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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거북서점 05화

작은 탈출구

by 오프리

서점 일은 매일 똑같은 공간을 쉼 없이 돌아가는 회중시계와 같다. 매번 새로운 책이 들어오지만, 리안의 일상은 규칙적인 톱니바퀴처럼 반복되었다. 마치 태엽을 감은 시계 소리처럼 직원들의 발소리와 낮은 대화 소리만이 밀폐된 공간을 채웠다.

본격적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늘 단단한 의식처럼 치러야 하는 일이 있다. 그것은 고객을 직접 상대하는 직업군의 필수과목, CS교육이다. 주로 베테랑 선배가 전담했고, 간혹 외부 전문 강사가 맡기도 했다. 리안에겐 강사의 입에서 습관처럼 쏟아지는 ‘고객 감동’, ‘프로 의식’, ‘15도 인사각’ 같은 경쾌하게 포장된 단어들이 이른 아침, 서점의 정적을 깨뜨리는 불협화음으로 들렸다. 마치 침묵의 제단 위를 가로지르는 날 선 경주마의 발굽 소리와 같았다.


교육이 끝나면 직원들은 일렬로 서서 마주 보고 간단히 몸 풀기 체조를 시작한다. 굳게 닫혀 있던 마음의 빗장을 풀고, 하루 동안 고객을 응대할 표정 근육을 풀어주는 과정이다. 모두가 자신을 포장하는 가면을 올리기 전, 내면의 솔직한 피로가 잠시 허락되는 순간이다. 전 직원을 이렇게 매일 아침 마주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상대의 표정을 읽게 된다. 리안은 상대를 자신을 비추는 거울로 삼아, 무의식 중에 경직된 얼굴 근육을 펴야겠다는 생각을 절로 했다. 상대가 입사 동기 가현일 때면 가끔 유쾌한 장난을 치는 것이 리안의 아침 활력소였다.


“야, 너 10년 된 묵은지 씹은 것 같은 표정이 그게 뭐이니? 다리미 갖다 줄까, 얼굴표정 좀 펴라 으잉?”


오랜만에 리안이 먼저 선제공격을 가했다. 리안은 굳이 가현의 표정을 지적하며 자신의 긴장감을 먼저 풀어헤치고 싶었다.


“사돈 남 말 하시네! 니 똥 마렵니? 얼른 화장실부터 다녀오라.”


리안이 먼저 치고 나가도 늘 이렇게 예상치 못한 공격으로 되받아 당하고 만다. '똥 마렵다'는 직설적이고 유치한 표현에 리안은 순간 맥이 풀려 웃음이 터져 나왔다. 덕분에 리안은 하루를 맘껏 웃으면서 시작할 수 있었다.

아침부터 다 같이 몸 풀기 활동을 하고 나면 다들 한결 표정이 밝아진다. 이렇게 매일 아침 유쾌한 교감을 나누고 나면, 그 후 직원들과 소통하는 데 가볍고 친밀한 토대가 마련되었다. 다만, 서점은 백화점처럼 고객을 위한 통창이 없었다. 활자와 종이 냄새가 가득한 밀폐된 공간에 오래 머무르면 가끔 머리가 띵해지는 듯 한 답답함과 두통이 찾아왔다. 그럴 때 리안은 일부러 멀리 있는 화장실을 찾아 걸었다. 그리고 문밖으로 잠시라도 나가 차가운 바깥공기를 쐬는 것이 숨 막히는 일상을 버텨내는 작은 탈출구였다.








매일 아침 서가에 들어온 신간의 종수보다 더 많은 책들이 반출되는 역설적인 풍경을 마주할 때가 있다. 정확한 숫자는 전산 시스템에 묻혀 알 수 없지만, 리안의 직감적인 시선은 그 불균형을 놓치지 않았다. 반출 대상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고, 저마다 서점에서 생존하지 못한 쓸쓸한 사연을 안고 있다.


첫 번째 부류는 전산 시스템이 냉정하게 솎아낸 ‘과잉 재고’이다. 진열된 지 오래된 책머리에는 마치 '이곳에서 너무 오래 머물렀다'는 낙인이 찍힌 것처럼 오랜 시간을 상징하는 얇고 희미한 먼지 띠가 내려앉아 있다. 이들은 장기 방치된 죄수들처럼 아무런 저항 없이 퇴장할 날만을 기다리는데, 전산시스템은 때를 놓치지 않고 이들에게 냉엄하게 반출명령으로 화답한다.


두 번째 부류는 리안의 세심하고도 날카로운 시선에 의해 현장에서 즉시 운명이 결정되는 책들이다. 서가를 훑는 리안의 손끝이 고객의 무심한 손길에 찢기거나 구겨져 상품성을 상실한 책들에 닿을 때면, 리안은 순간적으로 날카로운 통증을 느꼈다. 표지 모서리가 우그러지거나, 또는 페이지 일부가 너덜너덜해지거나 찢긴 책들은 더 이상 독자들을 만날 기회를 상실하게 된다. 이들은 언제든 공장에서 갓 찍혀 나온 복제품으로 말끔하게 대체될 터였다. 이러한 책들은 리안에 의해 즉시 반출 목록에 추가된다.

리안은 판매 자격을 잃은 두 종류의 ‘실패작’을 끈으로 단단히 묶어 물류센터로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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