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805 in 1pagestory
내게는 남에게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는 능력이 있었다. 아무도 믿지 않았지만, 세상의 모든 책들은 내게 말을 걸어왔다. 가끔은 그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애써야 했고, 어느 날인가는 점점 그 소리를 듣지 않게 되었다.
그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유난히 내 귀를 간질이던 소리에 책꽂이를 무심코 바라보게 되었다. 언제 거기 꽂혀있는지도 몰랐던 책이 내 눈에 띄었다. 펄쩍펄쩍 뛰는 듯한 그 모양에 난 별 수 없이 그 책을 집어들었다. 브라질 출신 작가의 이름도 참 긴 책이었다. 굳이 읽으려 하지 않아도 책은 내게 자신의 이야기를 말해준다. 하지만, 오랜 기간 그 소리를 안 듣는 노력을 해왔기에 오늘은 책의 활자들을 눈으로 음미해본다. 책을 읽어본 지가 얼마나 되었던가. 활자들이 귀가 아니라 눈에 콕콕 박혀온다.
내 시선은 ‘사랑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 나서야 한다. 우리가 사랑을 구하는 순간, 사랑 역시 우리를 찾아 나서기 때문이다.’라는 문장에서 멈춰버렸다. 순간 숨조차 쉴 수 없는 먹먹함이 나를 감쌌다. 그리고 나는 사랑을 찾아 나섰다. 나를 찾아 나선 사랑을 만나기 위해.
나는 다시 그를 보고 그가 내 사랑임을 알아봤다. 책의 소리를 들을 수 있듯이 그의 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오랫동안 그 사랑을 구해왔기에 어렵지 않게 알아봤는지도 모르겠다. 첫눈에 못 알아본 것은 그동안 책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아 왔기 때문인 것 같다.
“ 나 당신을 사랑해요. ”
망설임 없이 그 말을 그에게 쏟아냈다. 그는 나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없는 눈빛으로. 입 밖으로 내보낸 나의 말은 그에게 가서 닿지 않은 모양이다.
내 손을 뻗어 그의 심장에 대어보았다. 내 손의 떨림이 그의 심장에 닿길 바라면서. 하지만, 느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부들거리는 나의 손뿐. 그의 심장은 뛰고 있지 않았다. 그는 분명히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내게 그의 심장은 뛰어주지 않았다.
세상엔 죽은 사랑도 있는 거라고. 그는 내게 무미건조하게 말을 건넸다. 자신의 심장은 3년 전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뛰지 않았다고.
그 순간 내 귀에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저 멀리 어딘가에서. 손을 대었던 그의 심장에 귀를 가져다 대보았다. 그 소리는 너무도 아련해서 온 신경을 다 집중해서야 겨우 들렸다.
“나를 뛰게 해주세요. 나를 살려주세요.”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누군가 내게 외치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본 그의 얼굴엔 조금도 미동이 없었다.
죽은 사랑도.
또 다른 사랑을 만나.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거라고.
마음속의 말을 그의 마음 속에 전했다.
그의 심장이 사랑을 구하고 있기에 내가 찾아온 거라고.
그와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에 책은 내게 마지막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세상에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아요. 삶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도 존재했고,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여전히 존재할 것이예요. 사랑도 마찬가지죠. 사랑은 이전에도 존재했고 앞으로도 영원히 계속될 거예요. 세상의 모든 사랑이야기는 닮아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