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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퀴드 글래스는 회귀일까, 진화일까

AI시대에 감각을 외치는 애플

by Jiyoon

이번 WWDC25에서 발표한 리퀴드 글래스(Liquid Glass)가 화제다. 리퀴드 글래스는 물리 세계에 존재하는 액체의 유동성과 유리의 투명성을 디지털 세계에 옮겨온 컨셉이다. 현재 접근성을 포기했다는 지적, 윈도우 비스타 에어로의 재탕이며 사치스러운 디자인이라는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애플을 향한 초기 비판은 익숙한 흐름이다. 지난 역사를 돌아보면 욕을 안 먹은 적이 없다. 홈 버튼이 없어졌을 때도, iOS7으로 넘어갈 때도 비난 받았고, 에어팟은 오랜 시간 콩나물이라고 조롱 받았으며, 아이폰X 노치 디자인은 탈모라는 놀림 속에 등장했다. 하지만 애플의 디자인은 결국 시간이 흐르면 업계 표준이 되어왔다. 리퀴드 글래스도 이 역사를 이어갈 혁신일까, 아니면 이번만은 예외일까.



가독성은 분명 문제다

글자가 진짜 안 보이긴 한다. 애플은 수년 간 접근성 기능에서 업계를 선도해왔고, 시각 장애인을 위한 보이스오버, 텍스트 대비 조정 같은 기능을 적극 도입해왔다. 접근성이라는 가치를 누구보다 수호하는 애플이 일반인의 눈에도 안 보일 정도로 가독성을 버리는 행동을 하다니 처음엔 충격 받았다. 하지만 대비를 높이거나, 배경 효과를 다듬거나, 유동적으로 컬러를 입힌다거나,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많다. 공식 버전까지 3개월 정도 시간이 있으니 지켜보도록 하자.

신기하긴 한데 안 보이긴 해...


새로운 게 없다

윈도우 비스타의 에어로와 똑같다는 지적이 있지만 두 디자인 사이엔 약 20년의 시간과 기술적 수준 차이가 있다. 개념적으로는 비슷할 수 있으나 단연 리퀴드 글래스가 훨씬 아름답고 유려하다. 비슷한 걸로 치면 구글, 삼성, 애플, 마이크로소프트는 유구하게 서로를 베껴왔기 때문에 이건 비판보다는 밈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이 밈은 재밌어서 계속 보게 된다...


오히려 아이폰에 혁신적인 기능이 부족했다. 이번 WWDC25에서 콜 스크리닝, 오토믹스, 통화 번역, 비전 검색 등이 공개됐지만, 이미 구글과 삼성에서 선보였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콜 스크리닝은 구글이 7년 앞서 개발했고, 삼성 비전과 구글 렌즈는 기능 간 연결이 거의 완성형에 가까운 수준으로 구현되어 있기 때문. 오토믹스는 스포티파이가 훨씬 잘 구현했다. 아이폰만 써온 사용자라면 모르는 기능일테니 엄청난 개선으로 느껴졌을 수는 있겠다.



구현이 부담되지 않을지

리퀴드 글래스는 실시간으로 반사, 굴절을 시뮬레이션하거나, 인터랙션에 반응해서 물방울처럼 움직이는 등 기존보다 무거운 연산을 요구한다.애플도 계속 성능 최적화를 할테지만, 애플이 대응하는 것과 업계 전체가 대응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애플이 유행을 선도해왔던 그라이디언트 텍스트, 백그라운드 블러 같은 효과들은 여러 플랫폼에서 점차 따라해왔던 기법이다. 이번 리퀴드 글래스는 어떻게 다른 디바이스와 플랫폼에서 대응할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감각 과잉과 인지 분산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디자인의 기본 명제를 생각해보자. 중요한 기능엔 중요한 표현을, 가벼운 기능엔 가벼운 표현을 해야한다. 리퀴드 글래스는 유리 효과로 인해 지나치게 시선을 끌고, 중요하지 않은 정보까지 강조된다는 비판이 있다. '글래스'의 현재 버전은 분명 인지적 부담이 될 수 있다.


