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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랫동안, 영화 《1917》을 보았다. 그녀의 퇴근을 기다리며 카페에 앉아 한 시간 남짓 보았던 게 2-3주 정도 전의 일이었다. EBS 드라마 《명동백작》을 보다가, 두 편을 보았는데도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앉은자리에서 세 편을 내리 볼 만큼 재미있는 드라마는 아니었으므로, 다른 것이 뭐가 없을까 뒤져 보다가 그렇게 보게 되었다. (그녀는 꽤 오래도록 오지 않았다.) 《기생충》과 아카데미 수상을 다투었던 좋은 영화라는 것은 진작 들어 알고 있었고, 사람 죽는 영화라면 치를 떠는 우리 어머니마저도 영화관에 가서 보고서는 좋다고 평했던, 신기한 전쟁 영화로 알고 있었지만, 따로 시간을 들여 볼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막상 보기 시작한 영화는 흡입력이 굉장했다. (물론 나는 꽤 많은 장면에서 화면을 멈추었다가,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재생을 하곤 했다.) 영화가 시작하고 딱 절반 가량 지났을 즈음 그녀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날 이후로 계속 멈추어 있던 영화의 나머지 부분을 마무리 지은 게 오늘의 일이다. 이 롱테이크 영화를, 나는 도대체 몇 번에 나누어 본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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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현대의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 중에서 끝까지 다 본 것이 무어였나 떠올려보니, 손에 꼽을 만하다. 어려서 극장을 찾아보았던 천만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는, 끅끅대는 울음소리로 영화관 전체를 뒤흔든 누군가 덕분에 클라이맥스에서 그만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고지전》도 영화관에서 보았었다.(아마 그땐 무언가 영화를 보아야만 했는데, 영화에 대한 선택권이 별로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여기저기 땀과 모래가 튀고 카메라 워크가 현란하던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그저 멀미를 했다. 그 유명한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첫 상륙 장면 이후로 진도를 빼지 못했고, 동생이 예찬해 마지않으며 2회 3회 차 관람을 하던 《허트 로커》는 한 번 쳐다보지도 않았다.
잔인한 것을 못 보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비위가 좀 상하긴 해도, 연출이려니 하고 앉아 있으면 어쨌든 지나갈 장면이니까. 그런데 유독 전쟁 영화를 보는 것은 왜 이렇게 힘들까? 가만 생각해보니, 어렴풋이 이유를 알 것도 같다. 문제는 리얼리즘. 소설을 찾아 읽는 취향도 비슷하다. 오늘날 어디에선가 벌어지고 있을 법 한, 불편한 현실에 대한 서술로 처음부터 끝까지 가득한 작품들은 감당이 어렵다. 어찌 되었든 서사 구조는 '욕망의 결핍'에서 출발하기에, 이야기 속의 그들은 마냥 즐거울 수 없다는 사실 자체가 불편한 것은 아니다. 어딘가 아프고, 어딘가 힘들고, 어딘가 불행해야만 한다. 이해한다. 결핍을 해소하기 위해 인물들은 끊임없이 노력해 나갈 것이며, 마침내는 욕망 해소에 성공할 수도,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또는 해소가 된 건지 아닌 건지 알 수 없도록 마무리를 지을 수도 있다. 결말이 어느 쪽이던 뭐 상관은 없는데, 다만 이 모든 과정이 끝끝내 현실의 테두리에 강하게 붙들려 있는 느낌이 든다면, 나는 조금 힘들어진다. 차라리 외계인이 나타나고(박민규?) 월북이라도 하면(김연수?) 차라리 좋겠는데. 근래(라고 쓰고 수천 년 전이라 읽는다) 읽은 것 중에서는 김애란 소설집이 그런 느낌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암울한 청춘들, 무슨 수를 써도 바꿀 수 없는 현실들, 그리고 그것을 더욱 가혹하게 느끼게 해 주는 사실적이면서도 담담한 문체들...(몸서리)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면, 나는 유독 전쟁 영화에서 리얼리즘의 불편함을 많이 느끼는 편이다. 전쟁 영화가 사실적이라서만은 아니다. 아마도... 주관적인 나의 경험이 그것을 사실적으로 만드는 것일 뿐. 그 경험이 무어냐고? 대한민국 남자라면 태반이 겪어 보았을, 그것, 군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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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대전, 평범한(척을 하지만 결코 평범하지는 않다) 두 명의 영국군 병사가 천오백여 명의 생명이 달린 막중한 임무를 맡아 전쟁터 한복판을 가로지르게 된다. 한 명은 지도를 볼 줄 알고, 친형이 위기에 봉착한 부대의 장교로 복무하고 있다는 이유로 선택되지만, 다른 한 명은 옆에서 함께 졸다가 엉겁결에 딸려 나온다. 늪지와 들판을 가로지르며 임무를 수행하는 와중에도 만담을 나누는 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왜인지 《반지의 제왕》의 프로도와 샘이 떠올랐다. 두 호빗처럼, 러닝타임 내내 이어지는 이들의 여정도 '인생길'에 대한 은유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일까, 살면서 누구나도 한 번쯤 해 보았을, '왜 나인가?(왜 하필 내게 이런 일이)' 하는 질문 역시 빠지지 않는다.
