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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온 Oct 07. 2024

다르게 살아갈 힘을 배우는 관계


(2022년 <밀려오는 파도를 막을 수는 없다 vol2: 우리가 살아가는 곳에 대해 말하기>에 기고한 글)


2012년 2월, 나는 2년 간 살았던 대학 기숙사에서 나와 자취를 시작했다. 2년 후 새 집을 찾는 과정에서 마침 같은 시기 원룸 계약이 끝난 친구가 있었고, 각자의 보증금을 합쳐 거실 있는 집에 살아보자며 의기투합했다. 그런데 마음에 드는 집을 찾고 나니 방이 세 개였고, 집을 포기하는 대신 친구 한 명을 더 초대했다(이 세 번째 멤버는 1년 단위로 바뀌다가 2016년에 합류한 친구와 현재까지 살고 있다). 그렇게 세 사람으로 이루어진 주거공동체가 만들어졌고 ‘초록집'이라는 이름도 붙였다. 때때로 각자의 동생들이 머물기도 하면서 3~5인의 사람과 재작년부터 가족이 된 강아지 ‘도레’가 한 지붕 아래 산다.   


초록집을 거쳐간 친구들은 모두 같은 대학을 다니며 알게 되었다. 학과가 같거나, 같은 수업을 들은 것도 아니다. 내가 이들을 만난 그룹은 대학 내에 신자유주의와 자본의 논리로부터 자유로운 대안 공간을 만들려는 모임이었다. 기존 학생운동 조직 안에서는 자리를 찾지 못한 이들이 주로 모였는데, 당시 나는 캠퍼스를 일종의 작은 마을로 보고, 우리가 풀뿌리 운동을 한다고 생각했다. 몇몇 대학에서 학생들이 자치적으로 대안적 지식, 비판적 담론을 생산하고 공유하는 ‘생활도서관'을 대안공간의 구체적인 모델로 잡았다. 몇 년간 작은 동아리방 하나를 임시 생활도서관으로 꾸며서 운영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최근의 ‘독립서점’들과 비슷한 분위기의 공간이었던 것 같다.


그 외에도 우리는 누구나 자유롭게 모여 앉을 수 있는 광장을 없애는 대신 프랜차이즈 카페나 쇼핑 공간, 지하주차장을 만드는 학교의 행태에 문제 제기하거나,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 운동이나 쌍차 해고노동자 복직 운동처럼 학교밖의 이슈를 학생들에게 알리는 연대 활동을 했다. 새로운 건물을 지을 때마다 남는 공간 한켠이라도 “취업상담실”이 아닌 “학생자치공간”을 확보하려고 전략을 짜고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기도 했다. “무쓸모의 쓸모" 같은 주제로 간담회를 열고 일시적 점거를 시도하기도 했지만 우리는 대체로 소심했다.


우리는 징계를 무릅쓰고 학교 행정처와 각을 세워 싸우기보다 말이 통하는 교직원과 협의를 해보려 했다. 그가 ‘허락'해준 안전한 행사들을 진행하는 게 찝찝했지만 이나마 취업, 성적, 경쟁, 자본이 아닌 다른 이야기가 흐르는 시공간을 열 수 있음에 도취됐다. 예컨대 이런 황홀한 기억들 때문이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여름밤, 중앙도서관 옆 둥그런 잔디밭 언덕에 돗자리 깔고 한가롭게 누워 우리가 틀어놓은 독립 다큐멘터리를 보던 사람들. 누군가의 자취방에서 빌려온 알록달록한 전구와 손끝에 남은 나쵸칩의 짭조름한 향기. 도서관을 오가다 잠깐씩 멈춰서 화면에 시선을 보내던 사람들.


또 어느 메이데이에는 학내의 청소노동자들과 연대하는 친구들과 함께 부스를 차렸다. 티베트와 인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멤버가 야심차게 짜이를 끓이면, 자보를 읽고 지지의 메시지를 남기는 사람들에게 한 잔씩 나눠줬다. 새들이 소란스레 모여드는 나무 아래 작은 책상을 펴놓고, 또 어느 자취방에서 빌려온 버너에 작은 냄비를 올려놓고 홍차와 우유를 끓였다. 크레파스로 쓴 피켓과 남은 페인트를 빌려 만든 플랑은 지저분했지만 인쇄소에서 매끈하게 뽑은 홍보물보다 훨씬 멋져 보였다. 부스를 차린 3일 간 각자의 친구들이 끊임없이 오고 가며 안부를 묻고 인사를 나눴다.


