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필의 시작, <서검은구록>
1955년 2월 8일 김용은 뉴 이브닝 포스트에 <서검은구록>을 이듬해 9월 5일까지 연재했다. 그의 첫 번째 무협소설이었다. 친구였던 무협소설가 양우생의 권유로 쓰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사실 여부를 떠나 김용 독자들에게 <서검은구록>은 양우생의 작품과 비슷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서검은구록>은 반청복명을 기치로 내건 홍화회와 건륭제, 청에 맞서는 위구르인들의 투쟁을 주된 이야기로 다룬다. 선악이 명확하게 대비되기에 줄거리와 인물도 비교적 단순하다. 덕분에 이해하기는 쉽지만 현대적인 느낌은 좀 떨어진다. 홍화회도 조정에 대항하는 비밀조직인 만큼 첩자나 배신자가 있을 법하지만 그런 인물은 찾아보기 어렵다. 악인은 청인이거나 청에 투항한 한인이며 선인은 한인이거나 한인에 협조하는 이들이다. 반청복명의 대의와 홍화회 내부의 의리는 금과옥조처럼 받들어진다. 그렇기에 <서검은구록>은 무협소설의 원류 격인 <수호전水滸傳>과 비슷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럼에도 <서검은구록>에는 이후 김용 작품 세계를 떠받치는 토대를 엿볼 수 있다. 작품의 전반은 반청복명을 내건 홍화회의 주요 인물들이 납치된 형제를 구해내기 위해 대륙을 종횡무진 하는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이 과정에서 강호의 도덕과 의리는 물론 홍화회의 무자비할 정도로 강력한 내부 규칙이 그려진다. 강호라는 세계에는 선과 악, 원한과 은혜, 명분과 협의가 법과 질서와는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조정의 썩은 관리가 간섭할라치면 강호인들은 은원을 제쳐두고 단결하여 대항하기도 한다. 이러한 강호의 논리는 국가와 주류 사회의 질서에 대립하는 기층 민중들의 세계를 빗대는 것이기도 하다.
내면에 갈등을 감춘 젊은 남주인공과 활기 넘치고 주도적인 여주인공 등 김용 소설의 전형적인 인물도 등장한다. <서검은구록> 전반의 여주인공은 이원지와 주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들은 사실 활달하다기보다는 제멋대로이고 고집이 세어 사방에 민폐를 끼치는 사고뭉치에 가깝다. 심지어 주기는 사람 죽이기를 서슴지 않아 <수호전>의 살인마 이름을 딴 ‘이규’라는 별명도 갖고 있다. 호기심에 넘쳐 홍화회에 뛰어든 이원지 때문에 진가락의 애정 관계에 변화가 일기도 한다. 이원지가 남장을 하고 다니지 않았다면 진가락과 곽청동이 아무 문제없이 맺어졌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렇듯 김용 작품에는 남들과 전혀 상관없을 듯한 개인적인 행동이 예상외로 큰 줄기를 틀어지게 하는 장치들이 제법 등장한다. 대중이 읽는 무협소설 속에서 그런 문제들은 어떻게든 해결되지만, 막상 현실 속에서 일어난다면 한 사람의 일생이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빠져드는 경우가 얼마나 많을까.
<서검은구록>의 줄거리는 단순하지만 등장인물들이 제법 많고, 게다가 인물들끼리 이름 대신 ‘셋째 형님!’, ‘다섯째 아우야!’라고 불러대니 구별하기가 만만치 않다. 작품 초반에 납치되는 문태래를 구해내기 위해 겪는 홍화회 사람들의 모험도 작품의 3분의 2를 넘어가서야 겨우 해결에 이른다. 그때까지 <서검은구록>은 그럭저럭 흥미롭게 진행되는 평범한 무협소설에 가깝다. 그러다 작품의 무대가 신강 위구르 지역으로 옮겨지면 갑자기 분위기가 달라지면서 독자의 눈을 잡아끌기 시작한다. 억눌러 왔던 주인공 진가락의 고민이 본격화하고 사막을 배경으로 위구르족과 청나라 군의 전쟁이 펼쳐지면서 김용의 심상치 않은 필력이 발휘된다. 특히 진가락 일행이 늑대 떼와 장소중 일당에게 쫓기는 장면은 향후 신필로 성장할 ‘싹수’가 보이는 대목이다.
