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 사람의 손과 발을 아꼈다
9박 10일의 여행을 떠났다. 선수들을 호되게 훈련시키는 구단의 전지훈련과 다르지 않았다. 선수는 50대 초중반의 남녀였다. 평소 테니스를 열정적으로 치며 직장 내 전국 대회에도 나간 적이 있는 소속 지역의 체육인이었고 다른 하나는 튼실한 하체를 바탕으로 걷기라면 지구 반 바퀴는 너끈히 돌겠다며 웬만한 거리는 걸어서 다니는 자칭 걷기의 달인이었다.
아이들을 어느 만큼 키우고 마음껏 여행하자고 둘은 다짐했다. 세월은 흘렀고 코로나 기간을 겪으며 체력의 질은 한심할 지경이 되었다. 짐을 최소화하라는 남편의 말에도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빗속의 고양이>와 장 그르니에의 <섬>과 마구 떠오를지 모를 영감을 기록할 노트를 슬쩍 끼워 넣었다. 노을을 보며 갑판 위에서, 러닝 하는 사람들이 있는 공원 벤치에서, 모모치 해변에서 읽고 쓸 생각이었다. 나는 작가이고 작가와 책은 너무도 잘 어울리니까. 그리고 살랄라 원피스 두 벌도 챙겨 넣었다. 예쁜 작가이고 싶으니까.
여행의 시작은 이랬다. 이른 아침 경기도 일산에서 지하철로 서울역에 가서 부산행 ktx를 탔다. 비 내리는 부산이었다. 허기진 배를 돼지국밥으로 채우고 환전 금액이 부족할 것 같다는 남편의 말에 트렁크를 끌고 배낭을 메고 우산을 들고 은행을 찾았다. 네이버 지도에 의지했다.
은행 일을 마치고 부산항으로 갔다. 수속을 마치고 대기시간을 지나 배에 올랐다. 뉴카멜리아호였다. 이층 침대, 탁자와 의자 그리고 텔레비전이 있는 개별 룸이었다. 비가 거세지면서 파도가 요동하기 시작했다. 짙푸르던 하늘이 금세 진한 먹향을 풍기는 먹색으로, 다시 흑색으로 변했다. 하나가 된 바다와 하늘을 마지막으로 보고 침대 아래 칸에 몸을 뉘었다. 머리 밑에서 바다의 출렁임이 또렷이 느껴졌다.
'자야 해. 너무 피곤해.'
출렁대는 파도의 움직임, 달리는 배의 엔진 소리에 잠시 뱃멀미를 걱정했다.
'지하철도, 자동차도 규칙적으로 소리를 내잖아. 그게 앞으로 나아간다는 뜻이지.'
나는 그 강렬한 움직임에서 어떤 규칙을 찾으려고 했다.
출렁 출~렁 출렁 추울~렁
"일어나. 도착 시간 됐어. 넌 파도가 그렇게 치는데 어쩜 그렇게 잘 자니, 나는 밤새 한숨도 못 잤는데."
조금은 다른, 아니 다르게 느낀 아침이 밝았다. 잠시 후 반가운 한자 몇 개가 섞인 일본어가 눈에 들어왔다. 일본 하카타항이었다. 신칸센을 타고 신오사카로 갔다. 다행히 기차역 바로 앞에 호텔이 있었다. 한 걸음이 아쉬운 형편에 반가웠다. 그래도 첫날이라서 의욕과 기력은 충만했다. 내게는 첫 일본 여행이었기에 먹고 싶은 것도 궁금한 것도 많았다. 편의점을 털며 빵순이가 일본 제빵 기술을 검증하고 유명하다는 도시락을 냉정하게 평가했다.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영어를 하는 분을 만나면 다행이었지만 아니어도 의사소통은 그런대로 됐다. 분위기와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는 남편은 매 끼니를 정했고 나는 가야 할 곳을 선정했다. 검색해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구글 지도에 의지해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신기하게 둘 중의 누구도 미리 전체 일정을 계획하지 않았다. 하나의 일정을 마치고 가는 차 안에서 대략의 다음 일정을 의논하면 그만이었다. 지친 다리를 쉴 겸 길가에 앉아 다음 일정을 정했다. 오고 가는 길이 다 여행이었다.
