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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Sep 07. 2020

나의 자유로운 날들

어떻게 프리랜서가 됐냐고 물으신다면

짤랑.

한 달에 몇 번쯤, 통장 잔고를 확인할 때 어디선가 ‘짤랑’ 하고 반가운 소리가 들린다. 입에선 절로 ‘야호’ 소리가 나온다. 비정기적으로 들어오는 이 돈은 당연히 받아야 할 돈인데도 마냥 즐겁다. 일단 돈이 생기면 맛있는 것을 사먹고, 못 가본 곳을 여행할 여지도 생기니까 그저 반가운 고료 받는 날이다.


오늘은 고료, 그러니까 급여가 들어오는 횟수에 대해 생각해봤다. 한 달에 한 번, 통장에 원 단위로 찍힌 월급에 과거의 나는 얼마나 목말라했던가. 나도 몇 해 전까지는 한 달에 한 번 월급을 받았다. 이제는 한 달에 몇 번이고 일한 만큼, 혹은 일한 횟수에 따라 약간의 세금을 제한 돈이 입금된다.


어느 쪽의 액수가 더 많은가로 만족감을 비교하기엔 대상 이 전혀 다르다. 하고 싶은 일과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섞어 찌개나 비빔밥처럼 한데 모아 내 이름으로 달아놓고 닥치는 대로 해치우던 회사생활과, 그 액수가 얼마든 하고 싶은 일을 한 만큼 정직하게 받는 지금의 프리랜서 생활은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다.


내 직업은 프리랜서 작가 겸 기자다. 여기서 업무형태가 프리랜서다. 보통 공공기관이나 기업, NGO 등의 일을 맡 아 하는데,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형식에 맞춰 글을 쓰는 일이라 작가로 불리기도, 취재가 빈번하게 진행되니 기자로 불리기도 한다. 적게는 두세 군데, 많게는 다섯 군데 정도의 클라이언트와 일을 진행한다. 단기 프로젝트가 들어오면 프로젝트를 마치고도 일을 쉬지 않기 위해 더 많은 곳에서 일감을 받는다. 대응해야 할 클라이언트가 그만큼 늘어난다는 뜻이다.


이렇다 보니 사업자등록까진 필요 없지만 내 자신이 하나의 회사처럼, 가끔은 글 쓰는 흥신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쨌든 클라이언트로부터 돈을 받아 글을 쓰고, 해당 기업이나 기관의 패턴에 맞춰 일을 진행하니 반절의 직장인이긴 하다. 출퇴근하지 않고 일을 하는 직장인이다.

프리랜서 생활은 올해로 5년째다. 대학 졸업 후 기자로 일하며 취재와 기사 작성으로 눈코 뜰 새 없이 지냈다. 그래도 좋았다. 워낙 하고 싶은 일이었고, 오래도록 동경했던 언론 계에 내 자리와 명함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행복했다. 나를 비롯한 기자들에겐 취재 경험과 기사가 재산이었다. 이 재산은 당장 입금되지는 않아도 가슴속에 켜켜이 쌓이는 게 확실히 느껴졌다.


하지만 그 시절은 종이신문과 온라인 뉴스 사이에서 종이 신문을 유지하느냐 마느냐로 대세와 실랑이하던 때였다. 대부분의 언론사들은 재정적으로 어려웠다. 내가 다니던 신문사는 월급이 밀렸다. 한 달에 십만 원, 이십만 원씩 쪼개가며 돈을 입금하더니 퇴사할 무렵엔 이미 몇백의 급여가 밀린 상태였다. 다른 언론사로 이직을 고려했지만 귀동냥으로 들은 소식에 따르면 힘들기는 다른 언론사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졸업 후 스스로 벌어먹는 생활이 너무 당연한 상태였다. 그렇다 보니 밀린 월급에 까딱하면 교통카드며 핸드폰 요금이 연체되어 똑 끊겨버리기 직전이었다. 회사가 어려워지면 개인의 삶도 어려워지는 연결고리가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결국 나는 그토록 좋아하던 언론사 생활을 털고 다른 세계로 넘어왔다.