<서검은구록>에는 역대급으로 꼽힐 만치 참혹한 전쟁 장면도 등장한다. 곽청동은 군대를 지휘하여 위구르인 지역에 침입한 청나라 군을 유인하여 모래 바다에 빠뜨려 죽인다. 서서히 빠져 죽어가는 청나라 군에 대한 묘사는 한족과 이민족의 대립 구도를 떠나 전쟁의 참혹함을 뼛속 깊이 느끼게 한다. 민족이라는 뿌리를 떠날 수는 없지만, 그것을 초월한 보편적인 차원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김용은 그 차원을 독자에게 직접 들이대는 대신 젊은 주인공의 내적 고민을 통해 공유하는 편을 택한다.
전설이 된 용비와 신강 위구르
김용 팬들이 벌이는 수다 중 가장 흔한 주제는 다름 아닌 “누가 김용 세계의 최고 미인인가?”일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김용이 직접 답했다고 한다. “내 작품 속 인물 중 가장 아름다운 여성은 향향공주다.” 무협소설이란 어디까지나 대중성을 충족시켜야 하기에 현실에 드문 미인들을 등장시키는 것은 필수적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서검은구록>의 향향공주 미모에 대한 묘사는 상식을 넘어선다. 가령 적진에 사신으로 간 향향공주에게 병사들이 넋을 잃자 화가 난 장군은 병사들의 목을 쳐 버린다. 그 수급을 보고 향향공주가 눈물을 흘리는데, 그 모습에 병사를 죽인 도부수가 미안하다며 자결을 해 버린다. 더욱 슬퍼하는 공주를 보며 장군조차 미안함을 느끼고, 제장들조차 향향공주의 눈물을 보며 자기도 목이 잘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이다.
한국에 출판될 당시 <서검은구록>의 제목은 한때 <청향비>로 소개되었는데 청향비란 바로 향향공주를 가리키는 말이다. 실제로 건륭제는 위구르족 출신 용비 화탁 씨(容妃 和卓氏)를 후궁으로 거느렸다. 전설 속에서 향비라고 불리던 여성이다. 건륭제는 용비 외에도 조선 출신 김옥연을 비롯하여 수많은 후궁을 두었고 그중 주요 인물들의 초상화를 남겼다. 그 초상화를 그린 사람은 다름 아닌 이탈리아 출신의 선교사 카스틸리오네(Giuseppe Castiglione/郞世寧, 1688~1766)였다. 덕분에 요즘은 인터넷에 이미지 검색만 해도 당시 황제와 황후, 후궁들의 얼굴 생김새를 자세하게 뜯어볼 수 있다.
물론 용비의 초상도 남아 있는데 워낙 전설적인 색채가 두껍게 입혀진 인물인지라, 과연 실제 초상인지는 아직도 의견이 갈리는 듯하다. 어쨌든 카스틸리오네가 그린 용비의 초상은 <향비융장상香妃戎裝像>이라고 불린다. <향비융장상>은 머그샷 같은 다른 후궁들의 초상화와 완전히 다른 화풍이다. 그림 속의 향비는 비단옷 대신 갑주를 입고 허리에 손을 짚은 당당한 모습이다. 커다란 눈과 높이 솟은 콧날, 조그마한 얼굴 크기로 보아 전형적인 한족 생김새와 확연히 다르다. 일설에는 이 그림을 보고 건륭제가 홀딱 반해 당장 데려오라고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어쩌면 김용은 <향비융장상>을 보고 곽청동과 향향공주를 생각해 냈을지도 모른다. 젊고 순수한 향향공주와 절륜한 책략을 구사하는 여장군 곽청동의 이미지 둘 다 이 그림 속에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용비에 대해서는 중원과 위구르 지역에서 각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중국에서 용비는 카쉬가르의 지배자이자 중앙아시아 이슬람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실존 인물인 아파크 소자의 손녀인 이프라한이다. 이프라한은 북경으로 가는 여행 도중 몸에서 나는 향기를 유지하기 위해 매일 낙타 젖으로 목욕을 했다고 한다. 황궁에 도착한 이프라한은 정원과 별궁을 하사 받았지만 향수병에 걸렸다. 그러자 건륭제는 처소 바깥에 모스크와 작은 오아시스, 위구르식 장터를 지어 고향을 보듯 내다볼 수 있게 해 주었다. 이렇듯 극진히 대접받던 이프라한은 금빛 대추가 열리는 나무를 하사 받고 마침내 책봉되었다. 사망 후 건륭제의 명으로 그리던 고향 카쉬가르에 묻혔다.
