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의 발길이 끊긴 후에도, 서점 안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진다. 물류센터의 도움이 필요한 순간은, 고객이 찾는 책이 서가에 없거나 재고가 부족할 때이다. 추가 주문된 책들이 카트에 가득 담겨 서점 후미진 곳으로 전달되면, 리안의 두 번째 일과가 시작된다. 리안은 먼저 책 리스트를 훑고, 상자에 담긴 책들을 꺼내 도난 방지 스티커를 일일이 부착한다. 그리고 책 종류별로 묵직한 더미를 분류해 놓는다. 다음은 PDA를 든 채 책 바코드를 찍는 일이다. 삑- 삑- 단조로운 기계음이 울리면, 리안은 서가 위치를 확인하고 책을 서고나 비치대에 진열한다. 때로 원하는 책이 없을 때는 다른 지점에 요청하거나 출판사에 직접 주문하는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 모든 과정은 정확성과 속도를 요구하는, 지루하지만 명료한 노동이다.
책을 꽂는 일은 단순한 것 같지만 의외로 전신 운동에 가깝다. 책장은 보통 여섯 단인데, 낮은 단에 책을 비치하려면 허리를 굽히거나 다리를 깊숙이 쭈그려 앉는다. 반면, 높은 단은 까치발로 서서 손을 최대한 뻗어야 간신히 닿는다. 카트 하나에 많게는 백여 권의 책이 실리는데, 그 책들을 종류별로 꺼내 좌우상하로 몸을 끊임없이 이동하며 수십 번씩 책장에 비치하는 동작을 반복해야 한다.
리안의 몸이 만들어내는 움직임은 마치 잉크젯 프린터가 인쇄를 할 때의 장면을 연상시킨다. 전원부로부터 배달 신호를 받은 좌우측의 모터가 잉크 카트리지가 부착된 캐리어 카트리지를 목표 지점에 재빠르게 이동시키듯, 리안의 몸 역시 책이라는 정보를 서가라는 백지 위에 정확하게 찍어내어 한 치의 오차 없이 일을 수행하는 기계와 같았다.
리안은 자신의 규칙적인 노동 속에서 미세한 기계의 움직임을 발견했고, 그 완벽한 질서 속에 몰입했다. 반복되는 그 정교한 움직임은 온종일 감정 노동과 씨름하며 소진된 정신의 긴장과, 미소 뒤에 숨겨야 했던 내밀한 자아의 억눌린 파열을 잠재우는 고요한 냉각수와 같았다.
손끝의 단조로운 행위가 복잡한 머릿속을 비워내면서, 리안은 영혼의 맑은 수액처럼 덧없이 고여 드는 평온을 되찾았다. 모든 책들이 제자리를 찾아 단정한 침묵 속에 비치될 때, 리안은 혼돈이 질서로 바뀌는 작은 경이로움을 느꼈다. 책 정리가 끝나면 베스트셀러 진열대를 업데이트하는 일이 기다린다. 순위권에서 밀려난 책들은 시스템에서 서가번호를 지우고 먼 곳의 다른 서가로 이동시킨다. 그 자리를 새로 베스트셀러에 진입한 책들의 서가번호를 등록하고 눈에 잘 띄는 자리에 진열하는 작업이 뒤따른다. 이 모든 것이 마무리될 때쯤이면, 발바닥은 마치 딱딱한 시멘트 바닥에 눌린 듯 지끈거리기 시작하고, 목덜미는 고개를 반복해서 숙였다 편 자세 때문에 묵직하게 저려온다. 하지만 이제 시작일 뿐이다. 리안은 무인 검색대, 직원 PC, 그리고 포스기에 차례로 손을 대 전원 버튼을 누른다. “띠링-” 하는 기계음과 함께 서점의 잠자던 신경망이 켜진다. 이제부터는 하루 종일 서서 고객을 응대하는 감정 노동이 시작된다.
카운터 뒤에서 허리를 잠깐 기댈 때면, 리안은 앉아서 일하는 사람들의 엉덩이와 의자가 만들어내는 느긋한 평형이 문득 부럽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었다. 그 짧은 순간, 선배 소민이 리안에게 따뜻한 시선을 던지며 다가왔다.
“리안아, 잠깐 차 한 잔 할래? 목 좀 축이고 하자.”
소민은 따뜻한 종이컵을 리안의 손에 쥐어 주며 말했다.
“이제 많이 익숙해졌지? 열심히 하는 모습 참 보기 좋다. 근데, 너 이제 말투가 좀 사무적으로 바뀌었더라.”
소민의 지적에 리안은 순간 자신의 목소리를 되짚어보았다.
“나도 그랬어.”
소민은 자신의 경험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매일 똑같은 업무를 수도 없이 반복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말이 자동응답시스템처럼 책 읽듯 읊고 있더라고. 영혼 없는 활자를 읽어 내려가는 기분이었지. 나도 선배한테 지적받고서야 알았어. 그 뒤로 '기계가 되진 말아야지' 하며 의식적으로 노력했지. 다행히 인간다운 말투로 돌아갔고…….”
소민은 리안에게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말투를 갑자기 바꾸긴 힘들겠지만, 네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위해서라도 시도는 해봐야 하지 않겠니?”
소민의 조언은 강요가 아닌, 후배에 대한 진심 어린 염려가 담겨 있었다. 리안은 소민의 조언을 듣자마자, 머릿속에서 오래된 필름처럼 한 장면이 재생되었다. 그것은 거의 매일 드나드는 동네 편의점의 알바 남학생이었다. 리안은 그와 특별히 좋은 관계를 맺을 필요성이나 이유는 없었다. 그곳은 단지 집 주위에 생필품을 파는 유일한 곳일 뿐이었다.
“이천 오백 원입니다. 봉투는 유료입니다. 영수증 필요하신가요?”
상대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지 않고, 마치 외웠던 문장을 녹음기처럼 그대로 읊는 그의 냉랭한 목소리는 리안에게 여간 정감이 가지 않았었다. 리안은 그 차가운 사무적인 톤에서 인간적인 접점을 찾지 못해 늘 불편함을 느꼈다. 그러나 지금, 소민의 지적을 듣고 리안은 깨달았다. 그 남학생의 영혼 없는 목소리가 바로 지금 자신의 모습이었다는 것을. 리안은 편의점 알바에게서 미처 자신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느림의 미학과 영속적인 가치를 실현하겠다던 자신의 신념이, 일상의 반복되는 톱니바퀴 속에서 시나브로 마모되고 있었다. 리안의 가슴에 묵직한 돌덩이 하나가 얹힌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