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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온 May 05. 2024

브이 포 벤데타

제임스 맥티그 감독의 브이 포 벤데타(2005)


위대한 배우


나탈리 포트만은 대단한 배우다. 그녀의 연기는 아역일 때부터 대단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선 그녀보다 브이를 연기한 휴고 위빙이 더 눈에 띈다. 연출효과, 인물 자체의 매력을 제외하더라도 말이다. 배우에게 가면은 생각보다 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오로지 언어와 제스쳐로 승부를 보아야 하기 때문에. 그런데도 휴고 위빙의 연기엔 어색함을 찾아보기 어려웠을 뿐 아니라 이 영화의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그의 강인한 힘마저 느껴졌다. 휴고 위빙은 정말 엄청난 배우다!


배우는 영화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아무리 연출이 좋아도 배우가 영화와 어울리지 않는다면, 감독의 의도에 맞게 잘 살려주지 않는다면 그 영화는 망한다. 인물이 영화의 중심에서 극을 이끌어가는 구조라면 특히나 더 그렇다.


배우는 영화 안에서 강한 힘으로 사건을 이끈다. 그 힘은 표정, 제스쳐, 목소리 등과 같은 복합적인 요소의 합으로 드러난다. 관객은 배우의 힘에 따라 사건을 이해하고 그 힘이 형성하는 분위기에 따라 극에 몰입하거나 반하는 등의 반응을 보이게 된다.


지금까지 배우의 역할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했으나 솔직히 요즘은 전과 달리 배우에게 주목하지 않는다. 다들 연기력이 좋으니 크게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달까. 그런데도 가끔 배우의 연기가 눈에 띄는 순간을 마주할 때가 있다. 감정연기? 이젠 그런 격하고 폭발적인 연기엔 큰 감흥을 못 느낀다. 오히려 현실에선 흔히 접할 수 없는 기이한 상황을 연기할 때, 특수한 상황에서 과장된 연기를 할 때 그런 감동적인 순간을 목격할 수 있다. 잘 살리기 어려운 연기를 어색함 없이, 너무나 어울리게 표현해내는 그들의 능력을 본 순간에는 경외감까지 든다. 특히나 이번 영화처럼 가면으로 표정을 숨긴 상황, 즉 노출되는 표현의 수단이 제한된 상황에서 그의 능력을 발견한다면 소름 끼치게 거대한 감동을 하게 된다.



벤데타, 그 숭고한 서사


11월 5일에서 시작되어 11월 5일로 끝이 나는 이 거대한 복수극. 그 중심엔 의회 그리고 그에 반하는 한 인물이 놓여있다. 이 이야기의 중심이자 의회에 반하는 인물인 '브이'의 이야기는 '에비'를 통해 전해진다. 모든 것은 누군가의 의도로 빠져나갈 틈 없이, 치밀하게 짜여 있다. 브이가 보여주는 이 서사는 단순한 복수극이 아니다. 아주 고도로 치밀하고 완성도 높은 서사이다.


영화는 여기에 한술 더 뜬다. 브이는 종종 셰익스피어의 작품과 같은 고전의 문장을 인용한다. 그 인용문을 들을 때면 웅장한 클래식이 흘러나오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리고 암시에 걸린다. 브이가 만들어가는 이 피의 복수가, 그 길을 향해 차근차근 나아가는 발걸음이 단순한 복수극에 그치지 않고 마치 고전 작품과 같은 숭고하고도 역사적인 가치를 지닌 서사라고.


그러한 암시 효과가 아니더라도 이 작품의 숭고함은 영화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영화의 형식, 배우의 연기, 언어, 영상의 구도, 음향이 영화보다 극작품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 모든 것이 스크린이 아닌 무대를, 현대가 아닌 고전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또한 큰 줄기를 따라 이야기가 짜임새 있게 진행된다. 모든 장면은 명확하고 깔끔하게 표현되어있다. 매 순간의 폭발적인 힘은 잘 응축되어있다. 웅장하면서도 꽉 찬 느낌. 감히 평하기 어렵지만 이런 느낌이 영화의 완성도를 더욱 높인 것 같다.



브이를 위한 벤데타


우선 브이의 설정에 대한 말부터 시작해야겠다. 브이는 복수심에 불타는 인물이다. 그는 셔틀러 정권이 정치 권력을 얻기 위해 만들어진 실험체였다. 실험체로서 브이는 큰 고통을 받는다. 또 다른 고통은 외로움으로부터 온다. 그는 가족이 없다. 친구도 없다.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기도, 의지할 수도, 살아갈 희망을 얻을 수도 없다. 홀로 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야 하는 인물이다.


그런 외로움과 고통, 분노로 똘똘 뭉친 자의 벤데타. 그의 벤데타 안엔 많은 이들이 포함된다. 극 중 등장하는 모든 이들이 그의 의도대로(실제로 그가 만들어낸 이야기인지는 모르겠다) 움직인다. 그리고 대중. 그동안 셔틀러 정부로부터 불만을 품고 있던 대중이 브이의 극에 맞춰 자신의 주장을 사회에 드러낸다. 분노를 표출한다.


문제는 그렇게 얻은 자유가 과연 정당성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브이는 나쁘게 말하면 고통받다 미쳐버린 사람이다. 그의 복수는 대중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대중을 그의 계획에 포함했다. 그렇게 쟁취한 대중의 자유가 과연 정당한 것인가. 대중은 브이를 그들의 영웅이라, 자유의 상징이라 믿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이 지속하면 이것이 곧 진실이 되어버릴 것이다. 과연 자신을 위해 타인을 희생시킨 영웅을 영웅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아무리 결과가 좋다 하더라도 시작점이 엇나가 있다면 그 성공은 또 다른 몰락의 발판이 될 수 있다.



다른 신념


신념은 내게 부정적인 의미로 새겨져 있다. 신념이라는 단어만 들으면 무책임이란 단어부터 연상된다. 이는 자신의 신념이 중요한 나머지 가까운 이들이 원치 않는 희생을 하게 된 경우를 간접적으로나마 보게 된 탓일 것이다. 그 때문에 내게 있어 신념은 이상적이고 숭고한, 고결한 무엇이라기보다 그저 겉치레에 불과한, 자신의 말과 행동에 취해 분별력을 잃은 불완전한 상태가 나은 불행일 뿐이다.


그런데 정말로 신념은 나쁜 것이며 분별력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가져선 안 되는 것일까? 신념이라는 것만 믿고 자신의 삶을 불구덩이 속에 내던지는 이들이 잘못된 것일까? 좀 더 생각해보면 내가 신념 그 자체를 부정적으로 본 게 아니란 생각이 든다. 내 신념을 향한 불편한 마음은 대부분 신념이 아니라 신념이 향하는 대상에 맞닿아있다. 내가 불편하게 보는 신념은 사회라는 거대한 집단을 위하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난 내 주위의 사람, 더 좁게는 나라는 보다 작은 집단을 중요시하는 사람이다. 그러한 대상의 차이가 신념을 향한 불편함을 발생시켜왔다.


신념의 사전적인 의미는 굳게 믿는 마음이란다. 이제 보니 내게도 신념이 있다. 그렇게 불편하게만 여겼음에도 굳게 믿는 무언가, 신념이 내게도 존재하는 것이다. 이는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신념은 모든 이의 마음속에 있다. 그것들은 간절한 바람을 담고 있단 점에서 모두 같다. 그저 위하는 대상과 방향만이 다를 뿐이다. 그런 차이만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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