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엄마의 성장기
2013년 3월 26일 저녁, 언니는 그날도 어김없이 나에게 라볶이를 끓여달라며 온갖 말로 설득했다.
“우리 곧 시험이니까! 라볶이 먹고 힘내야 해 ㅎㅎ 내가 설거지 다 할 테니까 삶은 계란 두 개 넣어줘~”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던 때라 우리 자취방은 한국인 친구들의 아지트가 되곤 했고, 라볶이는 내가 잘할 수 있는 주메뉴 중 하나였다. 언니는 내가 끓여준 라볶이를 유난히 좋아했다. 그날따라 계란, 양배추, 대파, 어묵까지, 마치 라볶이밖에 모르는 사람처럼 이것저것 다 넣어달라고 했다.
“으이그~ 알겠어. 언니, 라면도 넣고 계란도 넣을게! 우리 오늘 밤새자!”
23살의 나는 졸업을 두 달 정도 앞두고 있었고, 기말고사 시즌이라 바쁘게 시험을 공부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날따라 아기처럼 조르는 룸메이트 언니, 아니 가장 친했던 친구였던 ‘에이미’ 언니의 부탁에 난 모든 재료를 넣어 후하게 라볶이를 끓여줬다.
라볶이를 다 먹고, 우리는 소화도 시킬 겸 거실에 커튼을 쳐놓고 방이라고 부르던 내 방에서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지윤아,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는 시편 말씀이 있는데, 날 너무 사랑하시는지 갑자기 잠이 너무 쏟아져. 오늘은 밤 못 샐 것 같은데 ㅎㅎ”
“언니, 근데 그거 하나님 사랑 아니야. 내가 오늘 라면 수프 넣었어, MSG야.”
우리는 깔깔대며 웃다가 시험 공부하자며 파이팅을 외치고 각자의 방으로 갔다.
한참 공부하던 중, 언니가 찾아와 말했다.
“지윤아, 나 먼저 씻을게~ 난 자야 할 것 같아.”
“응응, 언니 먼저 씻어. 언니 다 씻고 나면 나도 씻을게~”
그땐 밤 10시 정도였다.
그렇게 언니는 샤워를 하러 들어갔고, 한참 동안 물소리가 들렸다. 나는 공부에 몰두하고 있었고, 시계를 보니 어느덧 12시 25분,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직도 물소리가 들렸다. 순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장실이 급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아줌마~ 무슨 샤워를 두 시간씩이나 해! 떼가 그렇게 많나유~ 언니 나 너무 급해 그냥 들어갈게!”
“...”
언니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나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언니는 욕조에 몸이 반쯤 걸쳐진 채 있었고, 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언니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두 시간 전에 샤워하러 들어갔던 사람이, 옷을 입고 있는 거면 이미 두 시간 전부터 쓰러져 있었다는 것을. 한참이 지나 내가 언니를 발견한 것을. 언니는 이제 나와 다른 세상에 있다는 것을...
12시 30분, 911이 출동하고 집 안은 온갖 사이렌 소리와 경찰들의 무전기 소리로 가득 찼다. 넋이 나간 나와 또 함께 살던 다른 대학원생 룸메이트 언니도 충격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12시 35분, 구급대원인지 경찰인지 어떤 분이 이렇게 말했다.
“12시 37분, 3월 27일 그녀가 사망했음을 공식적으로 말합니다.”
몇 시간 전 라볶이를 조르던 나의 친구였던 언니가 더 이상 이 세상에 있지 않다는 슬픔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잠이 부족해서 일찍 떠난 건지, 시험공부가 싫어서 간 건지, 그래도 좋아하던 라볶이에 모든 재료를 다 넣어줘서 다행이라 생각도 들면서 언니와의 2년 반의 기억이 나의 온몸을 감쌌다.
미국에서 지낸 지 7년째, 외로움에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는데, 갑작스럽고 엄청난 크기의 슬픔은 내 온 삶을 뒤흔들었다.
항상 유쾌하고 밝던 나는 감정을 꽁꽁 숨겨놓았다. 아니, 숨겨놓아야만 했다. 내 감정은 마치 댐에 갇힌 물 같아서, 문을 열어두면 슬픔이 내 주위를 잠식할 것 같았다.
언니는 사실 나에게만 비밀을 털어놓았었다. 간질로 고생하던 언니는 오랫동안 약을 먹었고, 최근에는 이민 생활로 힘들어하는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에 약값이 비싸서 약을 끊고 버티고 있었다고 한다. 나는 당시 그 상황의 무게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가벼운 위로의 말을 건넸는데, 그 무심한 공감이 이렇게 큰 배신으로 다가올 줄은 몰랐다.
