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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화 Dec 12. 2017

파리에 가면 매일 ㅍㅍㅅㅅ를 할 줄 알았다

일주일간의 파리-런던 여행기 

파리에 가면 매일 저녁 ㅍㅍㅅㅅ를 할 줄 알았다. 이게 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 때문이다.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두 남녀가 도시의 골목을 종일 쏘다니며 얘기하다가, 새벽에 달빛 가득한 공원에서 섹스하는 이 영화를 본 것은 중1 때의 일이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체크무늬 셔츠였다. 줄리 델피가 허리에 두르고 다니던 셔츠를 담요 삼아 깔고 눕는 장면이 그렇게 로맨틱할 수 없었다. 우연인 듯하지만 와인이며 달빛, 에단 호크의 단단한 눈빛까지 모든 게 마술처럼 준비된 섹스. 나는 파리에 가기만 하면 그 모든 일들이 내게도 일어날 걸로 믿었다.(실제로 이 영화의 배경은 비엔나지만 오랫동안 파리로 알고 있었다.)

                         

줄리델피의 셔츠는 깔고 눕기에 매우 용이했던 것이다..


16년이 흐른 뒤, 남편과 파리 행 비행기에 올랐다. 에펠탑, 뤽상부르 공원, 보주 공원, 센 강 둔치까지 우리의 일정에는 유난히 공원이 많았다. 캐리어에는 줄리 델피의 셔츠를 닮은 체크무늬 담요도 들어 있었다. 마침 생리도 그 전 주에 끝났다. 만세! 우연인 듯하지만 모든 것이 준비(라 쓰고 계획이라 읽는다)된 이 여행에서 나는 연애 시절의 달콤한 밤을 되살릴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도착한 첫날, 섹스는커녕 눕자마자 곯아떨어졌다. 미친 일정 때문이다. 장시간 비행에 지친 데다 시차도 있었으니, 그날은 숙소 근처나 돌아보고 잠을 푹 자는 게 나았을 것이다. 자유여행이니 충분히 가능한 선택지였다. 하지만 나는 자기계발의 화신이자 동방에서 온 의지의 한국인이다. 오기 전에 블로그를 좀 뒤져보니 다들 엄청나게 많은 곳들을 다녀왔다고 자랑하고 있었다. 질 수 없다. 다시는 프랑스에 못 올 텐데, 뽕 뽑고 말겠다! 하는 마음으로 보름 간의 불꽃 써치 후, 다음과 같은 일정을 짰다. 

 

서울로 치자면 이런 일정이다. 16시간 비행 후에 숙소에 짐 풀고 나와서 3시간 안에 광화문 광장 들렀다가 경복궁 가로질러 청와대 앞에서 사진 찍고 밥 먹기 미션을 완료한 다음, 홍대 유명한 커피숍가서 티타임 즐겨주고, 합정에 있는 숙소로 돌아와서 좀 쉰다. 그러고 다시 여의도 가서 저녁 먹고 63빌딩 구경한 다음 한강에서 유람선 한 바퀴 타 주고 저녁 9시까지 집에 귀가한다. 심지어 한국어도, 길도 모르는 외국인이 오로지 대중교통만을 이용해 이 미션을 완수한다고 상상해 보라. 아무리 걷기 좋아하는 줄리 델피와 에단 호크라도 이 정도면 중간에 택시 타고 숙소로 돌아갔을 것이다. 


애초에 무리한 일정이었다. 실제로 계획했던 것의 절반밖에 소화하지 못했다. 그럼 그냥 그렇구나 받아들이고, 다음 날부터는 목적지를 줄여 여유롭게 다녔으면 될 일이다. 계획대로 움직이지 못했다는 불안감에 휩싸인 나는 다음과 같은 결정을 하고 만다. 지금이라도 여행 계획을 좀 더 촘촘히 세우자! 남들처럼 많은 곳을 가기 위해 더 열심히 노력하자! 저녁 11시가 다 되어서 숙소에 돌아온 나는 눈이 빠져라 구글지도를 검색하며 어떻게 하면 동선을 효율적으로 짜서 모든 목적지를 갈 수 있을지 연구했다. 그렇게 파리에 온 첫날, 한국에서와 다름없이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다 잠들었다.

