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네 ‘사회문제’와 그 해결에 관한 단상
얼마 전 내가 사는 지역에서 도시 내 특정 관광 개발구역의 문제해결을 위한 토론회(정확하게는 '전주 한옥마을 관광실태 개선을 위한 대토론회')가 열렸다. 내로라하는 국회의원, 시의원, 언론인, 공무원, 연구자, 거주민, 상인 등 이곳에 관련된 대부분의 당사자들이 대거 모였다는데, 토론회라기보다는 정치인 인사치레를 위한 구색 맞추기식 행사로 시작하여 결국 주민과 상인들이 고성을 지르며 정치와 행정을 성토하는 자리로 마감되었다고 한다. 그처럼 당사자들이 뜨겁게 자신의 입장과 이해관계를 주장하고 토로할 집담의 자리가 많지 않았기에 토론회 개최만으로도 긍정적이었다는 평가도 있었고, 입장 차이만 확인하고 서로에 대한 불신만 더 공고해졌다는 비판도 있었다. 한날한시 벌어진 자리를 놓고도 이처럼 극명하게 의견이 엇갈릴진대, 어떤 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평가와 해석이야 오죽하랴.
여러 사회문제에 대해 다양한 사람들과 토론하거나 온라인 상에서 사회적 의제가 명멸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내가 느끼는 어떤 회의감 같은 게 있다. 단일한 주제의 ‘문제해결’을 위해 한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보이는 양상, 주장하는 내용이 천태만상인 것을 수차례 목격하면서 드는 복잡하고 맥락 없는 어떤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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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이슈(현안)에 대한 자각이 아예 없는 사람과, 이 문제를 문제라고 여기지 않는 사람과, 문제를 인식은 하지만 우선순위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 그 틈에서 이 문제가 실은 모든 문제의 기저에 자리하는 원흉이며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모여 있을 때, 그중의 누군가가 자기 확신을 통해 지속적으로 주변을 설득하고, 결과적으로 뜻을 모아가는 과정은 '실제로' 가능한 일일까. 어쩌면 사회적으로 어떤 문제에 대해 합의하고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이란 실존하지 않는 게 아닐까. 어쩌면 인간은 스스로의 편의를 위해서 특정한 행위를 통해, 혹은 현상의 사소한 변화를 통해 문제를 인지하고, 해결한다고 ‘관념적으로’ 믿어버리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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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인류사회는 점진적으로 민주화되고 기술발전과 더불어 자연과 공생하기 위한 방법을 고안해왔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것은 유전자가 의도 없이 돌연변이를 반복하고 다양한 환경요인에서 자연선택적으로 적합한 인자가 활성화되어 오늘날까지 진화해왔듯, 어떤 사회적 의도도 없이 그저 그러할 수밖에 없었던 방향으로 흘러온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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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래 인간은 끊임없이 자연을 이용(이라 쓰고 '착취'라고 읽는다)하고 학대하며 스스로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자본을 축적하는 방향으로 전진해왔다. 자연은 나와 정서적‧물질적으로 격리된, 나의 생존과 발전을 위해 이용됨이 마땅한 ‘수단’으로서 존재할 뿐이다. 나 이외의 타자를 수단화하는 사고방식은 ‘자연’을 벗어나, 동등한 인격체에도 유사한 방식으로 적용된다. 인간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사람들은 계급, 성별, 자산, 연령, 경력 등에 따라 주변인들을 차곡차곡 서열화하고, 그 속에서 어떻게든 자신을 상위 서열에 놓기 위한 방법을 강구하며 살아간다. 근현대에 들어서는 가장 보편적으로 합의된 서열화의 기준이 ‘자본’ 일뿐이다. (오늘날 권력과 명예 등은 결국 자본에 종속되며,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조차 자본주의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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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내 눈에 보이는 어떤 '사회적인 문제의 해결’은 그것에 관계된 개인 각자가 추구하는 다양한 욕망을 충족시켜 줌으로써 서로 해결된 것처럼 믿도록 하는, 정치정략적인 관념으로서만 존재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이미 ‘나’라는 개인의 눈에는 사회 구석구석, 일상 곳곳에 다양한 문제들이 포진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목소리 내지 않는 사람들에게 문제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여성과 노인의 차별, 청년(미성년) 착취, 장애와 동성애와 빈곤의 혐오, 지역과 농촌(농민) 착취, 동물 학대, 자연환경 훼손 행위 등이 숨 쉬는 것처럼 빈번하게 벌어지는 우리 사회에서, 정작 이 문제를 거론하는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할뿐더러 목소리 내는 사람들조차 대개 ‘이해관계’를 주장하거나 ‘덜 중요한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정작 당사자에게는 생존에 관한 문제일 수 있는데, 그것이 비당사자에 의해 '이해관계'의 문제로 환원되는 순간 당사자(특히 비주류)의 목소리는 허망하게 사회성과 공공성을 박탈당한다. (이를테면, 청년문제에 공감한다면서 청년에게 끊임없이 사회적으로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말하는 기성세대들에게, 정치적 행위를 하지 않는-혹은 못하는- 당사자들의 권리는 침해당해도 괜찮은 것인지 나는 종종 묻고 싶다. 청년의 권리는 청년만이 주장하고, 해결할 수 있는 것인가. 장애인의 문제는 장애인들이 스스로 깨치고 알아서 해결해야 하는 걸까. 무서운 논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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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비해 ‘경제’ 혹은 ‘자본’의 문제는 대단히 쉽게, 간단히 사회문제의 단상에 오를 자격을 얻는다. 