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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지윤 Oct 21. 2024

비워내기 위해선

30대 엄마의 성장기

나는 꾸준함의 힘을 믿는다. 꾸준히 무언가를 하는 것은 너무나 어렵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왜 그 일을 하는지 명확히 알고 있다. 그 이유가 크든 작든, 간절함이 그들을 움직이게 하고 결국 꾸준함으로 이어지게 하는 것 같다. 대부분의 사람과 같이 난 성실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나마 내가 유일하게 지속하고 있는 것은 남녀노소 불문, ‘남의 이야기를 끝까지 경청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잠시 그들의 삶 속에 머무는 느낌을 좋아하고, 다양한 인생

을 듣는 것이 나에게는 신선한 환기를 주기에 어려운 일이 아니라 오히려 찾게 되는 일이다.


이런 나의 모습이 이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지만, 자신을 표현하는 시대에 듣는 재능이 있는 나를 표현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며 정신승리를 하곤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오늘 막 20대 중반을 벗어나 후반에 접어든 어여쁜 제자들과의 만남

에서 나는 스스로에게 큰 답답함을 느꼈다. 순수했던 시절 누구보다 까르르 웃으며 빛이 나던 두 학생이기에 언제나 만나면 그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 좋은 추억을 선물로 주던 친구들이었다.


이제 그들이 직장인이 되고, 연애와 결혼, 인생을 고민하는 시점에서 나는 도움이 되고 싶었는지 경청이라는 단어를 완전히 말아먹었다.


“선생님, 정말 고민이에요. 사람도 만나고 연애해야 하는데…”

“그건 말이지, 이렇게 해봐…., 아니 저렇게 해야지…

나는 나의 20대 중후반 때 가졌던 방황과 사색의 시간, 그 충만하고 값진 시간을 마치 한 마디로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제시하며, 그 친구들의 귀한 시간을 헤집어 놓고 있었다. 이 친구들의 입시 때와 다를 바 없이,

‘삶’을 나누는 자리에 나는 ‘답’, 아니 ‘틀’을 강요하고 있었다.


최근 들어 육아를 통해, 사랑은 누군가를 내 뜻대로 바꾸고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마음을 비워내고 그들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는 것임을 스스로 주장하고 있던 터라, 내가 조언(?)을 주면서도, 그 말들이 친구들에게 전혀 닿지 않음을 직감했다.


과거에 무언가를 억지로 해내려고 애썼던 나의 조급함을, 아니 저급함을 이제는 조금씩 비워내고 싶었는데, 사람은 참 지독히도 변하지 않는지, 비워내려 할수록 내 말은 이미 다음 말을 생각하고 있고, 상대의 말을 듣기 전에 여러 해결책을 고안하고 있었다. 그 누구도 나에게 부탁하지 않은 답을 찾고자 하는 나의 얕음이 절실히 드러났다.


비워냄을 시도하려 노력하는 나는 아주 꽉 채워진 오디오처럼 대화를 이끌었고, 만남 후에 찾아온 스스로에 대한 자책은 나를 진짜 발가벗긴 듯 다시 보게 했다. 경청을 좋아한다고 자부하던 나는 어쩌면 듣고 싶은 이야기만 사랑하는 사람일지도 모르고, 아직도 틀과 한계로

상대를 판단하려는 버릇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과 같이 나의 모난 부분을 직면하는 날은 굉장히 찝찝하지만 어쩐지 모르게 자유해져 실소를 자아낸다. 그리곤, 결심한다. 다음에 나에게 다시 기회가 온다면, 나의 혼돈의 시절의 값짐과 무게를 기억하며 그 시절의 제자들이 그 시간에 맞게 진정으로 살아내고 있음을 가슴 깊이 믿어주고 응원해야지, 비워내는 것에 급급해지기 전에, 온전히 너희들의 중심에 눈을 맞춰야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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