그저 잠시 졸고 있었을 뿐이었는데
이야기 흐름은 단순하다. 전체적인 진행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약간의 예외를 제외하면 결말 또한 별다른 반전이 없어 충분히 예측이 가능하다. 그럼에도 긴장감이 넘친다. 화면 전환 없이 끈질기게 인물의 여로를 따라가는 카메라 덕에, 1인칭마냥 철저하게 그들과 함께 하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 덕분에 몇 가지 기억이 되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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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공기 비슷한 것을 맡아본 적이 있다. 과장이 덧붙은 표현이지만, 적어도 그때 그 당시에는 그랬다. 군복을 입고서, 북측의 군 대변인이라는 자가 나와서 선전포고를 운운했던 그날. 유래 없던 뉴스를 접하던 생활관의 분위기는 그러했다. '나라와 국민을 지키며' '부모 형제 단잠을 이루게' 해 준다는 그들도, 이제 막 스무 살을 지난 어린 청년일 뿐이었다. 전쟁이 나면 어떡해? 삼사십 명이 함께 생활하는 공간은 저 질문 하나에 얼음장처럼 굳어져 갔다.
그럼 나는 간부 차 훔쳐 타고 바로 달아날 거야.
이제 막 일병을 달은 나이 어린 선임 하나가(그렇다. 그때 나는 이등병이었다), 억울한 듯 입을 비쭉이며 중얼거렸다. 아무도 그 말에 동조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누구도 딱히 제지를 하지는 않았던 기억이다. 물론 군인들이었지만, 신교대 기간병들을 모아 놓은 중대라 전투나 훈련 같은 것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던 점도 이러한 분위기에 한몫하였을 터였다. 다음날 아침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인근 교육 중대는 그날 당직사관의 지시(!)로 완전 군장을 착용한 상태로 전투화를 신고 쪽잠을 잤다고 했다. 그 밤, 잠 못 들고 뒤척였을 어린 청년들의 입에서는 어떤 대화가 오고 갔을까. 죽음의 공기라는 게 그렇게 어려운 말 만은 아닐 것이다. '한 번 죽지 두 번 죽냐'는 호기 섞인 유행가 가사는 죽음의 공포와 거리가 멀 때나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여긴 어디
전쟁 영화는 꼭 이러한 죽음의 공기를 다시 떠올리게 만들곤 한다. 백 년도 더 전의 전쟁 이야기임에도, 그저 재미있는 옛날이야기처럼 다가오지가 않는다. 다시 영화 장면. 군용 트럭의 바퀴가 진창에 바퀴가 빠져 버렸다. 많은 목숨을 살리기 위한 '시간과의 전쟁'에 나선 주인공은 절박하게 혼자서라도 트럭을 밀어 빠르게 상황을 복구하고 여정을 계속하려 한다. 사실 다른 병사들은 급할 것이 없다. 목적지가 어딘지는 모르지만 자신의 무덤이 될 가능성이 높다면, 굳이. 차라리 트럭 뒷칸에 실려 농담이나 따 먹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나쁠 것은 없다. 주인공의 다급한 모습을 멀뚱히 바라보다가, 그럼에도 그의 간절함에 마음을 움직여 함께 구호를 외치고 힘을 더하는 것은, 전우애라는 아름다운 말로 좋게 설명할 수 있는 대목이겠다.
혼자서 군용 트럭 뒤에 실려 다닌 적이 많았다. 우리 부대엔 수송대로부터 두 종류의 트럭이 파견 나와 있었다. 트럭은 그 무게가 이름이 되었다. 2와 1/2톤 트럭(두돈반)과 1과 1/4톤 트럭(사오 톤). 신병 교육대의 탄약 관리병은 일이 참 많았다. 탄약 반장 하사 1명과 병사 2명이서 6동의 탄약고를 관리해야 했다. 부대 내의 탄약고는 신병 교육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쌓아 두었는데, 다른 어느 부대보다 출납의 빈도가 잦았다. 사격 훈련을 진행하는 2주 차가 되면, 8천에서 1만 발 가량의 5.56mm 보통탄을 불출했고, 불출한 액수만큼의 탄피를 일일이 세어 정확하게 받았다. 4개 중대에서 신병 교육이 1-2주 간격으로 연이어 이루어지므로, 매주 이런 일이 반복되었다. 한두 달에 한 번씩은 외부에서 탄약을 수령해 탄약고를 채워 두어야 했다. 한 번에 10만 발 가량을 수령했다. 그럴 때 트럭에 탔다. 운전병이 운전을 하고, 탄약 반장이 조수석에 앉고, 탄약병인 나는 홀로 트럭 뒤 짐칸에 올랐다. 30kg의 탄약 상자를 트럭에 싣고, 내리고, 다시 차곡차곡 탄약고에 적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정기적으로 부대 밖에 나가 바람을 쏘이고 돌아오는 느낌만큼은 좋았다. 트럭이 멈추면 탄약상자 상하차로 진이 다 빠질 예정이었으므로, 이동하는 구간이 차라리 좋았다. 마냥 이 시간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덜컹거리는 트럭 짐칸에서, 하늘을 보고, 논을 보고, 먼 산등성이를 보고, 비닐하우스를 보았다가, 또 논을 보고.