국가경제, 지역경제, 경제 활성화는 언제, 어딜 가든지 사람들에게 사회문제의 우선순위로서 입에 오르내리고, 문제해결의 최종 목적지로 추대된다. 돈이 없으면 집도, 음식도 살 수 없고, 인간적인 삶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사회적인 담론은 결국은 ‘돈’, ‘예산’ 혹은 ‘경제’ 문제로 귀결된다. 사람들의 사고 흐름이 그렇게 편제되어 있기도 하고, 그래야 최소한의 사회적 관심이라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현실성을 강조하는 실리적인 사람들은 인간이란 ‘돈’이 있어야 움직이고 따라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실제로 돈이 필요한 상황으로 문제를 끌고 간다. 그렇게 ‘돈’에 대한 사회적인 믿음은 점점 강화된다. 먹고 삶=돈, 돈=문제해결, 즉 '먹고 삶=문제해결'이 된다. 이 논리는 흥미롭지만 대단히 위험하다. 삶의 문제를 곧 먹고사는 문제로 단순화하고, 인간의 삶에서 '생명'은 배제한 채 '생존'만을 염두에 두기 때문이다. 존재(생명)의 가치는 '돈'이라는 징검다리를 건너면서 자기도 모르는 새 생존 경쟁으로 치환된다. 지금 우리의 삶과 사회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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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그 복잡하고도 단순한 사회문제의 알고리즘 속에서 자신의 ‘상위 서열’을 위해 정략적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사회문제와 그 해결이란, 본인 개인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써 존재한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을 ‘내가’ 대신 해결함으로써(혹은 해결을 위해 노력함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자신에 대한 사회적인 호응과 선호를 얻고, 그것을 개인의 성취로 적립하며, 그로 인해 자신의 자존감 내지는 사회적 서열이 높아진다고 믿는다. 이처럼 ‘사회적인’ 방식을 통한 개인의 성취를 도모하는 사람에게는 그 문제에 대해 같이 활동하는 사람들도 더불어 수단화된다. ‘사회적’인 문제 해결이라는 개념은 그의 활동 과정에서 불현듯 사라지고, 그 행위를 지속하고 성취하기 위한 당위와 욕구만이 남는다. 그렇게, 몇몇 사회운동 혹은 시민운동 현장에서는 두드러진 개인만 남고 정작 ‘사회’는 소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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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가서, 우리 사회에서 사회문제의 인식과 해결은 실제로 가능한 걸까. 문제가 아닌 것을 ‘설득’해서 문제로 믿게 만드는 것과, 문제인 것을 모르는 사람에게 ‘설명’을 통해 문제임을 알리는 것의 차이는 어떻게 구별해야 할까. 나는 과연 제대로 사회문제를 인식하고 있는가. 어쩌면 실존하는 진짜 사회문제란 없는 게 아닐까.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의 독선과 합리성에 대한 맹신은 아닐까. 문제를 알리고, 문제에 대한 사회적인 합의를 모으고, 해결을 위한 방안을 함께 모색하고, 그중에 우선순위를 정하고, 다 같이 실천해나간다는 것... 나는 그 과정을 어떻게 확신하고, 무엇으로써 이 활동을 지속해 나가야 할까. 사회적 상위 서열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자본이나 권력에 대한 욕망도 거의 없는 ‘나’는 무엇을 위해 누구와, 왜 이 일을 해야만 하는지 가끔 헷갈리고, 그로 인해 느닷없이 서글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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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회성이 증발된 사회운동은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사회성이란 타자에 의해 강요되는 것도, 억지로 조성되는 것도 아닐 것이다. 청년활동가, 시민운동가로서의 나에게는 사회성을 기반으로 형성된 강력하고 지속적인 문제해결의 당위와 욕구가 필요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쉽사리 '사회화'된 자신의 문제에 대해 직면하기를 꺼려한다. 구조적으로 부패하고 변질된 우리 사회의 진실을 애써 들여다보고, 거기에 내가 속수무책으로 얽혀 있다는 사실을 수긍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일이다. 비단 미욱하고 비도덕적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이 원래 그렇다. 그런 사람의 존재와 생리를 인정하고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사회운동은 시작되어야 하지만, 사회운동을 한다면서 인간을 근본적으로 불신하고, 주변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본다. '사람 중심'의 사회를 원한다면서 정작 자기의 의견에 반하는 주변인들을 증오하고 저울질하는 '자기중심'의 활동가들을 보면 어디서부터 그의 오류를 짚어야 할지 난감해진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의 삶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왜 그렇게 되었는지, 잘못을 바로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을 건네는 것부터 시작하여 자꾸만 망각하고 등 돌리는 이들에게 끝없는 설명을 반복해야 하는 고단함. 더 세련된 설명을 고민하고, 더 깊은 통찰을 가다듬어야 하는 겸손함. 그것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일상화하는 성실함. 사회화된 사회운동은 그래서 너무나 어렵고, 또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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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오늘도 사람을 만나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나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나야,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니. 너의 진짜 문제는 뭐니.
손가락질은 돌고 돌아 결국 나에게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