한편 위구르 지역의 용비 이야기는 좀 어두운 편이다. 위구르 지역 전설에 의하면 용비는 아파크 소자의 손녀가 아니라 야르칸드 칸국, 지금의 위구르 일부이자 타림 분지 일대를 지배한 왕의 딸이다. 건륭제의 명에 따라 위구르를 정벌한 장군 조혜가 용비를 데려왔으나, 용비는 건륭제와의 잠자리를 피하기 위해 옷소매를 잘라 몸을 묶었으며 최후에는 독살당했다. 또는 황태후가 불러 소원을 묻자 자살하고 싶다고 대답하여 그대로 되었다고 한다.
두 이야기 모두 상징하는 바가 다양하다. 중원 이야기 속에서 용비는 고귀하고 신비로운 여성으로 그려진다. 건륭제는 위구르의 종교 이슬람을 인정하고, 다산의 상징인 대추나무를 선물하여 양 지역의 결합을 도모한다. 확실히 중국의 용비 이야기는 낭만적이며 청과 위구르의 결속을 다지려는 의도가 내비친다. 그렇지만 위구르 전설 속의 용비는 비교적 신분이 낮은 데다 황제의 총애를 거부한다. 지역 화합에 대한 시각차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다.
실제 향비가 어떠한 인물인지는 알기 어렵지만 건륭제가 용비를 아낀 것은 사실로 추정된다. 근거는 재미있게도 당시 조선에 있었다. 청을 방문 중이던 홍대용은 건륭제의 황후가 실질적인 권한을 모두 빼앗기고 냉궁에 갇힌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감금당한 황후는 이듬해 사망했는데, 건륭제는 죽은 황후를 황귀비로 격하시켜 장례를 치르게 했다. 이에 전국에서 반대 상소가 빗발쳤다고 한다.
홍대용의 기록에 따르면 한 관원이 황후의 보석을 전당포에 맡겼으며 황후의 서신도 갖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황후의 밀통이 의심되는 상황이었다. 여론은 대개 건륭제가 총애하는 후궁이 꾸민 음모라는 설로 기울었다. 밀통이 사실이라면 즉시 폐위를 했지, 황태후에게 불효했다거나 머리카락을 잘랐다는 궁색한 이유를 들어 감금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슷한 이야기를 박지원도 기록했다. 그에 따르면 음모의 배후는 회후(回后), 회족 출신 후궁이다. 회족이란 신강 위구르의 중국인 무슬림이니 용비 화탁씨를 지목하는 것이다.
당시 영조가 이 사안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으며 홍대용도 관련 첩보를 입수하느라 꽤나 고생한 듯하다. 홍대용이 접촉한 청 관리들이 하나같이 목이 날아간다며 입을 다물었기 때문이다. 영조는 건륭제가 신하들의 간언에 귀 기울이는지도 자세히 알고 싶어 했다. 간언이 받아들여진다면 통치가 건강하다는 증거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건륭제는 간언을 모두 물리쳤고 황후 사후에 새 황후를 세우지도 않았다. 건륭제 사후 청에는 딱히 명군이 나오지 않았으니, 영조의 예상이 들어맞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지금까지 카쉬가르에는 향비묘라는 유적이 남아 있으며 주요 관광지로 꼽히고 있다. 물론 실제 향비가 묻혀 있는 곳은 아니며, 아파크 소자와 그 후손의 무덤이 향비묘라고 불리는 것뿐이다. 카쉬가르는 신강 위구르의 최서단으로 엄연히 중국 영토이지만 좀처럼 중원의 문화가 느껴지지 않는 지역이다.
