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가닉씨 Sep 08. 2021

마음 한 바퀴

ep75. 케이지(Kei.G) - Black Gold



  발갛게  능소화를 발견하고 걷던 길을 틀어 휴대폰을 꺼내는 중년 여성을 보면서, 나이가 들면 꽃을 좋아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떠올려본다.  앞을 지나는 가족 무리에서  발짝 떨어진 남자를 뒤따라 걷던 어린 딸은, 과연  해가 지나서야 그의  처진 어깨를 보게 될까. 나무와  사이로 흐릿하게 보이는 커플,  뼘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가까운 그들을 보니 웃음도 났다. 괜한 오지랖에 스스로도 어찌나 민망한지 고개를 세게 저었다.

  터덜터덜. 당장 이 길을 따라 가면 크고 넓은 공원 한 바퀴를 돌 수 있을까. 그러지 않는다 한들 그 누구도 채근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어설픈 책임감에 괜히 목표만 더 또렷해진다. 어찌 됐든 공원에 들어섰으니 어느 길로 가든 삼사십 분 후에는 다시 이곳(지금 원점이라고 생각하는)을 지나긴 해야겠다.


  아닌 척해도 우리는 서로에게 관심이 많다. 좀 전에 마주친 그녀처럼 나도 휴대폰을 꺼내 이름 모를 꽃을 찍어본다. 다시는 볼 생각이 없다면서 간밤에 꿈에서 만난, 지금은 소원해진 친구와의 옛 추억도 떠올려 본다. 근래 쓴 나의 문장에 대해서도 생각해봤다. 문장이 짧아졌다. 호흡도 감정도 단순했다. 따뜻하기보단 따뜻한 척에 가까운 낱말이 줄지어 있을 뿐이다. 슬프고 화나고 서글프고 허하고 외롭지도 않은 싱거운 문장이 말이다. 나름 기승전결이 있긴 한데, 나쁜 놈은 벌을 받고 착한 놈은 복을 받는다는 식의 당연한 것들이다. 귓가에 흐르는 가삿말은 허공에 흩어질 뿐 더 이상 나를 위한 게 아니었다. 행여 웃음이 드러나지 않을까 싶어 마스크 속 나는 입가가 아프도록 활짝 웃었다. 이 넓은 공원 한 바퀴를 도는 동안에도, 도리질을 하느라 바쁜 내 두 눈은 나에게 따뜻한 눈길 한 번을 주지 않는다.


  터덜터덜. 공원 두 바퀴째. 찔끔 눈물이 터졌다. 그 와중에 내쪽으로 돌진하는 마스크 속 행인의 표정을 상상하며 그들의 말을 엿듣고 짐작한다. 몇 차례 이를 반복하다가 상상력이 풍부한 나에게 이보다 흥미로운 일도 없다는 사실도 새삼스레 깨닫는다. 갖은 생각이 꼬리를 물고 또 물수록 나는 더욱더 깊숙한 길을 찾아 걸었다. 이런! 이 큰 공원을 두 바퀴째 걸어도 나는 여전히 내가 안중에 없다.



나는 더욱더 깊숙한 길을 찾아 걸었다


  갑자기 세찬 빗줄기가 쏟아졌다. 다행인지 불행 인지 찔금거리던 눈물이 빗물에 씻겨 내려갔다. 풀내음도 짙어졌다. 갑자기 떨어지는 빗줄기라는 게 이리 좋기도 하구나, 이 더위에 건조하게 말라버린 나무와 풀과 꽃에겐 그야말로 단비가 따로 없구나, 빗물에 못 이겨 고요한 호수에 일렁이는 파동은 이들도 계속 흐른다는 외침이구나, 짧은 문장에도 서사가 있구나, 하면서 문득 그간 왜 그렇게 문장에 무거운 추를 달고 싶어 했는지 깨달았다. 가볍게 흩어지기 싫어서였다.


  결국 그 추는 온몸의 장기를 짓눌러 버렸다. 괴로운 장기는 나를 보아달라고 아껴달라고 몇 차례 사인을 보냈지만 나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타인을 의식해 나를 완전히 보지 못한 것을 그저 약 몇 알로 진정시켜 보려다 된통 당했다. 지난 1년은 정말이지 앞만 보고 달렸다. 남들은 이보다 더 독하게 한다니까 꿈에서도 빵을 구울 수밖에 없었다. 어깨를 누르는 고통쯤은 몸을 많이 쓰니까 당연한 것이라 여겼다. 깊이 잠들지 못하는 밤도 그러려니 했다. 녹초가 되어 집에 오면 아무거나 마시고 욱여넣었다. 아무리 그렇게 해도 아무 말이 없는 날 보면서 정말 괜찮은 줄 알았다. 역시 뭉툭한 끝은 없다. 모서리는 날카롭다. 뜨거운 여름이 식고 나서야 차가워진 나를 보았다.


  악바리 기질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내가, 악바리가 되어야만 해서 참 가여웠다. 역시 악바리는 악바리만 될 수 있는 것이리라.


  곪지 말자. 굶지 말자.


  오로지 두 문장만을 떠올렸다. 나에게, 그동안 돌보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사과를 어렵사리 전하고 나니 공원을 세 바퀴 째 돌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제야 나는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번 수플레 선곡은 ‘케이지(Kei.G) - Black Gold

‘입니다. 케이지는 플라네타리움 레코즈 소속 아티스트인데요. 이 노래가 수록된 planeterium case#2 앨범 전체가 정말 명반입니다ㅠㅠ 알앤비, 소울, 힙합 빠질 게 없는 잔칫집 같아요. 그중 이 곡은 특히 가사와 멜로디가 너무 좋아요. 오로지 ‘나’를 향해 부르는, 세상의 모든 위대한 ‘나’를 위한 노래입니다!






'수요일의 플레이리스트(줄여서 수플레)'는 여섯 명의 브런치 작가가 매주 수요일마다 본인의 에세이가 담긴 음악을 소개하는 읽고 쓰는 라디오입니다. 잠들기 전 이름 모를 누군가가 추천해주는 노래를 듣고 싶으셨던 분들, 즐겨 듣는 노래에 다른 누군가는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궁금해본 적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매주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주시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음악에 조예가 깊거나 전문적으로 음악에 대해서 잘 아는 '음. 잘. 알'들은 아닙니다. 그저 음악을 좋아하고 혼자만 듣기엔 아까운 나의 플레이리스트를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들일 뿐이죠. 비가 오는 날엔 비 오는 날 듣기 좋은 음악을, 너무 추워서 어딘가에 숨고 싶을 땐 숨어 듣기 좋은 음악을 한 편의 글과 함께 나눠보려고 합니다. 글에 담긴 노래를 들으며 천천히 읽어 내려가시길 추천드립니다.


구독과 공감, 댓글은 더 좋은 매거진을 위한 원동력이 됩니다. 매주 수요일 '수플레'를 기다려주세요!


(비슷한 감성의 음악 공유도 환영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