오사카에서 우메다 공중정원, 햅 파이브에서 대관람차를 타고 시내 구경을 하다가 상등 식당에서 카레를 먹고 도톤보리를 거닐다 발견한 허술하기 짝이 없는 술집에서 술잔을 기울였다. 아무도 모르는, 아는 사람만 아는 그런 곳에서 아는 사람 중 몇이 되었다. 비좁게 바짝 그러나 일정한 간격을 지킨 채 앉은 무리들, 자신의 술잔을 홀로 채우는 말 없는 그들과 시간과 공간을 나누었다.
교토로 가서 청수사, 산넨자카, 니넨자카 등 일대를 돌아다녔다. 아라시야마, 철학의 길에서 은각사로 끝간데 없이 이어진 길을 거닐며 used shop을 뒤적이고 허름한 음식점에서 찐 계란 하나를 사 먹었다. 개교일에 세웠을 법한 학교 교문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소학교, 수십 년은 됐을 법한 놀이 기구가 있는 놀이터에서 나의 어린 시절과 이제는 볼 수 없는 사라진 옛 것을 떠올렸다.
우리나라의 경주를 연상시키는 고도(古都) 교토에서 3일을 보냈다. 역 주변의 고층 빌딩 뒤로 작은 주택들이 작고 성실해 보였다. 작은 집에 작은 차, 몸집이 큰 사람이라면 도저히 들어갈 수 없을 작은 문, 작은 창이 난 집들이었다. 주택들이 눈에 익숙하고 그 집 내부를 들여다본 듯 잘 아는 것은 구글 지도를 잘 못 봐서 같은 길을 몇 번씩 오고 간 탓이었다.
여행에서 실수는 남는 게 있는 법이다.
잘 못 들어선 길을 되짚어 제 길을 찾으면 그곳의 장면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교토의 골목길에서 그랬고 하루의 일과를 마무리하며 찾았던 니시키 시장에서 그랬다. 번화한 시장 골목에 그렇게 고즈넉한 신사가 있는지, 그 신사의 담벼락 밑에 고양이 두 마리가 관광객들의 눈을 피해 숨어있는지 누가 알까. 몇 바퀴를 도는 사이에 시장은 문을 닫고 있었다. 늦게까지 남아 있을지 모를 가게를 찾았지만 이미 진열대를 들여놓느라 바빴다. 실망하는 남편에게 이곳에 발자국을 남겼으면 된 것 아니냐고 위로했다. 돌아오는 길, 마감 직전의 쇼핑몰에서 반값 떨이를 하는 도시락과 김초밥을 사서 숙소에서 먹었다. 저렴하게 배불리 먹을 수 있어 좋았다.
다음 날 눈을 떴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목이 찢어질 듯 아팠고 편도가 탁구공처럼 부은 것 같았다. 기껏 마데카솔과 대일밴드, 타이레놀이 비상약의 전부였다. 염증을 가라앉힐 항생제가 필요했다. 이제 시작인데 과연 끝까지 마무리할 수 있을지 잠순이가 잠이 오지 않았다.
'버티게 해주세요. 이겨내게 해주세요.'
저절로 기도가 터져 나왔다.
약국에 가서 증상을 말하고 검색해서 찾은 약을 보여주니 약사가 매장으로 나와 목에 좋은 약을 추천해 주었다. 이틀 치에 만 오천 원 정도였다. 비쌌다. 남편은 말을 못 하고 고개만 끄덕이는 내게 목에 뿌리는 스프레이 약과 마시는 자양강장제를 사주었다. 그 많은 약국에서 손수건은 찾지 못했다. 후쿠오카의 민속품을 파는 가게에서 겨우 손수건을 찾아 목에 맸다. 이런 안정감이라니!!! 손바닥만 한 손수건을 목에 두르니 목감기에 반은 나은 듯했다.
손을 잡고 같은 목적지를 향해 오래 걸었다. 소가 힘들까 봐 볏단을 대신 짊어진 농부처럼 옆 사람의 손과 발을 아꼈다. 감당해야 하는 제3의 대형 트렁크가 되지 않기 위해 처지는 발걸음을 추스렸다.
