서 그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렇게 덧붙였다. “좋은 것 많이 보고, 카약도 타 보고, 야생 무스도 봤어. 아이다호 강 위의 무스 가족. 콜로라도 호수에선 큰 펠리컨이 스치듯 지나갔지. 한 번은 모퉁이를 돌았더니 절벽이 나오는데 수많은 제비가 거기 둥지를 틀고 있었어. 제비 떼 날아다니는 모습이 물에 비쳐서 마치 나도 날고 있는 느낌이었지. 사방팔방 제비 떼였어. 제비 새끼들이 부화하며 알껍질이 떨어져 작고 흰 껍질들이 수면 위에 떠다니는데 그게 너무 아름다운 거야. 그 때 느꼈지. 이만하면 완벽한 삶이다. 지금 이 순간에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스완키 할머니의 대사는 이 영화가 비단 경제 공황으로 일자리를 찾아 유랑하는 노인들의 문제만 다루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영화의 여운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동안 스완키 할머니의 이 대사가 계속 떠오른 이유이기도 하다.


펀은 유랑자 모임에서 만난 데이브(데이빗 스트라탄)와 그의 가족들을 통해 정착의 기회를 얻는다. 잠시나마 그녀에게 아이처럼 해맑은 웃음을 되찾아준 데이브이기에, 함께 정착하자는 데이브의 제안은 그녀에게 잠을 못 이룰 만큼 강렬한 유혹으로 다가온다. 부유한 삶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계속해서 부유하기 위해 고민하는 언니의 가족들이 제안한 것과는 사뭇 달라 보이기도 한다. 데이브가 제안한 노년의 삶은 맛있는 음식을 차려놓은 따뜻한 가족 모임에 만족하며 손자를 돌보고 가축의 먹이도 주면서 평안을 누리는 삶을 허락하는 것 같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다시 떠난다. 자신의 것이 아닌 삶, 대출빚은 아니더라도 지내는 내내 이방인 가족으로서 마음의 빚을 안고 살아야 하는 삶을 거부한 것이다. 아마존으로 돌아가 크리스마스 시즌 아르바이트를 하고, 혼자 새해를 맞이하고, 죽은 남편 ‘보’에 대한 그리움에 지친 어느 날에는 다시 유랑자 모임을 찾아 위로받기도 한다.


펀이 정착의 기회를 거부하고 다시 새로운 출발을 하는 마지막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영화 첫 부분에서 펀은 남편과 함께 지내던 엠파이어 석고 공장 창고에 얼마 안 되는 가재도구를 맡겨두고 필요한 물건만 밴에 싣고 떠났지만, 그녀가 다시 엠파이어를 찾았을 때는 모든 물건을 처분한다. 그리고 남편과 살던 빈집에 들러 마치 과거의 기억을 떠나보내는 조용한 의식을 치루듯 천천히 한참을 둘러본다. 빈집을 뒤로 하고 밖으로 걸어나오는 펀의 뒷모습은 화면 가득 펼쳐진 산맥을 향해 홀로 달려가는 하얀 밴의 뒷모습으로 이어진다. 그녀가 다시는 어떤 정착의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노매드로서 새로운 삶을 이어가리란 짐작을 하게 된다. 사회적, 경제적으로 밀려나 유랑하는 자의 쓸쓸한 어깨가 아니라, 노매드의 삶을 스스로 선택한 자의 뒷모습이다. 대출빚과 마음의 빚에 묶여 평생을 정착의 노예로 살지 않겠다는, 하우스리스(houseless)의 뒷모습이다.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어떤 유랑을 선택할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은퇴 이후의 안락한 삶이 보장되지 않는 고령의 노매드들을 안쓰럽게 바라보거나 그런 노매드들을 만들어 낸 시스템에 저항하는 거친 목소리를 담아내지 않아서 더 크고 묵직한 메시지가 있는 영화다. 사회적 문제를 ‘어떻게 살 것인가’, ‘사는 게 무엇인가’의 근본적인 문제로 깊이와 넓이를 확장시켰을 때 그 울림은 부조리한 시스템뿐만 아니라 모든 이의 마음을 흔들어댄다.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노매드랜드가 얻은 성취는 바로 이 울림의 가치를 인정받았기 때문이 아닐까.


덧) 프란시스 맥도먼드가 아카데미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다. 저널리스트 제시카 브루더의 논픽션 <노매드랜드 : 21세기 미국에서 살아남기>를 읽고 영화화 판권을 구입한 후 클로이 자오 감독을 직접 캐스팅했을 뿐만 아니라, 펀을 연기하기 위해 실제로 아마존 물류센터와 식당, 국립공원 캠프에서 일을 하며 실제 노매드들과 어울렸다는 그녀의 노력은 단순한 영화 제작 뒷얘기나 메이킹 필름에나 담을 TMI가 아니라 여우주연상 수상보다 더한 가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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