   

화요일, 비몽사몽한 정신에 모닝섹스를 했다. 뭐, 나쁘지 않았다. 헤헤. 아침을 여유 있게 보냈더니 일정이 뒤로 쭉쭉 밀리기 시작했다. 문제는 저녁에 재즈클럽에서 열리는 공연이었다. 이날 가장 기대한 일정이니만큼, 제 시간에 맞춰 도착하고 싶었다. 그런데 버스가 내려야 할 정류장을 무정차로 통과해 버리는 게 아닌가. 돌고 돌아 재즈클럽 가까운 지하철역에 내렸다. 마음은 초조하지 밤이라 길은 안 보이지, 구글맵을 들고 30분 넘게 골목을 헤매고 다녔다. 그러는 사이에 보고 싶었던 뮤지션의 공연은 끝나버렸다. 마지막 타임 뮤지션의 공연도 한창 진행 중이었다. 


그 순간 갑자기 모든 게 자신이 없어졌다. 나는 도대체 프랑스에 왜 왔지? 뭘 위해서 이렇게 동동거리고 다니는 걸까! 풀썩 주저앉아 다 망했다고, 길도 못 찾겠고, 공연도 못 볼 거라고 울면서 지랄발광을 해댔다. 놀란 남편이 뛰어다니다가 결국 그 클럽을 찾아냈다. 지척에 있었는데 입구를 못 찾아서 빙빙 헤맨 것이다. 공연이 30분이나 지난 터라, 입장료는 절반밖에 받지 않았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파리에서 두 번째로 유명하다는 재즈클럽 ‘선셋 선사이드’


울먹함과 안도감이 뒤섞인 채 공연장에 들어섰다. 시원한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자 방금 전 일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재즈의 선율에 빨려들었다. 빠른 듯하면서 느리고, 엇박 같으면서도 묘하게 박자가 맞아떨어졌다. 불균형 속의 아름다운 균형. 색소폰이 미끄러지면 피아노가 중심을 잡아주었고, 드럼이 탈주할라 치면 첼로가 묵직함을 더해주었다. 호흡을 오래 맞춘 팀 같았다. 내 속도와 타인의 속도를 알기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이리라. 


그중에서도 나는 특히 드러머가 쏟아내는 리듬을 따라갔다. 세상 끝까지 춤추고 노래하며 달려갈 것처럼 심장박동이 솟구쳤다 내려앉았다. 그래, 이거였다. 우리는 자유와 일탈, 여유를 찾아 이곳, 파리에 왔다. 그러려면 우리에게 알맞은 속도를 찾는 게 우선이다. 애초에 나와 아무짝에도 상관없는 블로거와 경쟁할 일이 아니었다. 어딜 많이 못 가면 어떠랴. 걷고 싶으면 걷고, 쉬고 싶으면 쉬고, 사랑하는 사람과 지금 이 순간에 호흡을 맞춘다는 게 중요한 것을. 남은 일정에서 더 이상 서두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수요일, 새벽 5시에 일어났다. 한국인 전용 투어가 있는 날이다. 전날의 다짐과는 별개로 있는 힘껏 서둘러야 한다. 에펠탑 근처에서 아침 6시 반에 가이드와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해안에 있는 몽생미셸 섬으로 투어를 가는데, 이 거리가 만만치 않다. 한국으로 치면 서울에서 부산 가는 거리란다. 그런데 이걸 무박 일정으로 다녀오는 건 한국인들뿐이라고 한다. 장장 왕복 20시간에 달하는 빡쎈 투어였다. 


역설적으로 나는 이 날 일정이 매우 편했다. 이동하는 내내 차 안에서 실컷 자고,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오고, 식당까지 모든 경로가 꽉 짜여 있으니 그저 규칙만 잘 따르면 만사 땡큐였다. 실패할 위험이라면 메뉴 고르는 것 정도? 이 효율적인 체계 속의 수동적인 위치가 3개월은 길들인 브래지어마냥 안락하게 느껴졌다. 그 대신 낭만은 반납해야 했다. 한국인 여덟 명이 수학여행 온 것 마냥 우르르 몰려다니는데, 사랑을 속삭일 틈은 없었다. 


그래도 우린 만족스러웠다. 나와 남편은 시간 낭비를 두려워하고 효율성을 중시하는, 뼛속 깊은 한국인이었던 것이다. 그 DNA가 간밤의 결심으로 단숨에 사라질 리 만무했다. 하긴, 나에게 맞는 속도를 찾는다며 그간 일상을 구속해왔던 습관을 모두 버린다면 그 또한 어색하고 불편한 일이다. 숙소에 돌아오니 새벽 2시. 샤워만 겨우 하고 잠들었다. 매일 저녁 섹스? 이제 그런 건 바라지도 않는다. 잠이나 푹 잤으면 좋겠다. 


