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귀리밥 Sep 14. 2020

마음껏 아프기

우리는 마음껏 아플 자유가 있다

가끔 페이스북을 보면 ‘추억 더 돌아보기’라는 기기괴괴 한 기능이 상단에 떠 있다. 고작 추억 좀 돌아보겠다는데, 몇 해 전 오늘 날짜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돌아보겠다는데 기기괴괴할 게 뭐 있겠냐 싶을 수도 있지만 나는 그 기능을 눌러 지난날을 돌아보는 게 너무 오글거리고 두렵다. 중학생도 아닌 20대 성인이었으면서 왜 중2병 중증 환자처럼 오만 감상에 빠져 페이스북에 글을 올리고, 예쁜 척 귀여운 척 사진을 찍어 올렸는지 과거의 나를 잡아 호되게 때려주고 싶을 정도다.


한 번씩 페이스북에 들어가 보면 어김없이 ‘추억 더 돌아보기’가 그날의 과거 게시물을 보여준다. 한창 페이스북이 유행일 때 열심히 글을 남긴 덕에 들어갈 때마다 돌아볼 추억이 산더미다. 지금의 내가 페이스북에 들어갈 때마다 하는 일은 ‘추억 더 돌아보기’를 눌러 과거의 오늘을 살펴보며 부끄러운 게시물을 지우는 거다. 들어갈 때마다 지울 게시물이 계속 뜨는 걸 보면 과거의 나는 마치 다른 사람 같다.


그런데 부끄러움 사이로 안쓰러운 게시물이 보인다. 과거의 나는 가끔 우울하고, 세상에 오로지 혼자라는 느낌 때문에 슬픈 날이 많았나 보다. 친구로부터 속을 할퀴듯 아픈 말을 듣고, 지켜내지 못할 다짐을 늘어놓고, 본래 성격과 달리 선량하고 조심스러운 사람을 흉내내는 게시물도 있다. 사랑에 실패하고 연애가 끝났을 때의 게시물은 안쓰러움을 넘어 이 처절한 시기를 어떻게 생존해낸 걸까, 자신에게 감탄할 정도다.

“오늘을 살았고 내일을 살 수 있어서, 힘들긴 해도 역시 살아보니 좋은 게 삶이구나.”

“물건, 편지 다 돌려주고, 사진 다 지웠는데 꽃같이 예쁘다는 말은 진짜 너무하네.”

“너랑은 이별도 아니고 사별이야, 사별.”


이런 문장들이 과거의 오늘에 뭉클거렸다. 그 시절 나는 얼마나 힘들었던 걸까. 세상에 편한 이별 같은 건 없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오늘을 견디면 내일이 온다는 그 단순한 흐름에서 살아보니 좋다는 결론을 지었을까, 얼마나 힘들었으면 받은 걸 다 돌려주는 철없는 짓을 했을까, 상대가 얼마나 지독하게 이별의 아픔을 줬으면 사별이라고 쓴 걸까. 과거의 내가 나이 어린 타인처럼 마음속에 밀려온다. 그리고 생각해봤다. 이 지독한 이별과 우울을 겪을 때 나는 어디에 있었는지. 그곳은 다름 아닌 회사였다.


졸업 후 9년간 회사생활을 했다. 학교 다닐 때 개근상을 안 받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굴었듯이 회사에서도 지각, 조퇴, 결근은 상상할 수 없었다. 이별을 겪고 감내했던 20대부터 30대 초반까지 내내 회사를 다녔다. 하지만 개인의 이별과 슬픔을 회사가 알아줄 리 없다. 회사는 오로지 일하기 위한 공간일 뿐, 그 안에서 톱니바퀴처럼 굴러야 할 직원의 감정을 알아줄 의무는 없으니 말이다.


오래전 이별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헤어진 다음 날 회사에 가는 건 너무나 가혹했다. 이별의 사유가 누구에게 있든, 누가 차고 누가 차였든 그런 건 상관없었다. 이별을 통보한 쪽이 더 아플지, 통보받은 쪽이 더 고통스러울지 아무도 모른다.


그렇게 헤어진 다음 날 정해진 출근시간에 회사 건물에 들어와 책상을 정리하고 일을 시작한다. 입맛은 저 멀리 달아났어도 사람들 눈에 튀지 않으려면 밥은 먹어야 한다. 언젠가 입맛이 없어 식사를 걸렀더니 푼수 같은 선배가 “남자 친구랑 헤어졌어?” “남자 친구가 헤어지재?” 이런 말로 깐족거려 분통이 터진 적이 있었다.


이별 후 비극적으로 두근거리는 가운데 업무가 잘 풀릴 리가 없다. 머릿속이 혼곤하고 온 세상이 슬픔으로 꽉 차있는데 공과 사를 어찌 구분하겠나. 생각지 못하게 감정이 밀려와 눈물이 잠깐 났어도 애꿎은 코를 풀며 감기 걸린 척하는 게 최선이었다. 살아오며 겪은 수많은 아픔과 이별을 회사생활과 어떻게 병행했는지 지금 생각해봐도 신기할 따름이다.


