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급문화 전성기-1
2011년, 어린이 애니메이션 <네모바지 스폰지밥>(이하 스폰지밥) 시청이 집중력을 저하시킨다는 연구결과가 미국 버지니아대 연구팀에 의해 보도되어 논란을 빚었다. 버지니아대 연구팀에 의하면 스폰지밥을 시청한 어린이들은 <카이유>라는 느린 속도로 전개되는 애니를 보여준 다른 어린이들보다 평균적으로 집중력 점수가 낮게 나왔다고 보고했다. 버지니아대 심리학과 안젤린 릴러드 교수는 “스폰지밥과 같은 프로그램을 본 아이들이 학습능력이나 자기통제 능력에 저해가 올 수 있다는 사실을 부모들이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폰지밥을 수년 간 방영했던 니켈로디언 측은 집중력 저하 보도의 신빙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버지니아대 연구에 관련된 아동들은 네 살 이하의 어린이들이라는 것, 다양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불특정한 어린이 60명에게 9분간 애니메이션을 보여준 것만 가지고 연구 결과를 신뢰할 수 없다는 것 등을 근거로 내세웠다. 버지니아대의 심리학적 연구 결과는 완벽하게 신뢰할 수 없다는 이유로, 단지 하나의 연구로서만 남게 되었다. 그러나 “스폰지밥 시청의 집중력 저하”가 평균성을 지녔다는 보고는 결코 우연이라고만 결론 내리기 어렵다.
필자 역시 스폰지밥이 집중력 저하를 가중한다는 연구 결과에 대해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고 믿는다. 스폰지밥에 내재된 텍스트들은 “집중력 저하”를 의도하는 걸지도 모른다. 일반적 통념으로 “집중력 저하”는 자폐적인 개념이나 부정적 의미로만 생각된다. 그러나 “집중력 저하”가 지칭하는 바를 부정적인 의미로만 판단하는 행위는 편향된 사고에 의거한 것이다. 나는 스폰지밥의 “집중력 저하”가 단순히 주의력을 결핍을 시키는 것이 아닌, 규범화되고 체계화된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행위를 의도한다고 본다. 즉 규범화된 교육체계 및 사회적 체계에 대항하는 기호를 은밀하게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스폰지밥은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의 주체와 타자의 대결을 묘사한다. 이 글의 목적은 어린이 애니메이션이라는 미명 아래 숨겨져 있는 그 불온한 기호들을 해석하는데 있다.
<스폰지밥>은 ‘스폰지밥’이라는 노란 사각형의 스펀지가 주인공이다. 독자들은 스폰지밥을 그의 이웃인 오징어 ‘징징이’와 자주 비교를 하곤 하는데, 그 이유는 스폰지밥이 징징이를 괴롭히는 에피소드가 절반 이상이기 때문이다. 성인 독자 일반은 만화의 주인공인 스폰지밥보다 징징이의 생활방식을 “정상”이라고 평가하며 징징이에게 쉽게 감정이입을 하곤 한다. 이는 징징이라는 캐릭터가 스폰지밥이라는 캐릭터와 비교해 훨씬 공감하기 쉽다는 것을 뜻한다.
<스폰지밥>에서 그려지는 징징이의 생활형태는 규칙적이고 반복적이다. 징징이의 생활을 종합하자면, 아침에 일어나 패스트푸드점인 ‘집게리아’에 카운터 직원으로 나서고, 저녁까지 일하고 돌아와 헬스를 하고, 밤에는 취미삼아 클라리넷 연주를 한 뒤, 잠에 빠져든다.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징징이의 생활은 획일적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주말이 되면 여행을 가거나, 집에서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연주하면서 지낸다.
만화 캐릭터라고 하기엔 전혀 낯설지 않은 생활형식을 지닌 인물이다. 심지어 익숙하기까지 하다. 징징이는 현대 직장인들과 생활형태가 매우 유사하다. 도시 속 현대인들은 징징이처럼 반복된 삶을 살고 있다. 직장과 집을 매일 왕복하고, 주말이나 시간이 비는 날에만 잠깐의 일탈을 할 뿐이다. 그렇다고 ‘일탈’ 자체에 목적을 둔 일탈이 아닌, 오로지 규범화 속에 내재된 일탈, 즉 일정한 행동범위 내에서 벗어나지 않는 행동을 할 뿐이다.
