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는 어떤 상황에서도 악을 쓰는 법이 없었다. 소설책을 읽어봐도 그렇고, 주변 사람들이 부모님과 헤어지면서 겪은 이야기를 들어봐도 그렇고, 사람이 죽음을 앞두고 섬망을 겪으면 가장 고통스러웠던 기억으로 돌아가서 소리를 지르거나 몸부림을 친다고들 했다. 그러나 엄마는 또 순하게 그랬다. “저거 봐라. 은혜야. 쥐가 지나간다.”
박완서 작가가 쓴 소설 <엄마의 말뚝>을 보면 아흔이 다 된 나이에 큰 수술을 받은 어머니가 섬망을 겪는 장면이 나온다. 소설 속 어머니는 6.25 전쟁 당시 아들이 총에 맞아 죽던 시간으로 다시 돌아가 아들을 살려내 보겠다고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대결을 벌이며 악다구니를 쓴다.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그때 그곳으로 돌아간 것이다. 늙어갈수록 아름다웠다던 어머니가 링거 바늘이고 뭐고 다 뽑아낸 채 악귀처럼 돌변해서 딸과 몸싸움을 벌이기도 한다.
그러나 엄마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순하게 그랬다. “저거 봐라. 은혜야. 쥐가 지나간다.” 엄마가 마지막으로 입원을 한 병원이었다. 링거를 꽂지 않은 엄마의 손이 중환자실 천장을 가리켰다. 새하얀 벽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엄마, 무섭게 왜 그래? 쥐가 어딨다고 그래?" ”저거 봐라. 쥐가 지나가잖아. 저기도 한 마리 있다.”
하고 많은 얘기 중에 ‘쥐’ 같은 거나 얘기하고 떠난 엄마가 속상했다. 안 그래도 말이 어눌하던 엄마였다. 소설 속 주인공처럼 병실을 휘젓고 “안 된다. 이 노옴”하고 호통을 치지는 못하더라도, 사슴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잡아먹히는 듯한 목소리로 기껏 꺼낸 말이라는 게 ‘쥐가 지나간다’ 같이 하나마나한 얘기라는 것이 화가 났다. 나를 눕혀놓고 장화홍련전이고 콩쥐팥쥐고 옛날이야기를 그렇게나 들려주던 우리 엄마였는데 말이다.
엄마의 머리는 삐뚤고 납작했다. 이가 나지 않은 아기였을 적부터 자기 욕망을 드러내고 울음을 터뜨리거나 소리 지르는 것에 능숙하지 못했던 것이 분명했다. 머리 모양이 그렇게 굳어질 때까지 울지도 보채지도 않는 아기 말이다. 아니면 누군가 엄마의 울음을 철저히 무시했거나. 엄마는 말을 할 때마다 입이 돌아가고, 손을 내밀 때마다 팔 근육이 경직되고,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몸이 꼬이는 뇌성마비였다. 뇌병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지만 않았더라면 엄마도 나처럼 동그란 뒤통수를 가질 수 있었을까. 태어나서 백일동안 밤낮이 바뀐 나를 재우느라 땅에 뉘일 새도 없이 업고 또 업었더니 아주 짱구 머리가 되었더라는 이야기는 엄마가 자주 하던 이야기 중의 하나다.