새로 취직한 곳은 프랜차이즈 기업의 마케팅팀이었다. 마케팅의 ‘마’ 자도 모르는 나였지만 기자 경력과 글쓰기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운 좋게 취직되었다. 주로 언론홍보를 담 당하고, 사람들에게 보여줄 스토리텔링 콘텐츠를 만드는 일을 했다. 다시 글을 써서 스스로 벌어먹기 시작한 것이다. 업무는 조금씩 늘었고, 나중에는 일하는 시간만큼 공부도 해가며 마케터로 성장해갔다.


그런데 마케팅을 해본 이들이라면 알 것이다. 새로 나오는 매체와 홍보 방식은 차고 넘치는데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매번 숫자로 매겨지는 실적을 내기 위해 마케터들이 얼마나 피가 말라가는지. 이렇게 9년간 쌓여가는 회사생활에서 종종 의문이 일었다.

‘만약 내가 직업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회사라는 틀을 빼 고 시작했다면 어땠을까?’

‘정말 회사라는 도착지가 필수였을까?’

어쩌면 사회생활의 시작점에서 ‘직업’을 고민하지 않고 ‘취업’을 고민하던 단계로 다시 돌아가야 하지 않나 싶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부터 내 관심사는 진로, 미래, 직업 이 아닌 ‘취업’이었다. 언제나 독립, 직업이라는 단어보다 취업을 우선순위에 두곤 했다. 다니던 대학에서는 ‘취업이 잘 되는 학과’가 인기였다.


어쨌든 취업이 우선시 되는 분위기에서 나는 휩쓸리듯이 취업을 준비했다. 졸업 전에 몇 가지 컴퓨터 자격증을 따고 토익 학원을 다녔다. 마지막 학기에는 늘 노란색으로 염색했던 머리를 얌전한 색으로 물들이고, 독하게 다이어트도 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취업’이 목표가 되었다.


아마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에게 취업과 회사는 당연한 삶의 방식, 직업의 큰 틀로 인식되어 있을 것이다. 나 역시 대학 졸업 이후에 회사생활이 너무나 당연했기에 별다른 고민 없이 취업을 준비했다. 회사라는 조직에 들어가는 것 외에 딱히 할 일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 당연함에 한 번도 반기를 들지 못했기에 졸업 후 9년 동안 조직 안에서 차고 치이면서 살았다.


가장 싫었던 건 역시 사내 정치였다. 몇 되지도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라인’이란 것을 만들어 무리를 짓는다. 모두와 친하게 지내야 했기에 싫은 소리도 참고 착한 척하며 고통을 감내했다. 혹여 아프기라도 하면 난리도 아니었다. 언젠 가 회사 상사가 내게 “아파 죽을 것 같으면 회사 와서 죽어라.”라고 했을 때 시원하게 반박도 못 했다. 그렇게 나는 회사에 다니기 위해 인생을 더럽히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프리랜서로 전환한 계기는 마케터로 일한 지 5년 차에 들어선 무렵이었다. 매일같이 하는 야근과 그놈의 라인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 이직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직을 염두에 둔 곳은 인지도가 높고 규모가 큰 기업이었다. 집에서 좀 멀긴 했어도 근무환경이 상당히 좋은 곳이었다. 북악산이 병풍처럼 둘러싼 사무실 풍경, 언제든 질 좋은 아메리카노를 마실 수 있는 카페테리아, 현 직장에 비해 높은 연봉, 면접 시 마주친 이들의 고급스러운 차림새와 행동거지, 하나같이 다 마음에 드는 구석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구석들 사이에서 흐릿하게 의문을 품었다.

‘이직만 하면 즐겁게 살 수 있을까?’


그 의문은 나를 며칠간 말없이 고민에 빠뜨렸다. 현재 다니는 회사가 문제인 건지, 내가 회사생활을 버티듯 다니고 있는 게 문제인 건지 헷갈렸다. 어느 회사를 가든 라인이란 존재하고, 아플 때 눈치 보며 병원을 가야 하는 건 다를 바 없었다. 어딜 가나 꽉 막힌 상사도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아침저녁으로 부대끼는 전철에 몸을 실어야 하고, 그 안에는 남의 몸을 대놓고 훑어보는 기분 나쁜 인간들도 허다했다.