1년에 몇 차례씩 행사를 열기도 했지만, 우리가 가장 많은 시간을 들여 함께한 것은 ‘공부’였다. 우리 공동체가 추구하는 가치는 “앎, 자치, 연대"였다. 이 하나하나의 의미를 몸으로 느끼기 위해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예술과 페미니즘을 새롭게 공부했다. 그리고 서로의 삶에 대해 궁금해하고, 질문하고, 지지한다고 거듭 이야기했다. 이 시기의 내가 남아있는 영상이 있는데, 청년담론에 대한 세미나를 하다가 갑자기 친구들에게 질문한다. 사는 게 힘드냐고, 20대로서. 물어놓고 내가 곧장 대답한다. “근데 나는 행복해!”라고, 환희에 찬 표정으로. 마치 이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멀리 있는 고향을 떠나온 것 같았다.


사회 운동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갖고 대학에 왔지만 소속된 과의 분위기상 그런 이야기를 꺼내볼 엄두도 못 냈다.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할 때도 나는 가만히 앉아 동료가 나타나길 기다리지 않았다. 어떤 실마리라도 잡으려고 교내에 붙은 모든 수상한 포스터와 자보들을 꼼꼼히 읽었고, 혼자서라도 이런저런 행사에 찾아가기도 했다. 그러다가 운명적으로 가닿은 곳이 ‘두리반’이었다. 2010년, ‘작은 용산’이라 불리던 홍대 입구의 철거농성장. 강제집행을 당하는 과정에서 건물이 많이 상해서 곧 무너질 것처럼 허름했지만 안으로 한 발짝 들어서면 다른 세계에 온 것 같은 자유로움이 느껴졌다.


두리반 건물 뒤로 나가면 커다란 아름드리나무가 위용을 뽐내고 서서 멋진 야외무대를 만들어줬고, 노동절에 가난뱅이들의 록페스티벌이 열리는 훌륭한 장소가 되었다. 온갖 데서 모인 사람들과 둘러앉아 대낮부터 새벽까지 맥주 먹고 노래 부르는 것으로도 점거농성에 참여할 수 있단 걸 알게 해 준 곳이자, 이 거대도시의 한 귀퉁이에서 대형건설자본에 맞서는 게 결국 내 자리를 지키는 것이기도 하다는 걸 깨닫게 해 준 곳이었다. 무엇보다 이곳에서 나는 몸을 아무렇게나 흔들며 춤출 수 있었다. ‘해방감'이라는 게 바로 이것이구나. 처음 보는 사람들과 나이도 출신도 묻지 않고 이름을 부르며 친구가 되는 모든 순간이 짜릿했다. 그 강렬한 기쁨에 반해 한동안 수업도 시험도 빼먹고 매일같이 드나들었다.


계절이 바뀌고, 그 열정은 질문으로 전환됐다. 내 일상의 다른 한 축이자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 대학 안에서는 왜 이런 시공간을 만날 수 없을까. 여기서 만난 자유로운 사람들은 오로지 여기에 와야만 만날 수 있는 걸까. 공허함과 지루함을 견디며 마지못해 생활하는 게 아니라, 폼 잡고 젠체하는 대학 안에서도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다면. 변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곳에서도 작은 균열을 만들 수 있다면. 그 마음이 결국 나를 친구들에게로 이끌었다. 행사를 열고 자보를 붙이며 계속해서 신호를 보냈고, 마침내 서로를 찾아냈다.

그 후로 지금까지 고독한 적은 있어도 외로운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위기는 찾아왔다. 열심히 활동하던 주요 구성원들이 하나둘 대학을 졸업하며 모임이 서서히 와해될 때, 나는 막연한 죄책감에 오래 시달렸다. 결국 우리는 작은 실패만 반복하다가 사라지고 말았구나 싶어 좋았던 기억들마저 자조적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의 시도를,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대로 안타까운 것은 안타까운 대로 볼 수 있는 거리가 조금 생긴 것 같다.