외할아버지는 의사였다. 병원도 꽤 잘 되었던 것 같다. 동네 사람들이 밥 먹듯이 굶는 와중에도 러시아식 굴라쉬를 요리해 먹고, 깡통에 든 미제 햄이며 찬물에 담가 둔 수박을 여사로 먹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동생들이 그 새빨간 수박 속살을 베어 먹을 때 엄마는 시퍼런 수박 껍질을 갉아먹고, 동생들이 자기 방 책상에서 학교 숙제를 마치고 잠을 청할 때 엄마는 학교는커녕 식모 방에서 식모와 함께 잠을 자야 했다고는 하지만 말이다. 엄마의 새엄마는 몸이 불편한 전처의 자식과 자기가 낳은 자식을 똑같이 대하는 것을 어려워했던 것 같다. 무엇보다 과년한 전처의 자식을 평생 부양해야 하는 상황을 가장 두려워했던 것 같다. 모든 조치를 마쳤으니 평생 절에 가서 살라고 했다고 한다. 교회를 다니던 엄마에게 말이다. 절에 보내져서 지옥에 가느니, 자살을 해서 지옥에 가겠다던 엄마가 기어이 찾아낸 방법은 그나마 교회를 다니는 동네 친구의 오빠에게 시집을 가는 것이었다. 아무튼 이건 모두, 엄마의 동네 친구이던 고모에게 들어서 알게 된 내용이다. 엄마는 절대로 나에게 ‘어떤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외할아버지의 험담이 될까봐 그랬던 것 같다. 나는 엄마가 시어머니 험담을 하는 것도 들어보지 못했다. 엄마는 그런 사람이었다.
필립 로스의 소설 <울분>에 보면 ‘코셔 정육점’이라는 것이 나온다. 유대인들의 율법에 맞는 정결한 고기를 파는 정육점이다. 엄마는 마치 코셔 정육점에서 파는 ‘정결한 고기’ 같다는 생각을 했다. 율법에 따라 피를 모조리 뽑아낸 고기처럼, 자기 자신의 욕망이랄 것은 하나도 없이 금지된 것, 무조건적 금기만을 피해, 어떤 구원에 다다르려 하는 사람 말이다. 본인은 그렇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해도 말이다.
엄마는 자기 안에 그어진 ‘금’을 절대 밟는 법이 없었다. 나를 서른여덟에 낳았다고는 해도, 내 평생 엄마가 벗어낸 생리대를 한번이라도 목격한 기억이 없다. 한 집에 살았던 고모에게도 물어봤지만 답은 같았다. 뿐만 아니다.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반격에 대한 걱정 없이 언제든 엄마를 공격할 수 있었다. 신체적인 결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엄마는 소리를 지르는 일도, 손바닥을 휘두르는 일도, 억지를 부리는 일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엄마의 눈앞에 쥐를 펼쳐 보이게 한 수술은 화상 때문이었다. 매일 저녁 다니던 특별기도회 때문에 피곤했던지 잠이 쏟아져서, 성경 퀴즈를 풀기 전에 커피를 마시겠다고 뜨거운 물이 담긴 주전자를 들고 움직이다가 그만 넘어져버렸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그렇게나 착실히 성경 퀴즈를 풀고, 특별기도회를 빠지지 않고 출석하면서까지 엄마가 간절히 기도했던 것은 아마도 하나밖에 없는 딸, 나의 안녕이었을 것이다.
“저거 봐라. 은혜야. 쥐가 지나간다.” 엄마와 헤어지고 몇 년이 지나고서야 깨달았다. 엄마는 그게 힘들었구나. 쥐가 지나다니는 집에서 사는 것이 힘들었구나. 대궐 같은 집에서 살던 엄마가 아빠를 만나서 쥐가 우글거리는 집에서 살아야 하는 시간이 그렇게 무서웠던 거구나. 그런데 나는 또 엄마의 말을 이제야 알아들었구나.
몇 년이 지나 어렵사리 되돌리고 되돌린 끝에 엄마가 한 말을 알아듣게 되었다고는 해도 그리 기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쥐를 보고 놀랐던 그때 그 순간에도 엄마는 또 그랬을 것이다. "저거 봐요. 여보. 쥐가 지나가요." 언제나 그랬듯이 엄마가 혼자서 집어삼켜버린 두려움이나 공포, 분노 같은 감정들은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죽음 이후에도 남들만 좋았던 그 ‘착한 사람’으로만 엄마를 회상하는 일은 이제 그만 두고 싶어졌다. 그보다는 내 눈에 보이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뒤늦게나마 감지해봄직한 엄마의 또 다른 감정들을 따라가 볼까 한다. 착한 딸, 착한 아내, 착한 엄마, 착한 친구, 착한 이웃이 아닌 '김수영'의 욕망과 삶을 오롯이 기억하고 기록해보고 싶어졌다.
2021년 10월 6일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