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women do IT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갱그리 May 10. 2019

당연하지만 당연할 수 없는,
그래서 멈출 수 없는.

women do IT팀 조은의 십대여성인권센터 야간상담 참관기

멀리 있을 것만 같았던 날이 왔다. 현승님과 갱님의 후기를 볼 때마다 조금씩 두려워졌지만, 막상 날이 다가오니 별 생각이 들지 않았다. 도리어 최근 버닝썬 사건 덕분에 꽤 단련이 되었다는 나름의 자신감(?) 마저 가지고 있었다. 당일 갑작스러운 비 때문에 조금 늦게 십대여성인권센터에 도착했고, 도착하자마자 바로 모니터링에 투입됐다.


애플리케이션 모니터링: 은어는 신고할 수 없다고요?


모니터링은 어플리케이션과 사이트로 나누어 진행되는데, 나는 먼저  어플리케이션 팀에 합류했다.


어플리케이션 팀에서는 랜덤채팅 앱과 ‘아자르’라는 랜덤 영상통화 앱을 모니터링했다. 처음 들어가 본 랜덤 채팅 앱은 마치 한글날 특집 기사를 보는 듯,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신조어와 은어가 난무했다. 당황하는 내게 사이버또래상담팀(이하 사또) 활동가 선생님이 각각 은어의 뜻에 대해 알려주셨다. 예컨대 ‘비건 알바’는 (채식이 아니라) ‘비건전 알바’를 뜻했고, ‘쓰퐁’은 ‘스폰서 성매매’를 뜻했다. 


비건알바는 비건이 아니었다. 비건전의 은어라고.


각각의 은어는 성매매에 대한 명확한 의도를 가졌음에도 경찰에 신고할 수 없었다. 은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렇게 스크롤을 내리다, 한번에 알아들을 수 있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집을 나와서 머물 곳을 찾고 있다는 글이었다.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십대여성인권센터 홍보 쪽지를 보내고 다시 스크롤을 내리자, 그 밑에는 다시 성매매에 대한 의도를 가진 은어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랜덤채팅 앱에 이어 아자르 모니터링이 시작됐다. 나는 폐쇄적인 관계 속에 웅크려 살아왔기 때문에, 모르는 상대와 얼굴을 보며 통화하는 아자르가 너무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이 앱에서 만난 사용자가 다른 사용자에게 자신의 나체를 노출하거나 상대방의 나체를 요구한다니, 하지만 이 또한 화나게도 현실이었다. 


아자르를 통해 우리와 연결됐던 대부분의 여성은, 심지어 그날 처음 이용한다고 답변한 사람조차 노출을 요구당한 경험이 있다고 했다. 어떤 사람은 대부분의 남자들이 여성의 나체를 보기 위해 아자르를 하는 것 같다고 답변하기도 했다. 무슨 신종 바바리맨도 아니고.. 이런 것까지 디지털화될 일인가. 우리와 연결된 사람들이 우리의 안내를 열심히 듣는 모습을 보일수록 쓴 침을 삼키게 되었다.


사이트 팀: 맥락은 고려가 안 되나요?


이후에는 사이트팀으로 이동해 성매매 알선 사이트 모니터링 및 신고 업무를 참관했다. 사이트 팀에서는 은어 등으로 키워드 검색을 하고, 성매매 알선 사이트를 찾아내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신고하는 작업을 했다. 구글에 ‘조건 ㅁㅅㅈ’를 검색하자 성매매 알선을 해준다는 사이트 목록이 화면 가득 떴다. 내가 놀라자, 사또 선생님이 이렇게 말했다.


이런 건 신고 못해요.


신고 가능한 사이트의 조건은 아래와 같았다.  

    가격을 제시하고 있으며  

    로그인 없이 볼 수 있고   

    음란물을 바로 보여줘야 한다. 


나는 속으로 ‘누가 그렇게 직접적으로 올리나, 그냥 안 잡겠다는거 아냐?' 생각했는데, 그런 사이트가 정말로 있었다. 사이트들은 로그인 없이 여성 사진에 가격을 붙여 전시하고 판매하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사이트 중 일부는 지난번에 이미 신고한 사이트라고 했다. 신고하면 해당 페이지만 삭제되고 URL을 바꿔 똑같이 사업(!)을 이어나간다는 것이었다. 찾아보니 그 사이트의 도메인은 중국 업체를 통해 구입한 것이었다. 


찾아 낸 사이트 몇 군데를 신고하러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들어갔다. 통신 민원은 본인 인증 후에나 신고가 가능했다. 왜 굳이? 따져 묻고 싶었지만 우선 조용히 To-Do 리스트를 적었다.


그리고 나선 다른 사또샘이 진행 중이던 인터넷 방송 실시간 모니터링에 들어갔다. 인터넷 방송이 점점 성인 인증을 도입하면서, 인터넷 방송의 신고 기준은 19금 영화를 넘어서는 수위(예컨대 음부를 몇 초 이상 보여주어야 한다든지. 가슴 노출은 신고 수준이 되지 않는다고.)에 대해서만 신고가 가능해졌다고 한다. 기가 막혔다.