목요일, 파리에서 런던으로 넘어갔다. 누적된 피로가 폭발했다. 발단은 수건이었다. 런던에서는 한인민박에 묵었다. 맛대가리 없는 조식에, 화장실은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을 정도로 더럽고,(그래서 심쿵민박인가?) 드라이기도 없는 열악한 환경은 그래도 참을 만했다. 문제는 수건을 안 준다는 점이다. 주변에 마땅히 살 만한 곳도 없었다. 밤 11시가 넘어서 기념품 숍에 들어갔더니 먼지가 켜켜이 쌓인 비치 타월을 2만 5천원에 팔고 있었다. 이걸 사니마니 옥신각신하다가 또 새벽 2시에 잠들었다. 말싸움할 기운도 없어서 기어가는 목소리로 맞받아치다가 등 돌리고 잠들었다. 이러려고 여행 왔나 자괴감 드는 날이었다. 


‘라 뉘 포르 콩세이.’ 프랑스어로 밤이 조언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계속된 수면 부족으로 서로를 할퀴던 우리에게는 딱 맞는 말이다. 다음 날, 자고 일어났더니 남편이 순한 얼굴로 사과했다. 그래도 뭔가 억울했던 나는 꽁기꽁기한 마음이 남아 있었다. 해리포터 스튜디오에 가니 그 앙금이 오간 데 없어졌다. 덤블도어 교수의 집무실, 그리핀도르 기숙사, 호그스미드 거리 속에서 벌린 입을 다물 줄 몰랐다. 빗자루를 타고 주문을 외우며 애처럼 즐거워했다. 그 순간 에 흠뻑 빠져들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해리포터 스튜디오에서 만난 호그와트 급행열차. 넌 정말 감동이었어...


여행 5일차, 이제야 남편과 나의 리듬이 만나는 지점을 찾은 기분이다. 계획과 상관없이 머물고 싶은 순간에 머무는 때가 조금씩 많아졌다. 이름 모를 다리 위에서 밴드 연주를 보며 동전을 던지기도 하고, 유유히 깊어가는 템즈 강을 바라보며 달콤한 말들을 속삭였다. 토요일, 낮게 깔린 구름을 배경으로 드넓게 펼쳐진 하이드파크를 걸으며 멍 때리던 순간도 참 좋았다. 무작정 들어간 펍에서 먹은 피시앤칩스와 맥주의 조합도 훌륭했다. 우리는 그렇게 우연이 준 선물을 하나둘 받아들이고 있었다.  


다시 파리로 돌아와 맞은 일요일 아침, 호텔 침대를 맘껏 사용했다. 파사삭 부서지는 하얀 침구 위에서 우리는 한 몸이 되어 뒹굴었다. 열어둔 창문 틈으로 안개 같은 습기가 밀려들었다. 그 습기를 한 입 머금고 싶었다. 하얀 커튼 뒤로 몸을 밀착시켰다. 맞은 편 건물에서 내다보면 그 실루엣이 보였을지도 모른다. 야외 섹스에 대한 판타지를 갈음하기에는 부족했지만, 오랜만에 참 좋았다. 역시 양보단 질이다.

 

따지고 보면 1일 1섹 자체가 말이 안 된다. 연애할 때도 그렇고 결혼해서도 그렇고, 평균적으로 일주일에 한두 번밖에 안 하는데, 프랑스에서는 왜 매일 섹스를 하리라고 기대한 걸까? 아마 그 마저도 수행해야 할 미션으로 여겼기 때문이리라. 도대체 경쟁은 누구와 하고, 채점은 누구한테 받으려 했던 걸까. 줄리 델피가 코웃음 칠 일이다. 


그렇게 한바탕 몸을 쓰고 나니 여행 내내 가졌던 강박에서 풀려나는 느낌이다. 끝내주게 맛있는 크루아상, 나지막한 오래된 건물들, 늦여름의 바람, 센 강 둔치에서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 서두르든 늦든 우린 이미 그 풍경 속에 스며 있었다. 


센 강 둔치에서 본 파리의 흔한 풍경


  


*<사슴지> 2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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