신강 위구르는 오랫동안 중원이 서역이라고 불러온 곳이며, 건륭제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중국 영토가 되었다. 강력한 군주였던 옹정제도 신강 위구르에 자리 잡은 준가르족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준가르족을 제압하고 위구르 지역을 정복한 황제는 다름 아닌 건륭제였다. 건륭제는 준가르족을 멸절시킨 뒤, 해당 지역 개발을 위해 한인들에게 대거 이주를 장려했다. 재미있게도 이때 반청복명 운동을 하던 한인들도 위구르 지역으로 이동했다. 건륭제의 의도와 관계 없이 청에 반감을 지닌 자들이 위구르로 모이게 된 셈이다.
<서검은구록>에서 반청복명 한인들과 탄압받던 위구르인들의 유대감은 진가락과 향향공주의 사랑으로 표현된다. 이 사랑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진가락은 향향공주를 위해서라면 이슬람교로 개종하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둘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향향공주는 자살한다. 향향공주의 시신은 관을 열어 보니 온데간데 사라졌는데, 이는 선녀가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처럼 김용은 향향공주를 용비처럼 전설적인 인물로 그렸다. 향향공주가 꽃을 매일 집어 먹어 몸에서 향기를 뿜어낸다는 설정도 그렇다. 실제로 옛 중국에서 이슬람교는 꽃의 종교(花敎)라고 불리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김용은 작품에 서역을 자주 등장시켰다. <백마소서풍白馬嘯西風>는 투르판에 있었던 고창국을 소재로, <천룡팔부天龍八部>의 일부는 서하국을 배경으로 삼기도 했다. 신강 위구르도 엄연히 중국 역사와 전통의 일부를 차지한다는 의식이 반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현재 중국은 위구르인을 극심하게 탄압하여 세계의 지탄을 받고 있다. 죽기 직전, 김용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한족의 정신승리, 건륭제 출생의 비밀
김용의 고향 절강에는 전당강(錢塘江)이 있다. 항주(杭州)를 지나 동중국해로 흘러드는 688킬로미터에 이르는 강이다. 전당강보다 바닷물의 수위가 높아지면 강물이 역류하는 조석 해일 현상이 발생하여 항주에 홍수를 일으킬 정도다. 때로는 2, 3미터에 이르는 높은 해일이 올라오기도 한다. 이 해일을 진정시키고자 육화탑이 지어졌는데 <수호전>에 등장하는 노지심이 이 탑 안에서 입적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서검은구록>의 주인공 진가락은 돌아가신 부모님의 옛집을 찾아갔다가 건륭제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다. 실은 건륭제는 한족인 해녕 진 씨의 아들이며 옹정제가 딸과 바꿔 친 것이었다. 그래서 건륭제는 친부모의 사당을 으리으리하게 지어 은밀히 공양하고 있었다. 부모의 사당에서 친형제로서 처음 마주한 진가락과 건륭제는 해일이 미친 듯이 몰아치는 전당강 가를 말없이 걷기만 한다.
건륭제가 한족이라는 설은 물론 허구에 불과하다. 건륭제의 모후는 아버지의 지위가 한미했지만 엄연히 만주인 뉴호록 씨이며 고조부 대에서는 홍타이지의 장인(즉, 누르하치의 사돈)을 배출했다. 사실 따져보면 오히려 한족 혈통은 건륭제의 조부 강희제가 이어받았다. 강희제의 모후가 요동 동 씨로서 한족 출신 만주인이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청 왕조가 멸망하기까지 건륭제 한족설은 끊이지 않았다. 심지어 건륭제의 남방 순행은 친부모를 만나기 위해서라는 소문마저 떠돌았다. 이러한 이야기는 민중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여, 건륭제가 순행 중에 딸을 얻었다는 또다른 소문을 낳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인기를 끈 중국 드라마 <황제의 딸>의 모티프다.
원래 밑바닥 소문이란 복잡하기 짝이 없는 세상사를 쉽게 해석하려는 상상력의 결과다. 청나라는 명 멸망 이전 북경과 중원 지역을 철저히 약탈하고 학살하여 백성들의 원한을 쌓아 올렸다. 그렇지만 막상 건국한 뒤에는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군을 배출했다. 강희제는 <강희자전康熙字典>를 편찬하여 한자 문화를 집대성했고 옹정제는 강력한 황권으로 국가의 재정과 군사력을 반석 위에 올렸다. 건륭제는 위구르와 티베트를 안정시켜 현대 중국의 국경선을 완성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듯 청 왕조는 반청복명을 꿈꾸는 자들이 얼굴을 붉힐 정도로 번영과 태평성대를 구가했다.