서이트팀 모니터링에 참여하고부터 머릿속에 ‘맥락’이라는 단어가 계속 맴돌았다. 여성의 성을 상품으로 팔고 사실상 인신매매를 하고 있는 인터넷 방송과 19금 영화의 수위라, 이게 기계적 중립으로 퉁칠 수 있는 일인가? 나도 모르게 너무 깊은 한숨이 나왔다. 그리고 보게 된 몇 개의 인터넷 방송들은 그 한숨이 끊일 수 없게 만들었다. 


당연하지 않은 안전, 잠들 수 없는 공포


모니터링이 끝나고 야간 상담에 참여한 사또 샘들과 다시 회의 테이블에 모여 앉으면서 나도 모르게 너무 깊은 한숨이 나왔다. 사또 샘들은 다정하게도 나를 살펴주셨고 이걸 매일 보실 샘들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에 마음을 추스리자 모니터링 결과 보고가 시작됐다.


모니터링 결과 보고와 함께, 사또 샘들이 이런 말을 했다.


성매매 알선이 점점 공개된 영상 플랫폼으로 넘어가는 흐름을 보이며,
양상이 더 다양화되고 있어요.


이 말을 들으니 머리 속이 더 복잡해지는 한편 조금씩 정리가 되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일을 꼭 해야 하는구나, 마음을 다잡게 되었다. 또, 우리가 지금 뭘 해야 하는지, 뭘 할 수 있을지 조금 막연하게 느껴졌던 것들이 약간은 가닥이 잡히는 것 같았다. 결과 보고를 마치고, 더 늦은 시간에 시작하는 더 문제적인 인터넷 방송 모니터링을 위해 사또샘들은 각자 자리로 돌아갔다. 사또샘들에게 고생하셨다는 말 밖에는 할 수 없어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나는 먼저 자리를 나왔다.


성매매 알선과 성착취는 플랫폼을 타고 더욱 확산되는 추세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뭐가 있을까?”


그런데 문제는 귀가 길에서 일어났다. 겉잡을 수 없이 마음이 가라 앉았다. 화가 나고 무서웠다. 처음 겪는, 형언할 수 없는 기분에 솔직히 처음으로 빨간 약을 먹은 것을 후회했다. 내가 그동안 너무 안전 지대에만 살았나, 여성이기에 살면서 겪었던 그 폭력은 정말 빙산의 일각에도 못 미치는 것이었다니. 그곳 역시 안전하지 않지만, 그래도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면 안 될까, 기억을 삭제하고 싶었다. 그리고 내 기억이 삭제되면서 그 더럽고 추잡한 것들도 아예 세상에서 삭제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11시면 잠을 이기지 못하는 나였지만 왠지 잠이 오지 않아 새벽까지 그날의 모니터링 내용을 정리해 팀 슬랙에 공유하고 눈알만 한참 굴리다 잠이 들었다. 


다음 날, 퀭한 눈으로 출근한 나에게 우리 프로젝트를 마음으로 지지하던 회사 친구가 어제의 모니터링은 어떠했는지 물었다. 나도 모르게 “미쳐 버릴 거 같아, 다 죽여버리고 싶어.”라는 말이 나왔다. 평소에 잘 하지 않는 표현에 나도 친구도 놀랐지만, 그것이 내 솔직한 심경이었다. 친구는 인내심있게 내 말을 들어주었고,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을 물었다. 친구랑 이야기를 나누며 마음이 조금은 진정이 되었다. 슬랙에 남긴 글에 달린 갱님과 현승님의 글에 위로 받으며 의지를 다졌다. 연대는 이런 것이구나,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4월 30일, 각자 공부한 내용과 의견을 나누는 women do IT 스터디 모임을 하면서 잔존해있던 공포가 에너지로 바뀌었다. 티켓 다방과 플랫폼 산업에서의 진입 경로에 대해 공부한 갱님, 게임과 콘텐츠 규제의 차이를 공부해 온 현승님, 십대여성인권센터의 발표 내용을 공유해주신 보람님, 날카롭게 의견 내용을 정리해주신 지윤님. 다양한 내용과 의견을 공유하면서 아이디어가 나오고 우리 프로젝트가 점점 build-up 되고 있다는게 눈에 보였다.


“내가 도울 방법이 없을까?” 모니터링 다음날, 내 이야기를 들었던 친구는 바로 그렇게 물었었다. 아이고 문제네,에서 끝나지 않고 해결을 위해 무얼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 내가 Women Do IT를 시작한 지점도 그곳이었다. 그러기 위해 외면하지 않고 직면하는 것,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방법을 찾아내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다. 그리고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우리'이기에 해낼 수 있으리라 믿으며 멈추지 않고 계속 해나가야지, 흔들리지 않을 의지를 굳힐 수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온라인 청소년 성착취의 민낯을 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