부대 내에는 1개 동의 교육용 탄약고만 있었다. 나머지 5개 동은 차로 한 시간 가량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BL탄약고라고 부르는 이곳은 전시용 탄약을 보관하는 장소였다. 전쟁이 발생할 경우 사용할 것이었으므로 딱히 손댈 이유는 없었고, 한 달에 한 번씩 가서 정기 점검을 하면 되는 정도였다.
손댈 이유가 없다고 할 일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여름이 되면 풀을 깎는 일이 가장 곤욕이었다. 안전을 위해 탄약고는 거리를 두고 띄엄띄엄 배치되어 있었고, 건물 주변으로는 건물 높이보다 조금 높은 정도로 흙으로 쌓아 올린 방벽을 둘러쳐 놓아야만 했다. 초소를 지나, 정문을 걸어 잠근 두 개의 큼지막한 자물쇠에 감긴 종이 봉인을 찢고 문을 열면은, 탄약고 건물 5동이 방벽에 둘러 쌓인 채 멀찍이 떨어져 있는 형태의, 넓은 들판이 펼쳐졌다. 골프를 쳐도 되겠는 걸. 끝이 어딘지 가늠하기 어려운 푸른 공간을 바라보며, 탄약반장은 종종 저런 농담을 중얼거리곤 했었다.
풀은 무섭게 자라 올랐다. 고생했던 과거에 대해서는 한없이 과장하길 좋아하는 못된 기억의 힘을 빌리자면, 잡초는 2주만 지나면 다시 사람 키 높이만큼 자라 있었다. 시동을 걸고, 플라스틱 끈을 쪼매어 날을 돌리면 풀대들이 사정없이 꺾여 나갔다. 짓이겨진 줄기가, 풀잎이, 흙 알갱이가, 자갈들이 튀어 올랐다. 예초기를 한 번 돌리고 나면, 기기를 둘러 맨 등판은 땀으로 엉겨 붙었고, 조각나고 저며진 알 수 없는 것들이 옷에 그득히 늘러 붙었다. 그렇게 하루 종일의 작업이 끝나면 파슬리 가루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쓴 모양새로, 연신 재채기를 해 대곤 했다. 오늘날까지도 계절이 바뀌는 시기가 찾아오면 코 안쪽의 점막들이 그날의 기억을 안고 다시 고개를 쳐들고 괴롭히니, 나 또한 상해 군인이 아닌가, 우스갯소리가 절로 나온다.
BL탄약고에 갈 일은 잦은 편이었다. 규정상 한 달에 한 번 부대의 지휘관은 BL탄약고 안전 점검 및 시찰을 하여야 했다. 덕분에 새파란 이등병일 때부터, 무궁화 두 개의 대대장의 레토나에 올라 부대 밖을 돌았다. 밖에 나온 김에 점심이나 먹고 들어 갈까. 대대장과, 운전병과, 탄약반장과 함께 먹었던 점심 식사는 아직도 생생하다. 메뉴는 칼국수. 후루룩, 면발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는 상황, 어색한 정적을 깨고자 "칼국수 좋아하세요?" 하고 물었던 젊은 탄약반장의 불편한 물음도, "킬라(Killer)지", 대답했던 깡 마른 대대장의 거친 억양도 잊히지 않는다. 감쪽 같이 서명을 따라 할 수 있었던 삼사 출신의 대대장은 참 멋있는 군인이었고, 더 이상의 진급은 어려운 상황이었다. 신교대에서의 임기를 마친 이후에는 육군 본부로 발령이 났다. 예편을 위한 수순이라고들 했다.
나는 누구
트럭에 실려 찬 바람을 맞으며 달렸던 그 시절, 내 의지대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던, 그래서 흘러가는 풍경이 더욱 아름다워 보였던 그런 날들이 있었다. 참호 사이와 총탄 사이의 어딘가를 헤매던 1917년의 그네들도, 지금은 평범한 아저씨가 되었을 국수 킬러 명령권자도, 진급 한 번을 못하고 하사로 전역해서는 어딘가 음식점을 차렸다는 소식을 전하던 탄약 반장도, 아직도 환절기만 되면 재채기를 훈장처럼 달고 사는 나 역시도 마찬가지로,
알 수 없는 이가 모는 트럭에 실려
알지 못하는 곳으로
그렇게 흘러 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