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쓰레기통은 반드시 필요하다.

가장 가까운 곳에 둘 것

by 해윤

살면서 힘든 일은 누구에게나 있다. 아니, 어쩌면 매일 있다. 즐거운 게 뭐 별거인가! 하는 마인드로 행복과 즐거움을 쫓아도 훅 힘든 일이 덮쳐오는 건 인생사 당연한 일 아닐까?


나는 감정이 굉장히 예민한 편이다. 그래서 주변에서 어떤 기운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굉장히 잘 휘둘리는 편인데, 나에게 업무지시를 자주 하는 상사는 감정기복이 아주 심한 사람이다. 어느 때에는 복도에서 마주치기만 해도 행복을 빌어주다가도 어느 때에는 별거 아닌 일에도 야, 새끼야, 임마 같은 말을 서슴치 않게 던지고서는 분노를 표출하는 사람이다. 아, 일 힘든 건 견뎌도 사람 힘든 건 못 견딘다고 누가 그랬던가? 그가 화를 내는 날이면 나는 모든 것을 놓고 조각조각 난 자존감을 주워다 붙이기도 바쁜 날이 된다. 하지도 않은 잘못에 죄송하다는 말을 덧붙이고, 실수와 잘못으로 점철된 사람으로 매도된 날이면 정말이지 입꼬리 하나 올릴 힘조차 쭉 빠져 버려서 입을 꾹 다문 채 심연으로 빠지게 된다.


나도 안다, 이게 얼마나 프로페셔널하지 못한 모습인지. 세상 수십 억 인구 중에 안 힘든 사람 어디 있고, 그렇게 영혼이 갉아 먹히는 경험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도 나는 거기에 반박한다. 스스로 느끼는 고통의 정도를 누가 감히 재단하겠느냐고. '내'가 느끼는 고통은 결국 '내'가 견딜 수 있느냐 없느냐 정도의 차이만 있는 것 아니겠냐고. 힘듦을 십 점 만점으로 계산한다면 결국 내가 만점이 되는 게 사람 아니겠냐고.


견디고 싶지 않은 순간들이 많았다. 때로는 가장 극단적인 방법이 내게 남은 유일한 방법 같았다. 그렇지만 나는 아직 미련이 많았으므로, 내가 잡고 싶은 행복이 많았으므로 극단적인 방법은 생각 또는 아주 사소한 시도에서 끝났다. 아, 인생이란 무엇이길래 이렇게 땅바닥에 내쳐지고 또 내쳐지면서도 살아내고 싶어진단 말인가? 살아내려면 이 견디고 싶지 않은 순간들을 버려내야 했다.


그래서 나는 감정 쓰레기통을 만들었다. 내가 가장 많이 화가 나는 곳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타인을 희생시킬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나를 해칠 수는 없었다. 몸과 마음을 바쳐 부정적인 감정을 나에게 버리는 게 얼마나 버거운 일인지 알기 때문에 어떻게 만들지 고민해야 했다. 과거에는 잘못된―그렇지만 그때에는 그 방법이 나에게 최선이었다.― 쓰레기통을 만들어 줬기에 몸도 마음도 다 버려야만 분노, 슬픔, 우울, 경멸, 자책 같은 것들이 버려지는 기분이었다. 끝낼 용기와 마음까지도 없던 내가 살아보고자 발악했던 방법이 나를 내다버리는 것이었다니. 흉터처럼 남은 과거는 그래도 다음 쓰레기통을 만들 때 고민할 여지를 만들어 줬다. 그렇게 나는 나를 회사 옥상으로 올려보냈다, 어느 카페에서 가지고 나온 건지 모를 두껍고 까칠한 휴지 몇 장과 함께.


옥상 아주 구석진 곳에서 휴지 몇 장으로 입을 틀어막고 최선을 다해 소리를 질렀다. 목이 이리저리 긁히는 감각이 생생할수록 가슴에 그어졌던 생채기가 아무는 느낌이었다. 이상하리만큼 눈물은 나지 않았다. 울분에 가득 차서 걸어올라온 감정은 아직도 발바닥에 울리는데 앞으로 뻗어나가지 못한 내 목소리가, 휴지와 입에 막혀 다시 내 입과 코와 귀로 들어온 그 소리가 오히려 나를 위로해 주는 느낌이었다. 그래, 필터. 딱 필터였다. 나를 해치던 감정들만 버려내고 나를 위로해 줄 힘만 다시 내게 돌아오는 느낌. 정말 필요없는 것들이 버려지는 바로 그 개운한 느낌!


일이 몰아치고 상사의 기분이 오락가락할 때면 하루에 수 번 옥상에 올라갔다 온다. 여전히 옥상 한 구석에는 나의 분노, 슬픔, 박살난 자존감 조각 같은 것들이 쌓이고 있다. 오래도록 버려내고 온 날이면 혹시 옥상 난간을 넘어 밖으로 쏟아져 버리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녹색 페인트 바닥 위에 감정 쓰레기들이 쌓일수록 내가 비워지고 가벼워지는 이 개운함을 어떻게 포기할까? 내 설움이 생긴 곳에 다시 버려두고 그곳을 나서는 순간 나와는 상관없어지는 가벼움에 너무 빠르게 적응해 버렸다.


감정 쓰레기통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이왕이면 내 감정과 가장 가까운 곳에, 나의 행복과는 조금은 먼 곳에. 부정적인 감정을 가장 많이 만드는 곳 바로 근처에 쓰레기통을 놓고 즉시 비워 보라. 그럼 그곳을 벗어나는 순간 나에게 주어진 즐거움과 행복만 느낄 수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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