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이놈들아, 세월 금방 지나간다. 학교 다닐 때 글자 한 자라도 더 배우고 공부 열심히 해라.”
아버지도 쓴소리를 하셨다. “이눔아 핵교 댕길 때 공부 열심히 해라. 세월 금세 지나간다. 용산 배 면장은 똥장군 지고 댕기면서 책 읽었다 카더라.”
설 쇠고 외가 누나 시집가는 날 아버지 따라 외가로 갔다. 결혼식 끝나고 잔치가 벌어졌다. 어른들은 모두 술 한 잔씩하고 마당에서 장구 치고 노래 부르면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 늙어지면 못 노나니.” 어른들은 젊었을 때 놀자고 노래를 불렀다.
가수 현철은 “청춘을 돌려다오”라고 목청을 돋우고, 이문세는 “세월이 흘러가면 어디로 가는지 나는 아직 모르잖아요”라고 노래한다. 어른들도, 가수들도 세월을 입에 달고 산다.
세월이 뭔지 궁금했다. 세간에선 세월은 유수와 같다고 하고, 눈 깜짝할 새 지나간다고 하는데, 그 세월이 그렇게 빨리 지나가는지도 궁금했다.
세월(歲月)은 해와 달이 뜨고 지고 시간. 그런 세월이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지 셈을 해 보았다. 해와 달이 얼마나 빨리 뜨고 지는지 지구의 자전과 공전 속도를 시간으로 계산해 보면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지구가 스스로 한 바퀴 도는 것을 자전이라 하고, 24시간 걸린다. 이게 하루다. 적도에서 지구 자전 속도는 시속 약 1,670 킬로미터로 돈다. 이 속도는 시속 300 킬로미터를 달리는 KTX보다 5.5배 빠르고, 고속도로를 시속 100 킬로미터로 달리는 자동차보다 무려 16.7배 빠르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한 바퀴 도는 것을 공전이라 하고, 365일 걸린다. 이게 1년이다. 지구는 시속 약 107,000 킬로미터 속도로 태양 주위를 공전하고, 마하 2의 초음속 제트기보다 44배 빠른 속도다.
세월이 흘러가는 게 아니라 광속으로 달리고 있었다. 그래도 체감하지 못했다. 달려온 지난 세월을 뒤돌아보니, 어느새 중년을 지나 머리카락은 영어 격언처럼 ‘후추와 소금을 뿌린’ 듯 반백이 되었고 눈도 어두침침해졌다. 느지막하게 마누라와 말로 시비 가리지 않고 애처로운 연민의 눈길로 쳐다보는 게 일상이 되었다.
세월도 먼지 나는 신작로를 지나 고개를 넘고 개천을 건너 여기까지 나와 함께 달려왔다. 세월도 나만큼 힘들었을 게다. 글을 쓰고 짬이 나면 배낭 메고 산행을 하고 동행하는 친구와 밥도 먹고 막걸리도 한잔하면서 위선을 떨곤 했다. 그새 세월이 나 몰래 지나갔다.
주변에선 인생 2막을 준비하란다. 백세시대라 무얼 자꾸 배우고 공부해야 한다고 야단법석이다. 친구 모임에 얼굴을 내밀고 동아리에 가입하고 낯선 사람들과 지나온 세월을 얘기한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동안 무얼 했는지 모르겠고, 바쁘게 살아온 것만은 사실이다.
세월 그놈 참 빠르게 지나갔다. 눈 깜짝할 새 나이 한 살 더 먹고, 얼굴에 나잇살이 하나 둘 늘어갔다. 더 늙기 전에, 기억이 가물가물해지기 전에, 지나간 세월 더듬어서 글로 남겨보자. 지구의 자전 속도나 공전 속도가 아니라 인간의 속도로 말이다. 세월이 내빼며 달리는데,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살 수는 없지 않겠는가?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씩 해 보자.
책에서는 선택과 집중을 하란다. 일상의 셈으로 따지면 파레토 법칙이 되고, 생활에서 사용하는 어휘 분포로 따지면 지프의 법칙이 되는 셈이다. 이걸 평생 신줏단지 모시듯 보듬고 살아온 나를 내 안의 그가 보고선 빙그레 웃는다.
시근 들고 배운 게 하나 있다. ‘한 가지를 하더라도 하고 싶은 걸 하고, 그걸 할 때는 온 힘을 쏟아서 해야 뭐라도 손에 쥘 수 있다는 것을.’ 그러면 작품 하나가 불쑥 튀어나올 것 같다.
“이놈아, 세월 금세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