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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만의 재입원

Wash out 입원기 1

by 강나루

극심한 코로나 사태가 지나간 후 4박 5일의 짧은 입원이 Wash out을 위한 마지막 입원이었다.

코로나 팬데믹이 지나고, 2000년 의약분업 사태에 이어 전공의들의 대규모 파업이 이어졌다. 게다가 오랫동안 나를 진료해 주시던 교수님까지 병원을 옮기시면서, Wash out을 위한 입원은 더욱 요원해졌다.


그렇게 독한 약 위에 또 다른 독한 약을 덮어 씌우며 버티는 동안, 몸은 점점 더 통증에 예민해졌다.
처음엔 혈관성 두통이 먼저 찾아왔지만, CRPS가 발병한 뒤 마약성 진통제를 쓰기 시작하면서 두통은 점점 더 심해졌고, 웬만한 약으로는 두통을 제어할 수 없게 되었다.


1년에 네 번씩 분기별로 Wash out을 받던 몸을 무려 3년 동안 생으로 돌렸으니, 남아날 리 없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리고 두통은 항상 상상을 초월할 만큼 아프다.

뒷 머리에서 타고 올라오는 통증은 관자놀이를 짓이기고 눈알이 뽑힐 것만 같다. 모든 물체가 두 겹, 세 겹으로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심하게 어지러운 건 말할 것도 없다.

귀에서 울리는 이명 소리는 점점 머릿속을 헤집어 놓고 예민해진 귀는 집안의 공조(空調) 시스템이 돌아가는 소리까지 잡아내며 머리를 울려댄다. 첨예하게 조여대는 두통의 통증은 신음 소리를 막으려고 턱을 앙다물게 만들었고, 독한 약으로 인해 건조해진 치아는 견디지 못하고 부서져 나가 버렸다. 그렇게 부러지고 잇몸이 녹아내린 치아만 다섯 대가 넘었다.

이런 두통의 조절을 위해 Wash out은 필수불가결한 절차일 수밖에 없다.




입원 첫날부터 교수님과 나 사이에는 미묘한 신경전이 흘렀다.
교수님은 하루라도 더 입원시키려 했고, 나는 하루라도 빨리 퇴원하고 싶었다. 서로의 입장을 조심스레 설명하고 눈치를 주고받던 끝에, 결국 ‘일주일’이라는 시간에 극적으로 합의했다.
아무리 힘든 순간이 와도, 이번 일주일만큼은 꾹 참아보자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리도카인 정맥주사가 시작되었다.
매일 투여량이 조금씩 늘어났고, 동시에 내가 복용하던 마약성 진통제와 그에 준하는 약들은 모두 중단되었다.

몸은 혼란스러워했지만, 이 과정을 견디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길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심심하고 간이 절제된 병원 식단으로 허기만 달래며 간식을 모두 끊었다. 몸무게를 줄여 나가려고 마음먹었다. 퇴원하던 날, 체중계의 숫자는 입원 당시보다 4킬로그램 줄어 있었다.
그건 단순한 감량이 아니라, 내 몸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혈관이 터지고 팔이 부어 다리에 다시 line을 잡을 수 밖에 없었어요.

내가 입원하기만을 벼르고 있었던 교수님은 두통 신약 주사와 알약을 병행하자 하셨고, 아랫배에 주사 세대와 매일 먹는 약으로 두통을 조절하기 시작하셨다.


내가 아프기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혼자서 병원에 들어왔다.
그동안은 딸, 지니가 내 곁을 그림자처럼 따라붙어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혼자 해내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나에게도, 그리고 지니에게도 이 시간은 각자의 독립을 의미했다.
서로의 손을 잠시 놓되, 완전히 잃지 않기 위한… 그런 성장의 시간이었다.




그렇게 별 탈 없이 입원 기간이 흘러갔다.
치료도 순조로워 보였고, 나는 이제 조금은 안심해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퇴원을 하루 앞둔 일요일 새벽, 모든 평온은 한순간에 깨져버렸다.


링거의 약물을 조절하던 기계에서 '공기가 찼다'는 알림음을 들으며 잠에서 깨어났다.
오전 4시 40분이었다.
순간,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소리가 내 귓가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눈이... 보이지 않았다.


눈앞에 짙은 검은색 셀로판지가 덮인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양손으로 눈을 거칠게 비벼보았지만, 세상은 여전히 깜깜했다.
가슴은 미친 듯이 두 방망이질을 쳤고, 숨이 가빠 오기 시작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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