징징이는 항상 스트레스에 시달린다는 점에서 또한 직장인들과 닮아있다. 징징이는 시종일관 찌푸린 얼굴을 하고, 어떤 유머나 농담에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다. 징징이는 휴가나 보너스를 지급받아야 비로소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일에 치여 압박에 시달리던 회사원이 휴가와 보너스를 받고 쾌락을 느끼는 심리와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직장인’ 징징이의 취미는 공교롭게도 ‘예술’이다. 그러나 징징이의 클라리넷 연주는 형편 없는 소음에 불과하다. 일상적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징징이의 클라리넷 연주는 취미 그 이상이 될 수 없는, 절대 ‘예술’로서 가치에 도달하지 못하는 연주에 불과하다.
징징이의 이웃이자 만화의 주인공인 ‘스폰지밥’은 징징이와 아주 상반된 인물이다.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노래를 부르고, 하루가 시작된 순간부터 모든 일에 행복한 표정으로 일관한다. 스폰지밥의 하루는 소동으로 시작하여 소동으로 끝난다. 스폰지밥이 부리는 소동은 타의적인 간섭에 비롯하는 것이 아닌, 스폰지밥의 주체적인 모험심에 의거한다. 늙어버린 슈퍼히어로들을 대신해 정의를 수행하기도 하고, 폭력배를 따라하다가 경찰에 붙잡히기도 하며, 길바닥에서 합기도 싸움을 벌인다. 스폰지밥은 일상의 반복에서 스스로 탈피하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스폰지밥은 압박에 시달리는 태도를 내보이지 않고, 어린이처럼 웃고 신나게 뛰어다닌다.
징징이와 스폰지밥이 가장 대비되는 지점은 ‘예술’이 소재가 된 에피소드들에서다. 「나도 예술가」, 「 예술은 어려워」 등의 에피소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예술적으로 인정받는 주체가 되는 이는 언제나 징징이가 아니라 스폰지밥이다. 징징이게서 예술이란 명예와 허영심을 이끌어내기 위한 수단에 가깝다. 그러나 스폰지밥에게 예술은 아무런 대가 없이도 순수하게 다가갈 수 있는, 그 자체로 자기충족적인 작업이다. 인간을 획일화하는 규범적 체계에 아무런 반성 없이 순응하는 ‘징징이’는 절대 예술가의 단계에 도달하지 못한다. 획일적 규범화를 저항하여 탈피하려는 ‘스폰지밥’이야말로 진정한 예술가인 것이다.
독자들은 여기서 스폰지밥의 행위가 그저 자폐적인 성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냐고 물을 수 있다. 그러나 ‘스폰지밥’과 세계를 파악하지 못한 ‘미성숙자’는 동일시할 수 없다. 불가사리인 ‘뚱이’와 스폰지밥의 차이를 통해, 스폰지밥의 행각들이 단순함에서 근거한 것이 아님이 드러난다. 뚱이는 스폰지밥의 이웃이자 단짝 친구이다. 뚱이 역시 스폰지밥처럼 규범화된 일상 저변에 존재하지만, 뚱이가 일상성에서 벗어나는 이유는, 의도적으로 규율을 파괴하려하기 때문이 아니다. 뚱이는 일반적으로 ‘바보’라 불리는 캐릭터에 적합하다. 정신적 규범화에 주체적으로 대항하는 사람들과 ‘바보’는 각기 비슷해 보이지만 실은 전혀 다르다. 물론 스폰지밥은 뚱이를 배척하거나 차별하지 않는다. 뚱이를 한심하게 치부하는 징징이와 달리, 스폰지밥은 뚱이를 적극적으로 포용한다.
