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은 유기체 같다
병(病)은 살아 있는 것만 같다
병은 유기체 같아서, 살아 있는 생명체 같아서, 여느 때는 숨죽이고 있다가 방심하고 있는 사이를 틈타고 툭 튀어나온다.
말 안 듣는 사춘기 자식이 괜히 속을 썩이듯, 내 몸의 병들도 번갈아 가며 존재감을 드러낸다. 잠잠한 듯 보여 무심해지면 언제나 그렇듯 기어코 모습을 드러낸다.
이전보다 훨씬 더 크고 강하게, 집요하게.
잠시나마 호전된 게 아닌가 싶은 기대에 마음을 놓으면, 여지없이 몇 배로 대가를 치르게 한다.
나는 CRPS(복합부위 통증 증후군), 베체트병, 난치성 편두통, 섬유근육통, 자율신경 실조증, 위염과 역류성 식도염, 부정맥, 목 디스크와 척추관 협착증, 고지혈증과 중성지방, 콜레스테롤, 해리성 기억장애, 해리성 둔주, 우울증과 불면증, 강박증, 불안장애와 공황장애까지 수많은 병을 품고 살아왔다.
병명은 줄줄이 늘어놓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지만, 사실 그것들이 내 존재의 전부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환자라는 사실이 내 정체성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병은 내 삶의 리듬을 어지럽히고, 순간순간 나를 다른 사람으로 만든다. 하지만 그런 순간들조차 내 일부일 뿐이다.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내 모든 삶을 예단할 수 없다는 말이다.
나는 이미 안다.
이 병들이 완전히 나을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사실을.
완치라는 말이 내게 허락되지 않을 가능성을 오래전부터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낫고자 하는 의지 자체를 포기한 것은 아니다.
낫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조금이라도 더 견디고 조금이라도 더 안심할 방법을 찾는 마음을 가지는 것, 그 아이러니한 희망이야말로 내가 아직 살아 있음을 증명한다.
그리고 나는 언제나 희망을 말하기에 앞서 의지에 더 큰 의미를 두어 왔다. 그렇기에 어떤 고통이라도 내 의지로 감당하며 버텨낼 수 있다고 믿는다.
나는 오늘도 그 믿음으로 하루를 버티고 견뎌낸다.
병은 내 삶의 주인처럼 행세한다.
내 일상의 흐름을 깨뜨리고, 작은 평온마저 앗아가며, 때로는 나를 본모습과는 전혀 다른 낯선 타인으로 만든다. 하지만 나는 병의 요구대로만 움직이지 않으려 노력한다.
병이 제한하는 굴레 속에서도 나는 여전히 나다.
글을 쓰고, 기억을 붙들고, 소소한 기쁨을 챙기는 일들이 내 존엄을 지킨다. 그것이 내가 매일 선택하는 삶의 방식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쓴다.
기록하고 고백하고, 내 안의 목소리를 단단히 세운다. 글을 쓰는 순간만큼은 병이 아닌 내가 삶의 주인이다.
시시때때로 병은 아픈 몸을 잠식하려 들지만 내 목소리와 의지까지 삼킬 수는 없다. 이 싸움에 승리가 없음을 알지만, 쓰러지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병은 내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붙지만, 나는 끝내 그 그림자가 되지 않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불씨처럼, 나는 나를 잃지 않고 살아갈 것이다.
나는 병에 지배당하지 않는다.
나는 끝내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