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안에 짧아진 푸른 선을 멍하니 보고 섰다.
코발트 블루 플레어 스커트. 무릎을 아래로 내려오는 치마가 한 벌도 없던 내게, 발목에 닿을 만큼 긴 이 스커트는 유별난 옷이었다. 어디서 샀는지 잊었지만 왜 샀는지는 선명히 기억한다. 다른 옷을 산 뒤 습관처럼 상품 목록을 내리는데 모니터에 찍힌 쨍한 파란 빛이 눈길을 끌었다. 파랑이라는 단어를 붓에 찍어 세로로 그은 듯 선명한 색이었다. 햇빛이 너무 강해 총을 쐈다는 뫼르소처럼, 푸른 빛에 끌려 구입 버튼을 눌렀다. 핑계 같지만 그때 느낀 건 분명 다른 옷을 살 때와는 다른 감각이었다.
칙칙한 회색 택배 봉투 안에 투명한 봉투가, 그 안에 새파란 물감이 흐르 듯 치마가 담겨 있었다. 입고 한 바퀴를 돌면 치마 폭이 펼쳐지며 말 그대로 파란이 일었다.
평소 스타일과는 다르다보니 가까운 사람들은 기억할 정도의 옷이었다. 꼭 그 이유가 아니라도 색부터 눈길을 끌어 웬만큼 눈치가 없지 않고서는 다들 이 옷을 기억했다. 자주 입진 않았지만 한 번씩 꺼내 입는 날이면 다른 누구보다 내 눈길이 가장 오래 머무는 옷이기도 했다. 달리 꾸미지 않아도 기분이 좋아지는, 주문 같은 옷이었다.
무엇보다 네가 가장 좋아한 옷이었다. 어느 날 이 옷을 입고 나갔을 때 넌 말했다. 기억하는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처음 만난 날도 내가 이 치마를 입었었다고.
너는 그런 사람이었다. 나도 기억 못하는 내 모습을 간직하다 한 번씩, 내가 누군가의 소중한 사람이구나 느낄 수 있게 말해주는 사람. 나풀거리는 치마의 끝자락을 양손으로 잡고 너의 허리를 감싸 안으면 우린 함께 짙푸른 물에 몸을 담근 기분이었다.
그 느낌이 좋아 하나 둘 긴치마나 롱 원피스를 사기 시작했지만 어느 하나 똑같긴커녕 비슷한 기분조차 낼 수 없었다. 그럼에도 점점 평소에 입는 치마 길이는 길어졌다. 옷장 안에 짧은 치마와 긴 치마의 수가 비슷해질 때쯤 넌 말했다. 내겐 긴 치마가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고. 이유는 다르지만 왠지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짧은 치마를 아예 입지 않게 되었다.
이별은 모든 의미를 뒤집는다. 너와 헤어진 뒤 난 한 번도 이 치마를 입지 못했다. 옷장에 그어진 듯 파란 선은 좀처럼 사라질 줄 몰랐다. 그렇다고 다시 전처럼 짧은 치마를 꺼내든 것도 아니어서 난 여전히 긴 치마를 입었다. 그냥 관성처럼, 모든 것이 뒤바뀐 가운데 그럼에도 아직 사라지지 않은 너의, 혹은 우리의 무언가가 내게 작용하고 있었다.
회사 동료가 소개해준 사람은 기대보다 훨씬 좋은 사람이었다. 정확히는 아무 기대를 안 했으니 생각지도 못한 좋은 사람이라고 해야겠다.
네가 떠난 뒤 처음으로 마음을 연 사람이었다. 이젠 조금 괜찮아진 것도 같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최근 몇 달 중 가장 기분이 좋은 날이었다. 날도 맑고 선선해 어딜 가도 좋을 것 같았다.
문득 이 치마가 눈에 들어왔다. 잠시 망설여졌지만 못 입을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같은 날이 아니면 언제 또 꺼내 입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푸른 선을 꺼내 펼쳤다.
정신을 차리니, 아니 기억나는 건 이미 집에 온 뒤부터다. 화장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과 눈이 마주치며 문득 정신이 들었다. 세면대 가득 따뜻한 물을 받아 치마를 담그고 두 손으로 얼룩을 문지르던 중이었다.
집에 오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인터넷으로 얼룩을 지우는 방법을 찾고, 집에
분명 인터넷에 나온대로 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얼룩을 다 지웠다고 했는데, 뭘 잘못한 건지 지워지긴커녕 번지기만 했다. 파란 바다 가운데 메울 수 없는 구멍이 생겼다. 치마를 두 손에 쥔 채 그대로 욕실 바닥에 주저 앉았다.
세탁소에서 옷을 찾았다. 종아리를 다 덮던 치마는 무릎에 간신히 닿을 만큼 짧아졌다. 나쁘지 않았다. 어색하지만 오랜만에 짧은 치마를 입어서인지, 짧아진 치마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괜찮아, 아직 입을 수 있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2015.06.26.3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