징징이의 시점(현대 도시민의 관점)에서 스폰지밥은 ‘비정상인’이다. 일상성에 시달리지 않고 반복되는 체계를 자꾸만 파괴하려는 행위자들은, 징징이와 같은 이들에게 비정상인으로 분류된다. 수많은 에피소드들에서 징징이(정상인)의 일상은 스폰지밥(비정상인)을 만남으로 인해 뒤틀리거나 파괴된다. 스폰지밥이라는 인물은 징징이에게 그저 익숙하기만 했던 일상과 통념들을 무너트리려 하는 존재, 규범화된 정신 상태를 재인식하게 만듦으로 불편을 일깨워주는 존재이다. 이는 징징이와 스폰지밥의 일상적 대화에서부터 시작된다. 징징이가 “XX는 XX이다”라고 말하면 스폰지밥은 항상 “왜? 왜 그런거지?”라는 식으로 징징이의 성급한 개념 일반화에 의문을 제기하고, 행동으로 어떤 사물이 다른 일반적 통념과 다른 형태로 사용되고 정의될 수 있다는 걸 일깨운다.
만화 스폰지밥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비키니 시티라는 공간 내에서 결과적으로 ‘미친놈’ 취급을 받는 것은 항상 징징이라는 사실이다. 징징이는 자신의 계획을 방해하는 스폰지밥을 골려주려다 언제나 역으로 놀림을 받는다. 비키니 시티 내에서는, 독자들에게 ‘정상인’으로 판단되어야 할 인물이 ‘비정상인’으로 전락한다. 만화의 초점 또한 ‘정상인’인 징징이가 아니라 ‘비정상인’인 스폰지밥에 맞춰져 있다. ‘스폰지밥’은 현실에서 보편성을 획득한 주체들을 사회의 가장자리로 내몰고, 실제 세계에서 타자화되고 배제된 인간들을 사회의 중간 지점에 지정해놓아, 정상인과 비정상인의 주객관계를 전도시킨다.
「이사간 징징이」 편은 스폰지밥의 메시지를 가장 잘 드러낸다. 징징이는 스폰지밥의 행위에 지쳐 동족(현대인)들만이 살아가는 도시로 이사를 간다. 이 마을은 소름 돋도록 ‘도시적인’ 측면을 잘 형상화했다. 징징이의 동족들은 노동일과가 끝나면 전부 예술적 취미에 몰두―그러나 이들은 예술은 전부 ‘가짜’로 묘사되는데, 단지 도피성 취미로서의 예술은 진짜 ‘예술’로 승화할수 없기 때문이다―하거나, 건강을 위한 운동(헬스)을 한다. 하루하루 똑같은 일상을 살아가는 마을주민들, 외형이 복제된 것 마냥 전부 똑같은 건물들, 이것은 자본주의의 도시사회에서 인류가 살아가는 풍경이다.
에피소드 초반에 징징이는 스폰지밥에게서 벗어난 상태를 즐기지만, 곧 쳇바퀴 돌듯 되풀이되는 생활 패턴에 괴로워한다. 그리고 스스로 그 반복되는 규범체계를 망가트리기 위해 도시적 질서를 파괴하기로 결심한다. 거리 한복판에서 춤을 추고, 이웃 오징어의 색소폰을 망가트리는 등등. 징징이는 획일적 풍경에 의해 ‘미쳐’버린 것이다. 동일성만 강요되는 사회에서 스스로를 ‘비정상인’으로 만들지 않으면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동안 징징이가 획일적인 삶을 가졌음에도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스폰지밥에 의해 규범화된 일상을 해체하는 작업이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이사간 징징이’ 편에서 징징이는 결국 도시경찰들에 의해 궁지에 몰리는데, 한순간 기지를 발휘해 소화기를 로켓처럼 타고 날아가 도시를 탈출한다.
그러나 이 마지막 장면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행위이다. 실제세계에서 규범화 바깥에 있는 존재들, 즉 비정상이라 낙인찍힌 이들은 시스템을 보호하고자하는 견고한 세력들에 의해 ‘정신병원’에 감금된다. 마치 아우슈비츠에 갇힌 유태인들이 굴뚝이 유일한 탈출구라고 말했듯, 현대사회에 속박된 개인들 또한 실질적인 탈출구 따윈 없다고 <스폰지밥>은 말하고 있다.
*이 글은 지난 2016. 10. 13에 미스핏츠에 개재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