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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온 May 05. 2024

크래쉬

폴 해기스 감독의 크래쉬(2004)


연결성, 뒤엉킨 실타래를 따라


여러 개의 사건과 인물 그리고 뒤엉킨 시간은 우리에게 익숙한 흐름은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영화가 제시하는 흐름에 맞춰 따라가고 영화가 보여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이 복잡하고 익숙지 않은 방식은 마치 엉킨 실타래와 같다. 이제 우린 이 꼬인 부분에 온 신경을 집중한다. 그리고 이를 풀어내는 행위에 집중한다. 그러다 보면 여럿 등장하는 사건과 인물도, 뒤죽박죽인 시간도 더 이상 중요지 않게 된다. 실 그 자체, 모든 것을 연결하고 있는 이 흐름만이 중요하다.


화면 속, 인물들의 절묘한 교차. 다른 사건, 같은 단어. 모든 사건은 연결되어있다. 그리고 이 모든 사건을 관통하고 있는 ‘충돌’. 잘못된 인식이 불러일으킨 오해와 분노는 하나의 줄기를 형성한다. 이는 영화 속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출발선을 제시한다.



분위기


동화적이다. 몽환적이면서도 따뜻하다. 가볍고 부드럽다. 공중을 자유롭게 부유하는 듯한 기분. 영화에 전반적으로 깔린 분위기는 방탄 투명망토를 선물 받는 씬과 같다. 열쇠수리공과 그의 아이가 주고받는 대화처럼 사랑스럽고, 아이의 방처럼 따뜻한 것들로 가득 차 있으며, 나긋한 자장가가 흘러들어올 것만 같은 그런 분위기.


충돌의 연속인, 긴장감이 감도는 이곳에서 마주한 이 상상도 못 할 분위기는 괴리감을 불러일으키기보다 다정하고도 친숙한 느낌을 준다. 보통 자극적인 것, 불편한 것은 우릴 그 상황으로부터 도망치게 하거나 부정적인 감정을 증폭시킨다. 또는 짧고 강력한 쾌감을 선사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정하고 따뜻한 것은 우리가 그 상황에 좀 더 오래 머물게 한다. 그렇게 분위기에 취해 경계를 풀고 그곳에 동화되어 나 또한 다정한 눈을 하게 한다. 부드러워진 눈과 태도로 주변을 찬찬히 뜯어보게 하고 생각하게 하고 마음에 새기게 한다.



충돌


충돌이란 단어는 대체로 부정적이다. 그래서 충격이 컸다. 이런 폭력적이고 신경질적인 단어가 동떨어진 인간과 인간 사이를 연결 지어줄 출발점이 될 수 있단 것이.


분노는 어디서부터 오는가. 내면의 막연한 불안에서부터 오기도 하고 외부가 주입하기도 한다. 내가 이것밖에 안 되는 사람인가 하는 자괴감이 분노하게 만들기도 한다. 또는 내가 만든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저 사람, 저 상황이 날 분노케 하기도 한다. 분노를 만들어내는 원인은 무수히 많다. 그리고 인간은 상황에 대해 정확하고 객관적인 판단능력이 없다. 그래서 언제나 정확한 분노의 원인은 알 수가 없다. 그저 가장 그럴싸한 이유를 추측할 뿐이다. 인간의 부족한 판단력과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 그 순간의 상태는 생각과 마음을 오염시킨다. 그래서 분노는 늘 조심해야 한다.


충돌에는 간극이 불러일으킨 분노가 실린다. 크래쉬의 충돌에도 누군가의 분노가 수반된다. 다만 평소 분노가 보여주는 지속성을 지니진 않는다. 이 영화의 분노는 그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평행선을 내달리는 형태가 아니다. 이들은 충돌을 겪고 난 후 연이어 함께 충돌했던 이의 또 다른 모습을 마주한다. 충돌은 관심의 시작이다. 대상을 향한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시작되었다는 게 중요하다.



세상의 온도


사람이 좋아지는 영화인가 싫어지는 영화인가? 어리숙하고 섣부르게 행동하고 다른 이에게 피해 주고 상처 주고. 대체로 못난 모습만 보았다. 그러나 사람에 대한 혐오는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인물 모두에게 애정이 갔다.


이 세상은 따뜻한가? 아니. 현실을 보면 세상은 차게 식어있다. 현실을 알아갈수록 자연스레 사람들과의 정을 끊는 법을 배워나갔다. 나의 것을 빼기지 않으려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한순간도 경계를 늦추지 않아야 한다. 기회가 보이면 뺏어오기도 해야 한다. 너와 난 일시적으론 아군이 될 수 있지만, 이 관계는 영원하지 않다. 믿었다간 나만 손해를 보게 된다.


연출의 힘인 것인지 영화의 힘인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영화를 보는 동안 난 마치 신이 된 기분으로 영화 속 사람들을 여유롭게 내려다보았다. 그들은 저 아래에서 할퀴고 할퀴어졌다. 이런 폭력성은 가끔 유흥거리로 취급되곤 하는데 이들은 그런 느낌을 주진 않는다. 그중 누구도 응원하지도 않았고 그들의 싸움을 보고 쾌감을 느끼지도 않았다. 다만 보는 내내 안타까운 마음만 들었다. 인간은 왜 저리도 나약하고 멍청할까. 그런 측은한 마음과 지금 내가 가진 관찰자로서의 여유가 그들이 보여주는 상황을 이해하게 하고 그저 안타까움만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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