정말로 내 온 내장이 뿌연 연기로 덮인 듯한 갑갑하고 먹먹한 고통 속에서 나는 공황장애까지 앓게 되었다. 졸업 후 한두 달 만에 비교적 빠르게 취업하고, 입사 7개월 만에 승진 제안을 받았음에도 웃음을 찾는 게 힘들었다. 이유 없이 흐르는 눈물은 출근길과 퇴근길에 계속되었고, 그렇게 하염없이 울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 루틴처럼 익숙해졌다.
무색하게도 회사에서는 취업 비자와 영주권 오퍼가 오가는 시기였고, 많은 유학생에게는 꿈같은 조건이 드디어 완성이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어, 뉴욕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한국의 국제 대안학교에서 일할 기회를 받아 무작정 한국행 비행기를 끊었다.
도망가고 싶었다. 아니, 내 슬픔이 짙게 남아있는 이 공간, 이 나라를 떠나고 싶었다. 괜찮아졌다고 생각한 시간들이 있었지만, 여전히 삶을 비관적으로 바라보고 있었고, 아무도 내 아픔을 모른다는 생각에 깊은 동굴 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그렇게 나는 도망치듯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하지만 한국에 돌아와 어린 시절 살던 집에 와도 여전히 낯설었다. 더 낯설었다. 그리고 억울했다. 그렇게 꿈 많던 나였는데, 열심히 살아온 나였는데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어야 했을까. 답이 없는 질문들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고, 가시처럼 내 마음을 방어하게 했다.
그래도 교사로서의 역할을 다해야 하기에 필요한 자격증을 공부하고 취득한 후,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 집중하려 애썼다. 그러던 어느 날 한 학생이 찾아왔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고, 입술은 떨리고 있었다.
“레오야, 무슨 일이 있니?” “선생님, 어제 친구가 오토바이 사고로 죽었어요… 저 어떡해요.”
그 말을 듣자마자 내 마음속에 닿아두었던 댐의 문이 열리듯,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얼마나 힘들겠니…”
우리는 손을 잡고 한참을 함께 울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때 레오가 말했다.
“선생님, 정말 감사해요. 내 슬픔을, 제 상처를 이해해 주셔서…”
“레오야, 사실 선생님도 그 아픔을 잘 알아. 선생님이 23살 때…”
나는 나의 상처를 레오와 나누었고, 레오는 내 손을 잡고 함께 울어주었다.
낯선 이 땅이 갑자기 나의 집이 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레오와의 나눔 이후, 많은 학생들이 저마다의 고통과 아픔을 가지고, 나를 찾아와 쏟아 내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 분야의 전문가(?)인 나는 그때마다 눈물을 쏟아 놓았고 우리는 눈물과 회복의 장으로 선생님과 제자 그 이상의 시간들을 쌓아갔다. 학교시간 이후에도 학생들과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퇴근 후에도 달려가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렇게 눈물바다로 시작했던 우리들의 깊은 슬픔의 시간은 점차 맛있는 분식과 달달한 카페 음료들로 채워져 갔고 짙은 슬픔의 안개는 어느샌가 웃음의 장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한해 두 해가 지나고 어느새 1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학생들에게 받은 편지꾸러미 가방과, 생일 때마다 받은 롤링페이퍼 같은 앨범들이 내 서재에 가지런히 꽂혀있다.
보고 싶을 때면 들춰보기도 하고, 다시금 그 추억들에 빠져보기도 한다. 그리고 나는 이제야 왜 그때 그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나의 온몸을 채우던 상처의 공간은, 마치 슬픔을 겪는 이들의 위로의 공간으로 쓰일 운명이었던 것처럼, 언니를 향한 그리움은 나의 자산이 되어 힘들어하는 아이들의 공허함을 달래는 힘이 되었다.
쉽지 않은 애도의 소용돌이였지만, 그 안에 숨어 있던 위로와 다정함은 절규를 잠잠하게 가라앉히며 단단한 밧줄이 되어 많은 삶들을 지탱해 주었다.
가끔씩 사무치는 슬픔이 몰려오고, 파도가 가라앉지 않고 나를 덮쳐올 때면, 나는 다짐한다. 이 상처의 값어치가 나의 자산이 되어 누군가를 살려낼 것이라고. 그들의 삶도 다른 이에게 생명의 통로가 될 것이라고.
끊임없이 자랑할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은 내가 걸어온 걸음과, 무너지지 않고 버텨온 이 자리임을 기억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