한인들은 청나라가 명나라와 비교도 안 되는 성군들을 배출하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갑자기 만주인들이 개과천선을 한 것일까? 그렇다면 반청복명을 접어야 하는 것인가? 그게 아니라 사실 건륭제는 만주족이 아니라 한족이기에 한인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푼 것이다. 따라서 지금 청 왕조는 만주인의 것이 아니라 한인의 것인 셈이다! 그러므로 반청복명은 완료.
이렇게 보면 건륭제 한족설은 이민족의 지배를 도저히 수긍할 수 없는 한인들의 정신승리로 해석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달리 볼 여지도 있다.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에 이르는 130여 년에 이르는 청 왕조 통치기간은 유례없는 태평성대였다. 서구 열강과의 관계에서도 밀리지 않았다. 비록 문자의 옥 등 지식인 탄압도 심했지만, 가난한 백성들 입장에서 책을 검열하거나 압수하는 것이 생계 문제는 아니다. 조상을 약탈하고 학살했던 이민족이 실은 자신들과 같은 핏줄이라고 믿는 것만큼 더한 지지의 표현이 있을까.
호화로운 남방 순행, 신강 위구르와 티베트를 비롯한 서역 정벌, 학문과 경제 발전 등 화려한 업적을 남긴 건륭제에 대한 백성들의 실제 호감은 상당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서검은구록>의 건륭제는 소인배로 그려진다. 홍화회 회원인 기녀에 반해 어이없이 납치되기도 하고 진가락과 맺은 약속을 아무렇지도 않게 어긴다. 심지어 처남댁과 밀통하여 아들을 낳고 진가락의 연인 향향공주를 억지로 잡아두어 자살하게끔 한다.
이러한 설정에 전혀 역사적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건륭제의 처조카인 복강안이 실은 친아들이라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복강안은 건륭제의 엄청난 총애를 받으며 최고 권력을 누렸으며, 사후에는 왕으로 책봉되기까지 했다. 황족이 아니면서 왕 작위를 받은 예는 복강안 외에는 없었다. 소문에 의하면 건륭제가 복강안 모친의 미모를 탐내어 밀통하였다고 한다. 근거로는 복강안이 어릴 적부터 궁 안에서 교육받았으며 잘못을 저질러도 질책 받지 않았고, 복강안의 두 형은 공주를 아내로 맞았지만 가장 총애를 받던 복강안만 부마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건륭제 입장에서 복강안과 공주들은 배다른 남매 사이가 되기 때문이다.
<서검은구록>은 한인과 청인으로 대비되는 선악 구도 위에 진행되지만, 가장 중요 인물인 건륭제가 그 구도에 근본적인 균열을 낸다. 김용은 한족설을 비롯하여 관련된 소문들을 채택하여 결과적으로 건륭제를 호색한이자 소인배로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한인 황제라고 꼭 명군이라는 법이 없으며 만주인 황제라 하여 모두 암군은 아니다. 나아가 한 사람의 선악 여부는 그가 속한 집단의 도덕성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시대의 흐름과 개인의 선택이 중첩된 결과에 달려 있기 마련이다. 이후 곽정, 양과, 소봉, 영호충 등 김용의 주인공들은 개개인의 성격까지 규정짓는 집단 정체성과 갈등을 빚으며 나름의 해답을 찾아가는 여정을 보여준다.
<서검은구록>의 진가락이 처한 딜레마
주인공 진가락은 젊지만 홍화회 총타주이자 무공도 인격도 강호에서 존경받는 경지의 인물이다. 겉으로 완벽해 보이는 진가락도 아직 청춘이기에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복잡한 감정들이 전혀 없을 수는 없다. 그렇지만 작품이 전개되고 위구르로 옮겨가면서 안팎으로 위기를 맞는다. 마음속으로만 사모하던 곽청동을 잊기 위해 속앓이를 하기도 하고 친형 건륭제의 배신으로 무림 최고수 장소중에게 생명의 위협을 당하기도 한다.