리퀴드 글래스 발표와 함께 애플의 디자인 가이드라인에 다양한 UI 패턴이 업데이트되고 있다. 하단을 막고 있던 탭바나 네비게이션, 사이드바의 변화를 통해 시원하고 유동적인 패턴을 만들 수 있다. 구조적으로는 인지 부담을 줄이고 화면이 더 넓어보이게 만든다. '글래스'는 별로일 수 있지만 '리퀴드'는 꽤 괜찮은 변화인 셈. 점진적으로 최적화된 '글래스'를 찾다보면 충분히 해결될 것이라 본다.

https://developer.apple.com/documentation/




문제는 감각이 아니라 기술의 부재

이번 WWDC에서 실망이 컸던 이유는 애플이 감각을 강조하는 데 비해 기술적 진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Siri의 대규모 업데이트는 또 한 번 연기됐고, 애플 AI는 ChatGPT를 전달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반면 구글IO는 '진짜 기술'을 보여줬다. Veo, Astra, Genimi Live 등 셀 수 없이 많은 기술이 쏟아졌고, 바로 사용 가능해 감탄을 자아냈다. 요즘 사용자들은 엄청난 기술 업데이트에 익숙하다. AI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영상을 만들기까지 2~3년 밖에 걸리지 않았으니 예전보다 기대치가 많이 높아진 상태다.


디자인 결과물의 감동은 기술과 함께일 때 증폭된다. 그리고 애플의 디자인은 항상 기술과 함께 움직여왔다. 다이내믹 아일랜드는 하드웨어의 제약을 디자인으로 극복함과 동시에 새로운 경험을 제시한 사례였고, 미모지는 삼성, 메타도 따라하게 만든 기능이었다.


애플의 레티나 디스플레이는 단순한 해상도 스펙이 아니라 텍스트와 인터페이스 전체를 재설계하게 만드는 발명이었으며, 탭틱 엔진은 촉각이라는 감각 피드백을 제어 가능한 디자인 요소로 끌어올렸다. 애플 실리콘이나 페이스ID 역시 더 나은 경험을 위해 애플이 직접 기술을 만들어온 증거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 그런데 리퀴드 글래스는 어떤 기능을 따랐는가? 아직 리퀴드 글래스가 정당성을 가질 수 있는 환경은 애플 비전 밖에 없다. 비전에서 영감 받은 이 디자인 시스템을 전체 OS로 확장한 것을 실패라 보기는 어렵고, 최종 판단은 애플이 AI 업데이트를 한 후에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애플은 언제나 완성도를 끌어올리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iOS6에서 7로 넘어갈 때 플랫 디자인을 처음 본 많은 사용자들은 충격에 빠졌고, 불만이 상당했다. 당시에도 플랫 디자인에 상응하는 새로운 기능이 나왔다기보다는 전반적인 룩과 UX패턴의 변화를 만들었다. 그럼에도 전세계의 UI를 바꿔버린 컨셉이 되었고, 오랜 시간에 걸쳐 최적화했다. 리퀴드 글래스의 공식 버전도 아마 미흡할 것이며 점진적으로 완성될 것이라 예상한다.



리퀴드 글래스는 스큐어모피즘인가?

리퀴드 글래스는 스큐어모피즘으로의 회귀라는 지적도 받고 있다. 하지만 스큐어모피즘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스큐어모피즘은 현실 세계의 재료와 사물을 모방하는 기법이다. 종이, 가죽, 노트, 책장 등 실재하는 사물을 화면 안으로 끌어와 디지털 세상을 이해시킨 것이다. 이후 사용자들이 너무나 익숙해지자 스큐어모피즘은 오히려 시각적 과잉이 되어버렸다. 다뤄야하는 정보가 더 많아지면서 단순함과 효율성이 중요해진 것이다. 그리고 2010년대, 특히 iOS 6에서 7로 넘어가던 2013년 애플이 플랫 디자인을 도입하면서 모두가 평면으로 돌아가게 됐다.

https://www.applegazette.com/ios/ios-7-screenshots-before-and-after/


플랫 디자인 이후 글라스모피즘의 유행이 돌았다. 정보의 양이 넘치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공간감을 활용한 것. 그림자를 통해 집중해야될 요소를 강조하거나, 블러 효과로 중요하지 않은 정보를 가려버리는 방법, 말뜻 그래도 '유리'를 흉내내는 기법들이 사용됐다. 3D 그래픽을 활용하는 등 평면의 한계를 극복하는 다양한 시도가 이어졌다.

https://www.nngroup.com/articles/glassmorphism/


이제는 그림자와 블러 같은 시각적 기법만으로는 온전한 경험을 표현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AI의 정보 처리과정은 시각화하기 어렵고, 쏟아지는 정보의 양을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AI 인터페이스의 과도기적 형태로 애플은 더 화려한 그라디언트를 도입했지만, 더 많은 맥락을 전달하려면 UX 패턴을 자체를 새롭게 설계해야겠다는 판단을 했으리라 짐작해본다.