이별이 아니더라도 회사에서 하루를 버티기 어려운 날들이 있다. 언젠가 몸이 너무 아파서 회사에 전화를 걸어 쉬고 싶다고 말했더니 부서장이 “회사에 와서 아픈 걸 증명해.”라고 했다. 너무 억울했지만 택시로 회사 건물에 도착해 거의 기다시피 사무실에 도착했더니 “아파 죽을 것 같아도 회사에 와서 죽어야 한다.”라며 병원에 다녀와서 근무하라고 선심 쓰듯 말한 부서장의 뻔뻔한 얼굴을, 난 아직도 잊지 못한다.


한 번은 집을 나서 회사로 오는 길에 원피스 뒷면이 터져 속옷이 훤히 비치는 걸 알았다. 그것도 곁을 지나던 행인이 알려준 덕에 겨우 알았다. 부서장에게 전화해 사정을 설명하고 집에서 옷을 갈아입고 오겠다고 했다. 부서장의 답은 “회사에 와서 옷이 터진 걸 증명해.”라는 거였다. 누가 볼세라 핸드백으로 엉덩이를 가리고 회사에 도착해서도 몸을 벽 면에 붙이고 겨우 사무실에 도착했다. 부서장은(다행히 여자였다) 내 옷이 터진 걸 확인하더니 그제야 “집에 다녀와.”라고 허가했다. 그러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그래도 내 덕에 지각은 면했잖아?”


이런 일은 회사생활에서 빈번했다. 기가 차는 일화들이 나열하기도 버거울 정도로 숱하게 일어났다. ‘경력’을 쌓기 위해 버티는 동안 나는 몸이 부서지게 아픈 날도, 지독한 피로가 암 덩어리처럼 번지는 날도, 남자 친구와 헤어져 세상이 흑백으로 보이는 날도 회사에 나갔다. 그렇게 출근하면 내 아픔과 슬픔은 회사에서 아무것도 아니었다. 회사에서 개인의 고통을 드러내면 공과 사를 구분 못 하는 바보 취급을 당하기 십상이었다.

몸이 아플 때 꾸역꾸역 출근하는 것보다 고통스러운 건 슬픔이 감당되지 않을 때였다. 연애가 끝난 다음날 아침부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웃는 얼굴로 출근해 인사를 하고 명랑하게 행동해야 했다. 가족들과 지독하게 싸우고 마음에 돌덩이가 들어앉은 듯 무거워도 회사에서는 평범한 가정사를 가진 사람처럼 굴어야 했다. 친했던 누군가의 부고를 듣고 그 슬픔을 감내하는 시간에도 회의에 참석하고 전화를 받고 미팅을 진행하며 맡은 바를 해치워야 했다. 그렇게 주말을 제외한 모든 날은 내가 아프거나 실연을 당하면 안 되는 날이었다.


하지만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가혹하다. 연료를 넣어 가동하는 로봇이 아닌 이상 우리는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하고, 친구가 생겨 우정을 나누고, 더러 예기치 못한 슬픔을 맞이하고, 슬픔을 이겨내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게 사람이다. 사람은 본래 그리 산다. 하지만 회사는 그런 겨를을 인정하지 않는다. 늘 발랄하고 활달하게 회사의 모든 요구에 ‘예스(Yes)’로 답하길 바란다. 그 시절 나는 그 요구를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을 소중히 여기지 못한 채 회사를 다녔다.


프리랜서가 되면서 좋은 점이 뭐냐고 묻는 이들이 많다. 장단점이 참 많은데, 가장 좋은 점은 마음껏 아파도 된다는 거다. 슬플 때 꺼이꺼이 울 수 있고, 기분이 좋으면 신나는 음악을 들으며 일할 수 있다. 몸이 아파도 회사 다닐 때처럼 점심시간에 밥을 거르고 숨 막힐 듯 뛰어 병원에 다녀오거나 윗사람 눈치를 볼 일이 없다. 언제든 병원에 가서 상한 건강을 치료하면 된다. 옷이 터지면 누구에게 양해를 구할 필요 없이 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으면 된다. 우울하면 냉장고를 열어 달콤한 것을 꺼내 먹고, 억지로 웃으며 일하지 않아도 된다. 감정이 맑아질 때까지 휴식도 취할 수 있다. 세상사가 버거우면 집 밖에 나가지 않고 서재에 틀어박혀 일해도 누가 뭐라 하지 않는다.


아픔을 감당하는 데는 수많은 에너지가 소모된다. 그 아픔을 감추고 괜찮은 척, 명랑한 척하지 않고 마음껏 아파도 된다는 그 당연한 사실을 프리랜서가 된 후에야 제대로 배웠다.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정규직을 포기하고 프리랜서가 되는 것만으로도 그중 하나를 달성할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하지 아니한가.


* 이 글은 지난 1월 출간한 <프리랜서지만 잘 먹고 잘 삽니다>의 일부입니다.

이전 03화 프리랜서의 일과가 궁금하다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