진가락은 중국 왕조에 맞서 싸우다 멸망했던 나라에 숨겨진 무공을 연마하고 나서야 겨우 악당 장소중을 물리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장자>에 나오는 소 잡는 백정 이야기에서 착안된 포정해우(庖丁解牛)라는 무공이었다. <장자>의 핵심은 영원하고 절대적인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가락의 이후 행로가 <장자>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그대는 한 마리 나비가 되었다’는 향향공주의 비문에도 내비쳐진다. 결국 진가락이 <장자>의 사상이 담긴 포정해우를 배우는 것은 절대적 명분으로 내세워지는 반청복명의 대의를 접고 은거하리라는 암시인 것이다.
<서검은구록> 이후에 발표된 작품에서 잘 드러나듯이 김용은 삼각관계를 그리는 데 일가견이 있다. 흔히 문학 작품 속의 삼각관계는 두 명의 상대가 각기 상징하는 세계관이나 가치관 사이의 갈등을 상징한다. 향향공주가 자결한 뒤 진가락과 곽청동은 상실감과 좌절에 빠져 서로 헤어질 수도 없고 결혼할 수도 없는 처지에 빠진다. 향향공주의 죽음으로 영원히 헤어 나올 수 없는 삼각관계에 빠진 채 <서검은구록>은 마무리된다. 이러한 결말은 이민족 왕조에 투항하지도 벗어나지도 못하는 한족 지식인의 딜레마를 상징하는 셈이다.
영화와 드라마로 보는 <서검은구록>
<서검은구록>도 여러 차례 영화와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개중 최초로 거론되는 예는 1960년 홍콩에서 제작된 3부작 드라마다. 연재가 끝난 뒤 불과 4년 뒤에 만들어진 것이다. 일부 무협 팬들은 홍콩의 감독 허안화가 2부작 영화로 만든 1988년작을 명작으로 친다. 안타깝게도 허안화 감독 버전의 <서검은구록>은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만들어졌지만 안타깝게도 무협이 대중의 일회용 놀잇거리쯤으로 여겨지는 터라 꼼꼼하게 아카이빙이 되어 있지 않다. 그래도 인터넷을 뒤지면 김용의 작품을 아끼는 독자들의 노력이 반영된 블로그들을 볼 수 있다.
초원 감독의 1981년작 <서검은구록>도 비교적 지명도가 있다. 2000년대 쇼브라더스 영화 회고 붐이 일면서 한국에도 DVD로 출시되었다. 초원 감독다운 화려한 세트와 물량이 돋보이며 진가락의 절기 백화착권도 나름 시각적으로 구현되었다. 주인공 진가락은 무술 연기로 유명한 적룡이 맡았다. 원작에서 진가락은 우락부락한 무인이 아니라 관옥같이 고운 선비로 그려지기에 당시 미스 캐스팅이라는 지적이 돌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적룡의 연기는 이후 정소추 등으로 이어지는 역대 진가락의 전형을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초원 감독 버전 <서검은구록>은 사랑 이야기를 과감히 삭제하고 주중영이 강호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아들을 죽이거나 건륭제가 홍화회 비밀 회원인 기녀에 속아 납치되는 이야기 위주로 꾸몄다. 위구르인은 아예 나오지도 않는다.
이후 <서검은구록>은 여러 차례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정소추는 얼굴이 닮았다는 설정을 이용해 진가락, 건륭제, 복강안 등 무려 1인 3역을 해내기도 했다.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예는 2009년 중국 호남TV의 드라마 버전으로 진가락의 비중은 다소 축소되고 정소추가 건륭제를 맡았다. 이 드라마의 진가락은 막중한 책임을 진 총타주라기보다는 호기심 많은 평범하고 가벼운 청년으로 묘사된다. 옹정제가 부친 강희제를 살해하여 황위를 찬탈했다는 야사도 그려진다. 최근 중국 드라마계의 옹정제에 대한 관심이 반영되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원작이 다루는 한인과 위구르인의 결속 부분이 축소되었다는 점에서, 현재 세계의 우려를 사고 있는 신강 위구르 지역의 정치적 갈등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워낙 중국의 정치적 사정이 복잡하니 가볍게 단언할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적대하며 살아온 지역을 통합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진가락이 향향공주를 대했던 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그대가 원한다면 나도 이슬람교를 믿겠소.”
(이 글은 문예 무크 <오즈> 1호에도 실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