나는 그때 ‘생활도서관'을 꿈꿨던 여성 친구들과 ‘생활공동체’를 꾸려 더 먼 미래를 꿈꾸며 산다. 이어지는 관계들 안에서 자본의 논리, 이성애 규범의 논리와 다르게 살아갈 힘을 얻는다. 일상의 터전은 이동했지만, 대안공동체를 향한 꿈은 잃지 않았다. 매일 조금씩 뿌리내리고 가지를 뻗어가면서 삶의 방향을 섬세하게 결정한다. 그 결과 결혼보다는 제도 바깥을 탐색할 용기도 내본다. “퀴어 가족*"과 함께 “자식이 아닌 친척(kin)**”(도나 해러웨이)을 만들면서 “난잡한 돌봄***"(더 케어 컬렉티브)을 실천하고 싶다. 결코 쉽지 않겠지만, 베를린의 베기넨호프****와 같은 여성 공동체들처럼 비슷한 길을 먼저 걸어간 이들의 용기와 즐거움을 참고해서 이곳에서의 꿈을 세워봐야지.  


대학 졸업을 앞둔 시점에, 두리반에서 알게 된 친구들을 따라 기본소득 운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대학에서 만난 친구들을 새로운 운동의 현장으로 초대했다. 여성에게 조건 없는 소득 보장과 경제적 자유가 왜 중요한지 함께 공부하면서 시작한 활동은 기본소득과 가족구성권 논의로 이어지며 다양한 가족의 꼴을 상상하고, 생활동반자법 제도화하고, 차별금지법을 제정하자는 주장으로도 연결됐다. 우리의 일상과 삶의 실천이 활동과 맞닿는 순환 속에 계속 존재하고 싶다. 인간, 비인간 친구들과 함께. (끝)


<각주>

*퀴어 커뮤니티에서 말하는 ‘선택 가족(family of choices)’이란 관점에서 혈연이나 이성애 결혼 관계 이외의 이유로 꾸려진 가족을 이렇게 칭해보았다.

**도나 해러웨이가 <트러블과 함께하기>(마농지, 2021)에서 제시한 슬로건 “자식이 아니라 친척을 만들자(Make Kin Not Babies)”에서 따왔다. 여기서 친척(kin)은 혈통, 계보, 생식과 관련 없는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확장한 개념이다.

***영국의 학술모임 “더 케어 컬렉티브"가 <돌봄선언>(니케북스, 2021; 80-86쪽)에서 제시한 개념으로,  에이즈 인권 활동가이자 학자였던 더글러스 크림프의 에세이 <전염병 중에 난잡할 수 있는 방법>에서 제시한 ‘난잡함(promiscuity)'이라는 개념에 근거를 둔다. “우리의 난잡함이 우리를 파멸로 이끌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우리의 난잡함이 우리를 구할 것”이라는 게이 지도자들의 말에서처럼 난잡함을 “서로에 대해 친밀감과 돌봄을 나누는 방법을 다양화하고 실험한다는 의미"로 쓴다. 그러므로 저자들이 제안하는 난잡한 돌봄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적 돌봄"의 반대항에 있는, “더 많은 돌봄”, “실험적이고 확장적인 실천”, “차별하지 않는 돌봄”,” ‘우리 가족'만이 아니라 광범위한 범주에서 가족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의 돌봄”, “모든 여성이 어머니가 되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는(될 수 있는지 없는지를 떠나) 것을 인지하고 자신의 아이들이 아닌 아이들을 볼보는 것, 지역 공동체를 돌보는 것, 환경을 돌보는 것이 동등하게 가치 있는 일로서 적절한 자원과 보상이 제공되어야 한다는 것", “우리 가족을 넘어 공동체, 시장, 국가, 인간뿐 아니라 비인간도 아우르는 초국가적 관계에 이르기까지 모든 규모의 사회 영역에서 실천”되어야 하는 것을 말한다.  

****중세시대 유럽에 널리 존재했던 ‘베기넨’(Beginen)이라는 여성 주거 공동체를 모델로 삼아 만들어진 여성주거공동체이다. 채혜원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마티, 2021) 참고하길 추천한다.


강화도 동막해변에서 석양을 바라보는 도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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