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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인걸 Mar 17. 2020

“소중한 이의 죽음을 나는 잘 받아들일 수 있을까?”

[책/죽음] <잘해봐야 시체가 되겠지만>, 케이틀린 도티, 반비

#책리뷰

#잘해봐야시체가되겠지만

#케이틀린도티 #반비



‘살면서 시체를 본 적이 있던가?’

미국의 장의사가 쓴 책을 읽다가 문득 생각했다. 없었다. 주변에 세상을 떠난 이들은 있었지만, 직접 그 시신을 보진 못했다. 삼십여 년을 살았는데 시체를 본 적이 없다는 게 불현듯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인류 역사상 삶과 죽음이 이토록 멀어진 적은 없었다.

<잘해봐야 시체가 되겠지만>의 저자 케이틀린 도티는 여덟 살 때 어떤 여자아이가 추락사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 충격으로 죽음에 관심이 깊어졌다. 죽음에 관한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다가 대학 졸업 후 화장터 업체에 취직했다.

매일 시체와 함께 하는 직장생활이란 과연 어떤 걸까? 살아서는 만난 적 없는 사람(시신)을 면도하고, 냉장 트럭에서 시신이 든 박스 더미를 정리하고, 시신을 화장할 때 나오는 재에 뒤덮이며, 화장 후 남은 뼛조각을 분쇄기에 돌려 납골함에 담는 등등, 보통이라면 뜨악할 만한 업무지만 작가는 농담 섞어가며 상세하게 설명한다. (덕분에 인체가 부패할 때 나는 냄새를 맡아본 기분이다)

작가가 이 책을 쓴 건 단지 장의사의 삶을 보여주기 위함은 아니다. 그는 미국 장례 문화의 문제점을 개선해 더 나은 장례 문화를 만들고자 한다. 그가 지적한 문제점 중 ‘시체 방부처리’가 특히 흥미로웠는데,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다.

미국 영화의 장례식 장면에서 관 안에 누워 있는 시신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조문객은 그 시신을 함께 보며 추모하는 의식인 ‘뷰잉(viewing)’을 한다.(시신 훼손이 클 경우엔 생략하는 의식이다) 이때 시신이 “‘평화롭고’ ‘자연스럽고’ ‘편히 쉬는 것’처럼” 보이는 건 화학적 방부처리를 했기 때문이다. (아무 처리도 하지 않은 시신은 일반적인 시선에서 봤을 때 끔찍해 보일 수 있다)

작가에 따르면 시체 방부처리는 19세기 중반 남북전쟁 이후부터 생긴 문화라고 한다. 미국 남부의 여름 더위 아래선 시체의 부패 속도가 빨랐다. 이때 죽은 아들과 남편의 시신을 찾고자 하는 군인 가족들이 있었고, 일정 금액을 내면 전장에서 바로 방부처리를 해주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서비스의 효과를 보여주기 위해 방부처리한 시체를 전시했다. 시체가 상품으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방부처리는 시신에 투관침을 여기저기 찔러 몸 속의 액체나 기체, 노폐물을 빨아낸 후, 방부제인 화학 용액을 시신에 주입하는 식으로 이뤄진다. 이 과정은 “수십 억 달러 자본이 왔다 갔다 하는 북미의 장의업계를 지탱하는” 장례 문화의 핵심 요소가 되었다. 그런데 작가는 장의사로서 시체 방부처리 작업을 직접 해본 후, 자신의 가족에겐 도저히 할 수 없을 일이라고 느꼈다. 생각해보라. 내 가족의 시신에 누군가 투관침을 여기저기 찌르고 있는 모습을! 게다가 현대의 방부처리에는 그 어떤 종교적 믿음도 없다. 마케팅과 소비주의에 기반한 문화에 불과했다.

있는 그대로의 죽음을 가리는 시체 방부처리는 “죽음을 부정하는 문화”의 한 단면일 뿐이다. 병원의 의료 체계 역시 죽음을 보이지 않게 만들었고, 소비시장은 젊음을 찬미하며 노화를 극복의 대상으로 여기게 했다. 하지만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우리에게 “죽음을 부정하는 문화는 잘 죽는 데 장애물이 된다.” 미국의 장례 문화는 한국과 차이가 있지만, 큰 틀에서 문화적 성격은 유사하므로 우리에게도 유효한 문제의식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죽는 게 ‘좋은 죽음’인 걸까? 더 나은 장례 문화란 또 어떤 걸까? 책을 다 읽은 지금도 답을 내리기가 어렵다. 아무리 상상해봐도 나의 죽음은 여전히 막연하기 때문이다. 이에 질문을 바꿔 생각해본다. 만약 소중한 누군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면, 나는 그 죽음을 잘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 질문을 곰곰이 되뇌어 보면 지금 내가 잘 살고 있는 건지 가늠해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해 마음에 남은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하며 글을 마친다.


고인의 몸을 감싸기 위해 시트로 끌어내는데, 이 여자가 자기 몸을 어머니 위로 던지며 극적으로 통곡했다. “안 돼요, 어머니, 안 돼요, 안 돼! 난 엄마가 필요해요. 어머니, 가지 말아요!”
(...) “죄의식이야.” 크리스가 숨을 내쉬면서 살짝 웅얼거렸다.
“뭐라고요?” 내가 소근거렸다.
“죄의식이라고. 난 이런 걸 여러 번 보았지. 저 여자는 몇 년 동안 자기 어머니를 찾아뵙지도 않았어. 그러고는 지금 엄마 없이는 못 살 것처럼 굴고 있는 거야. 다 헛소리야, 캣.” 그가 말했다. 그의 말이 맞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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