지금까지는 UI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도형, 색상, 타이포그래피, 레이아웃과 같은 정적인 요소로 정의해왔다. 유려한 인터랙션이 늘어났지만, 여전히 특정 레이아웃에 갇혀있고, 전형적인 UI 패턴을 그대로 사용한다.

https://developer.apple.com/design/


리퀴드 글래스는 단순히 물과 유리를 재현했다기보다는 디지털 고유의 물질을 발명한 것에 가까워보인다. 빛을 어떻게 굴절시키고, 레이어는 어떻게 변형되며, 주변 맥락에 따라 어떤 밀도를 가지는가. 그리고 이러한 물성은 어떤 위치에 어떻게 존재해야하는가. 만약 리퀴드 글래스가 성공적으로 업계의 디자인 표준이 된다면, 앞으로 디자이너는 더 넓은 감각 체계를 설계하고, 경험의 질감을 정의하는 사람이 되어야할 것이다.



새로운 물성이 왜 필요한가?

UI 디자인의 기본은 사용자의 상태를 명확하게 인식시키고, 행동의 인과를 보여주는 것이다. 무엇을 클릭해야하는지, 클릭이 된 상태인지 아닌지, 클릭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다음 페이지로 넘어갔는지, 봐야할 정보가 무엇인지. 디자인의 역할은 인지하고 행동하게 만드는 것이다.


AI를 통해 디지털 경험이 극대화되면서 이제 우리는 무엇을 눌렀는지, 시스템이 무엇을 인식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됐다.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필요할 것 같아서' 띄워주는 정보가 많아졌고, 알아서 정리해주고 알아서 추천해준다. 디지털 경험이 더욱 비가시화되고 있는 것이다. 피드백은 줄어들고, 조작감과 통제감이 약해진다. 점점 디지털과 현실의 경계가 물리적으로, 관념적으로 모호해지는 상황에서 리퀴드 글래스는 UI의 존재감을 조율하는 소재로 기능한다.


사용자의 행동에 따라 수행됐다는 것을 빛의 흐름이나 투명도 변화와 같은 감각으로 표현한다면? 인터페이스가 상황에 따라 반응하고 있다는 것을 설명 없이 전달한다면? 전환되고 있다는 것을 질감의 깊이, 명암, 흐림, 굴절로 표현한다면? 이 가정은 모두 전통적인 UI언어로는 완전히 표현하기 어려운 감각이며, 인터페이스 자체에 상태감을 입히는 실험이다. ‘지금의 UI로도 충분히 상태감을 전달할 수 있지 않냐는 의문도 충분히 들지만, 적어도 애플은 지금 당장 풀어야하는 문제보다는 앞으로 펼쳐질 미래를 상상하며, 혹은 한층 더 진화된 디자인 언어로 리퀴드 글래스를 만들어낸 것 같다.



미학적 감각이 곧 애플의 정체성

모두가 기술을 말할 때, 애플은 감각을 외친다. AI 에이전트, 멀티모달, 연산 속도 같은 개념들이 혁신의 상징이 된 지금, 리퀴드 글래스는 보기 드문 '디자인 중심' 선언처럼 보인다. 구글이나 오픈AI가 기술 그 자체로 놀라움을 준다면, 애플은 "기술을 어떻게 느끼게 만들 것인가"에 집중했다. 결국 WWDC25는 그들이 가장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준 발표인 셈이다.


애플의 장인정신은 다른 기업이 만들어내기 어렵다. 기술을 감각적으로 표현하고, 그 감각을 최고의 미학으로 풀어내는 것이 곧 애플이라는 브랜드 정체성이기도 하다. AI가 이런 인터페이스를 발명할 수 있을까? 언젠가는 가능하겠지만 지금은 인간만이 상상하고 구현할 수 있다.


최근 UI를 만들면서 효율성, 경제성에 집중하며 본능적인 아름다움을 잊고 있던 것 같다. 베타 버전을 사용해보면서, 아직은 분명 미완성이지만 유리에 비친 빛과 같은 '음미할 수 있는' 요소가 생겼고, 다시 보고 싶은 기분이 들며, 또 눌러보고 싶은 느낌이 든다는 게 인상적이다. 지금은 다소 쓸데없어 보이지만, 이러한 정체성을 끝까지 고수하는 기업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게 여전히 애플이라는 사실이 의미있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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