저녁 6시가 되면 당연한 퇴근시간인데도 눈치를 보며 겨우 가방을 싸는 생활이 다시 이어지는 게 나를 즐겁게 할까? 일단 이직만 한다면 나는 더 많은 돈을 모으고, 더 멋진 일을 하며, 후배들로부터 존경받는 상사가 될 수 있을까? 이 의문에 나는 긍정적으로 답할 수 없었다.


그 멋진 회사는 면접에서 나를 통과시켰다. 얼마 후 합격을 통보하는 전화가 왔다. 전화 속 목소리는 냉정하면서도 예의를 갖춘 자세로 내게 입사에 필요한 사항들을 안내했다. 나는 죄송하지만 입사를 하지 않겠다고 답했다. 전화 속 목소리가 깜짝 놀라 내게 물었다.

“저희보다 더 좋은 회사에 합격한 건가요?”


거기서 차마 ‘회사 자체를 다니지 않겠다.’라는 포부를 말할 순 없었다. 아마 나를 생활력 없는 룸펜 정도로 보거나 재미삼아 면접이나 본 여자로 생각할 것 같았다. 그래서 엉뚱한 거짓말로 답을 하고 말았다.

“지금 회사에 남기로 했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저보다 좋은 직원 만나시길 바랄게요.”


그 대답과 달리 며칠 뒤 나는 다니던 회사에서 짐을 쌌다. 그렇게 싫었던 회사에 갖다 놓은 잔짐은 왜 이리 많은지 커 다란 박스에 담아 택배로 집에 부쳤다. 그때 내 나이 서른넷이었다. 사정을 잘 모르는 주변 사람들은 조금만 더 참아보라며 퇴사를 말렸지만, 나는 기어코 회사라는 구조에서 빠져나와 자유로운 노동자 신분으로 옮겨왔다.


물론 프리랜서를 시작한다는 건 아주 즐겁고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회사를 그만두고 ‘프리선언’을 할 무렵은 불면증과 초조함으로 늘 긴장된 상태였다. ‘나를 찾는 곳이 없으면 어쩌나.’ ‘애매한 나이에 일을 그만뒀으니 재취직을 하고 싶어도 못 하면 어떻게 될까?’ 이런 상상이 나를 떨게 했다.


하지만 여러 번 생각해봐도 고통스러운 회사생활과 이직을 앞두고 나는 같은 선택을 했을 거라 예상한다. 그렇게 불안한 시간을 잠시 견디고 나니 프리랜서로 일하는 매 순간이 내게 는 꼭 맞는 편안함이다. 회사 갈 생각에 일요일 저녁이면 짜증이 폭발하고, 금요일 밤이면 스트레스에 폭식을 하며, 밤늦게 돌아와 허둥대며 밥을 먹던 나는 이제 없다. 아침 일찍 일어나 하루를 길게 쓸 줄 알고, 아플 땐 마음 편히 아파도 된다는 당연한 사실도 프리랜서가 된 이후에 배웠다. 남편과 매일 건강한 음 식으로 저녁을 함께 먹는 즐거움은 프리랜서가 된 이후 가장 만족스러운 부분이다.


회사가 없다면 취직도, 직업도 상상 못 하던 시절의 나는 이제 일한 만큼 오롯이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는 프리 랜서로서의 내가 되었다. 좋고 나쁜 점이야 어느 직업이나 수두룩하니 회사생활과 프리랜서 생활의 경중을 따지는 건 의미가 없다.


하지만 지금 ‘회사’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목이 메고, 가슴속에 뜨거운 두부가 얹혀 있는 기분이 든다면 회사라는 네모 밖을 상상해보는 게 새로운 계기가 될 수 있다. 이 시대를 사는 방식이 오로지 ‘회사원’ 하나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기만 해도 우리는 꽤 괜찮게 살 수 있다.


* 이 글은 지난 1월 출간한 <프리랜서지만 잘 먹고 잘 삽니다>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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