몸살이 겹치며 밤새 끙끙 앓았다. 우리는 일정을 조금 여유 있게 진행하기로 했다. 약을 한 번 더 사서 먹고 다음 날 교토의 옆 도시, 나라로 갔다. 동대사에 올라가 시내를 내려다 보고 나라공원에서 사람과 더불어 사는 사슴떼를 만났다. 마지막 장소인 사케 제조장으로 가는 길, 부부의 습관성 헤매기는 다시 시작됐다. 하지만 헤매기를 참 잘했다.
나라 공원에서 떨어진 외진 길을 걸으며 천국 가는 길을 떠올렸다. 축복받은 땅이 었다. 공원 안내 지도에 없는 사케 제조장에서 총 6잔의 다른 사케를 시음했다. 약을 먹는 나 대신 두 배로 마신 남편의 얼굴이 붉었다. 옆 테이블에서 사케를 맛본 서양 팀은 기분이 좋아져 문 앞에 세워진 깃발을 휘두르며 사진을 찍었다. 술의 힘이라니.
교토 인근 소도시인 구마모토에서 하루를 보내고 마지막 방문지인 나라로 갔다. 두 시간 남짓 걸리는 고속버스 안에서 깊은 잠에 빠졌고 다행히 목감기는 하향곡선을 탔다. 약의 힘인지, 손수건의 힘인지 몸과 마음이 한층 가벼워졌다. 후쿠오카에서 오호리 공원, 모모치 해변, 후쿠오카 타워를 거쳐 숙소로 돌아왔다. 마지막 날에는 유후인에서 온천을 하고 주변 호수를 산책했다. 사람들이 줄을 서서 먹는 맛집이 아닌 부부가 느릿하게 요리하는 작은 가게에서 500엔짜리 치킨덴부라를 주문했다. 남편과 나는 길모퉁이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종이컵 두 개에 담긴 치킨덴부라를 순삭 했다. 일본에서 먹은 맛있는 음식 탑 5위 안에 든다고 극찬을 하면서.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왼쪽으로 갈지, 오른쪽으로 갈지를 갈등했다. 누군가의 결정을 따랐고 그 결정은 틀린 경우가 많았다. 남편은 내가 힘들어하니 '여기 있으라고. 발자국 수가 줄어드는지 보고 오겠다고'했다. 올바른 길로 가면 구글 앱에 그려진 발자국 수가 줄고 틀린 길로 가면 목적지에서 멀어지니 몸소 검증해 보고 오겠다는 이야기였다. 안쓰러웠다. 부부는 그런 존재인가 보다. 아프다고 끙끙대는 부인을 데리고 고집은 세서 사람들에게 묻기보다 기계와 승률 없는 싸움을 하는 남편이 그랬다. 나는 남편이 방향을 확인하러 간 사이에 지나가는 사람에게 길을 물었다. 한 마디면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다. 헐레벌떡 애매하다는 표정으로 돌아오는 남편에게 나는 길을 안내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 하카타 항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검색어가 문제였다. 국내선 전용 항구에서 잘 못 내린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헤매야 했다. 국제선 대합실은 정 반대 방향에 있어서 택시를 타야 한단다. 우리는 충분히 남은 시간과 그동안 다진 기초체력을 바탕으로 걸었다. 그 정도쯤이야. 트렁크를 끌고 배낭을 메고 하카타항을 반바퀴 돌아 국제항으로 갔다.
산 넘고 물 건너 도착한 부산항에서 ktx를 타고 자정 무렵 서울역에 닿았다. 챙겨간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빗속의 고양이>와 장 그르니에의 <섬>를 읽고 여행 중 떠오르는 영감을 노트에 남겼을까. 살랄라 원피스를 입고 해변을 걸었을까. 트렁크 밑바닥에 짓눌려 그곳에서 주인의 쾌유만을 바랐겠지. 끙끙 앓으며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실눈을 뜨고 바라본 광경을 마음 속에 오래 간직할게. 그러니 괜찮아. 여행으로 다져진 부부의 의리는 과연 오~~래 갈까.
무사히 도착한 남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으르렁
부인이 대답했다, 으르렁
우리는 어느새 예전의 부부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