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고르 잠자에게 피로회복제를

카프카의 <변신>을 읽고

by 우주진


20세기 광고 중에 이런 피로회복제 광고가 있었다.


중년의 남자가 출근하려다 말고 서류가방을 던지고, 소파 위에 털썩 눕는다.

“나 오늘 쉴래!”

“왜?”

“피곤하니까!”

그리고 나오는 광고 멘트 “활! 원!”

그 남자는 피로회복제 활원을 마시고 다시 활기차게 출근길에 오른다.


나는 <변신>을 읽고 나서 이 광고가 불현듯 떠올랐다.


악몽에서 깨어난 그레고르 잠자는 자신의 몸이 갑충으로 변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변한 몸을 마음대로 다룰 수 없어서, 그는 침대에서 내려오지도 못하고 있다.

그런데도 그는 기차를 타고 영업하러 가야 하는데, 기차를 꼭 타야 되는데, 하면서 걱정을 하고 있다.

그는 이미 기차를 놓쳤다.

늦잠을 잔 것이다.
자신의 상황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기나 한 건지, 다음 기차를 타면 된다고 생각한다.

몸도 의지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이 와중에 그는 사장에 대한 불만과 외판원 업무의 고달픔에 대한 하소연도 빼놓지 않는다.


나는 이 장면을 읽으면서 생각했다.


혹시 그레고르 잠자는 외판원 생활이 너무 버거워서 번아웃 상태에 이른 것은 아닐까.

그의 의식은 아닐지라도, 무의식이 몇 날 몇 년을 빌고 또 빌어서, 결국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갑충으로 변한 건 아니었을까.

곰도 백일 동안 간절히 기도하면 사람이 될 수 있으니, 소설 속에서는 결코 불가능한 시나리오가 아니다.


만약에 그가 위의 광고 속 회사원처럼, 나 오늘 쉴래! 하고 외칠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그는 벌레로 변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가 벌레로 변한 후에라도, 그의 가족들이 그를 조금만 다르게 대해 주었더라면, 그는 다시 사람으로 돌아왔을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슬퍼하기만 하는 대신, 그의 고단함을 위로해 주고 그를 포근히 안아주었다면,

여동생이 자기 방식대로 잘 해주려다 지쳐 버리는 대신, 벌레로 변했어도 그가 여전히 오빠라는 사실을 받아들여 주었다면,

아버지가 무능해진 아들에게 분노를 표출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대신, 그동안 가장 노릇을 하며 가족을 부양해 온 수고를 인정해 주었다면.


그랬다면 그레고르는 한동안 갑충으로 방을 기어다니며, 주는 밥을 먹고 쉬다가, 천천히 피로를 회복하고 다시 예전의 그레고르로 돌아왔을지도 모른다.

피로회복제를 마시고 다시 힘을 얻는 광고 속 회사원처럼 말이다.


이미 소설 속에서 사람이 벌레가 되었는데, 벌레가 다시 사람이 되지 말란 법이 어디 있겠는가.


물론 이건 그저 나의 희망일 뿐, 대부분의 인간사는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


<변신>은 나에게 너무 흥미진진한 텍스트라 여러 번 읽었다.

이번에는 특별히 시간을 더 들여 꼼꼼하게 읽었다.

초반의 스펙타클한 전개, 가족들의 행동을 통해 드러나는 세밀한 심리 묘사, 이해받지 못하고 점점 고립되어 가는 그레고르의 내면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어쩔 수 없는 존재의 비극적인 면을 깨닫게 된다.


예전에는 한 사람에게만 의존하는 가족의 역기능적 구조에 주목하며 읽었고,

또 어떤 때는 그레고르를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환자나 노인의 메타포로 읽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현대 사회에서 번아웃에 처한 직업인의 입장에서 이 글을 읽었다.


나는 현재 직장인은 아니지만, 갱년기에 접어든 남편이 늘 피곤하다 피곤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데다가, 실제로 몸 여기저기에 문제가 생기는 것을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번에는 초반 그레고르가 자기 직업을 힘들어하는 부분이 더 눈에 들어왔다.


그레고르 잠자는 책임감이 투철한 사람이다.

아버지가 진 빚을 갚기 위해, 재능 있는 동생을 음악학교에 보내기 위해, 어머니의 고생을 덜기 위해 자신과 맞지도 않는 영업직을 선택했다.

아마도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책임감이 투철한 사람일수록 의외로 자신의 힘듦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드러내지 않는 고통은 결국 속병이 된다.

아주 오래전에 읽은 책에서 저자는, 책임감 강하고 희생적인 사람들이 암 같은 질병에 더 잘 걸린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남들은, 아무리 가족이라도 해도, 말하지 않는 마음까지 알아줄 수는 없다.

그러니 말하거나 드러내지 않은 고단함은 타인에게는 가 닿지 않는다.


가족의 관심과 사랑과 인정이라는 피로회복제를 받고 싶었다면, 그는 말했어야만 했다.


나 아파요, 나 힘들어요, 라고.


요즘 유난히 피곤하다며 징징대는 남편을 좀 더 살펴야겠다.

어느 날 갑자기 벌레로 변하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