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슈퍼에서 시작된 조미료 탐험
나는 커피 회사 대표이자 커피 연구자다. 에티오피아 커피를 오래도록 연구해왔고, 그 주제로 해외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한국에서는 에티오피아 커피 전문점을 직접 운영한 경험도 있다. 지금은 그 카페를 동생이 이어받아 유지하고 있지만, 나는 여전히 커피를 삶의 주제로 삼아 살아간다.
그동안 커피를 핑계 삼아 세계를 여행했고, 문화의 경계를 넘나들며 수많은 맛과 향을 마주해왔다. 커피는 나를 여러 대륙으로 이끌었고, 새로운 감각의 지도를 펼쳐 보이게 했다. 이번에는 그 커피가 나를 일본 도쿄로 데려왔다. 지난 4월, 나는 모든 것을 뒤로하고 가방 두 개만 들고 도쿄로 이주했다. 현재는 도쿄외국어대학교 아프리카연구센터에서 ‘아시아 커피 로드’와 ‘에티오피아 커피의 두 번째 삶’을 연구 중이다. 이전에도 일본에 머문 적은 있었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다른 각오와 역할로 온 셈이다.
도쿄에 도착하고 나서 마주한 현실의 벽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제일 먼저 느낀 것은 먹는 일의 피로감이었다. 외식 위주로 생활을 시작했지만, 매 끼니마다 식당을 찾아다니는 일이 꽤 큰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그리고 대부분의 음식이 짜거나 달게 조리되어 있어, 식사를 마치고도 뭔가 과한 느낌이 남았다. 나는 슴슴한 맛, 재료 본연의 맛을 선호하는 사람인데, 그런 스타일의 요리를 제공하는 식당을 도쿄에서 찾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결국 내가 직접 요리를 해야 할 상황에 이르렀고, 불가피하게 부엌에 서게 되었다. 문제는, 나는 요리를 잘하지 못한다. 일본에서 살아본 경험은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요리를 시작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요즘은 유튜브나 SNS 덕분에 요리를 배우기 좋은 시대가 되었지만, 중요한 건 마음을 먹는 일이다. 나는 그 마음을 먹었고, 커피 공부를 처음 시작했을 때처럼 요리에도 천천히 접근해보기로 했다.
칼질은 여전히 서툴고, 레시피도 낯설지만, 다행히 내가 잘하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간을 보는 일이다. 그동안 다양한 음식을 접해온 덕분인지 음식의 맛을 판별하는 감각은 나쁘지 않았다. 무엇이 부족한지, 무엇이 과한지를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었고, 때로는 정확하게 어떤 조미료가 필요한지도 떠올랐다. 그렇게 간을 맞추다 보니 자연스럽게 관심이 생긴 것이 바로 조미료였다. 요리는 못하지만, 간은 볼 줄 아는 사람—내가 요리하는 방식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슈퍼를 자주 드나들면서, 나는 일본 조미료의 세계를 마주하게 되었다. 쇼유, 멘츠유, 폰즈, 후리카케, 시치미 도가라시, 와사비…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은 이름과 병 디자인에 당황했지만, 하나둘 손에 익히고 나니 이 조미료들이 단순한 양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떤 조미료는 지역의 향을 담고 있었고, 어떤 조미료는 계절의 분위기를 상기시켰으며, 어떤 조미료는 일본인의 식탁 철학을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슈퍼의 진열대 앞에서 문득 깨달았다. 내가 서 있는 이곳은 하나의 미지의 세계, ‘조미료의 세계’였다. 낯설지만 묘하게 익숙했고, 커피의 세계와 닮아 있기도 했다. 내가 중년의 나이에 뒤늦게 발견한 이 우주는 커피와 더불어 나를 평생 심심하지 않게 해줄 또 하나의 연구 대상이 되었다. 조미료, 너 딱 기다려!
그런데 말입니다… (김상중 톤)
일본 조미료를 소개하는 콘텐츠는 이미 넘쳐난다. 셰프와 요리 유튜버, 일본 생활자들의 생생한 후기까지, 정보는 차고 넘친다. 그러나 ‘요리를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요리를 못하는 사람’의 눈으로 조미료를 들여다보는 글은 좀처럼 보기 어렵다. 그래서 이 글을 쓰기로 했다.
이 연재는 도쿄에서 조미료에 눈뜬 한 커피 연구자가, 칼과 도마보다 먼저 조미료를 손에 익히고 입에 익힌 기록이다. 맛을 통해 문화를 들여다보는 작은 인문지리학적 기행이자, 요리는 못하지만 간은 볼 줄 아는 사람의 조미료 탐험기다.
요리는 못하지만, 간은 본다.
이 말이 어쩌면, 나의 도쿄 생활을 가장 잘 설명하는 한 줄일지도 모른다. 냉장고와 수납장을 열어보니 조미료만도 100가지가 넘는다. 일본인 친구와 부엌을 공유하고 있어서 조미료의 가짓수는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요리를 잘하는 그 친구는 내가 브런치북 커버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보더니, 어느새 시치미 도가라시와 고마아브라(참기름) 병을 상표가 잘 보이도록 살짝 책상 위에 얹어주고 갔다. 뭔가 말없이 응원해주는 듯한, 작고 근사한 제스처였다.
이번 연재는 매주 화요일에 올라갈 예정이다. 브런치북 공모 마감일이 10월 26일이라서, 때에 따라 일주일에 두 편을 올리는 주간도 생길 수 있다. 공모전에 선정되지 않더라도, 이 이야기는 계속 이어질 것이다. 요리는 못하지만 간은 보는 인문지리학자의 조미료 탐험은 이제 막 시작되었고, 나는 이 여정을 나 혼자만 알기엔 너무 아깝다고 느꼈다. 그러니 이 글을 읽는 당신도, 함께 즐겨주기를 바란다.
도쿄에서 윤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