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허윤숙 Jul 23. 2019

땅따먹기

흙속에 뒹굴며 자연과 사람을 배웠던 시간들.

 방송에서 한창 부동산 가격 폭등 이야기가 나올 때였다. 한 남자 동창생이 우스갯소리로 말한 적이 있다. "어릴 적 땅따먹기로 따 먹은 땅을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으면 벌써 큰 재벌이 됐을 텐데." 농담 같지만 슬프다. 어릴 적 동네마다 흔하게 보던 공터들. 그 공터는 우리들의 공짜 놀이터였다.


 오후 시간 놀이터에는 학교가 파한 아이들로 넘쳐났다. 다들 배고픈 줄도 모르고, 저녁 먹으라고 엄마가 데리러 오기 전까지 뛰어놀았다. 아이들이 놀려면 바닥이 필요했고, 그 놀이엔 도구랄 게 필요 없었다. 기껏해야 부모님 속옷에서 몰래 빼온 고무줄 등이다. 시커먼 고무줄을 누덕누덕 묶어서 만든 긴 고무줄로 고무줄놀이를 했다. 또 바닥에 나뒹구는 돌멩이들을 가지고 공기놀이를 했다. 장난감을 산다는 건 호사였다. 대신 우리 몸으로 하는 다양한 놀이가 있었다. 고무줄놀이, 공기놀이, 다방구, 말 타기 놀이, 숨바꼭질, 땅따먹기, 구슬치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등.


  그때 아이들이 자주 했던 놀이가 땅따먹기다. 이 놀이는 다른 놀이에 비해 너른 면적이 요구되었다. 땅에 사각형을 그리고, 각 귀퉁이에 한 명씩 자릴 잡고 앉아 게임을 시작한다. 게임 도구는 각자 던질 작은 돌멩이 하나. 손바닥 뒤집기로 순서를 정하고 나면, 자기 순서가 된 사람이 엄지와 검 지 손가락으로 작은 돌멩이를 흙바닥에서 튕긴다. 그 돌멩이는 곧 포물선으로 날아가서 땅에 떨어진다.


 이때 돌멩이가 떨어진 자리에 첫 번째 점을 찍는다. 이 점을 출발점과 연결하면 첫 번째 선이 만들어진다. 이 점을 출발점으로 하여 다시 두 번째로 돌을 튕겨서 떨어지면 첫 번째 지점과 직선으로 그어서 잇는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돌멩이를 튕기는데, 이땐 원래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그 결과 얻어진 사각형 안쪽이 자기 땅이 된다.

 

 돌멩이를 튕기는 손가락 힘은 아이마다 천차만별이었다. 힘이 세다고 무조건 좋은 게 아니었다. 그보다는 힘 조절이 필요하다. 즉 처음 돌멩이를 튕길 때 너무 멀리 가면 안 된다. 이는 두 번째 튕길 때까지도 눈치 채지 못한다. 세 번째에서 늘 문제가 생긴다. 홈그라운드로의 복귀가 힘들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시야가 넓어야 하고, 방향 설정이 중요하다. 중간에 포기하는 아이도 있다. 자기 땅이 모두 맹지(사방이 막혀서 길이 없는 땅)가 되어버리는 경우다. 주변 친구들이 의도적으로 자기 땅을 가로막으면 앞으로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다.


 남의 땅을 막는 친구들은 대부분 상습적이다. 자기 땅을 넓히는 일보다 남의 땅을 가로막는 게 승부를 내기 훨씬 편하기 때문이다. 끝까지 게임을 하기엔 시간이 많이 걸리니 빨리 승부를 내고 싶어서다. 안타까운 경우도 있다. 첫 번째 돌멩이는 멀리 나갔지만 두 번째는 조금만 나간 경우다. 그러면 좁은 땅을 갖게 된다. 진짜 운이 나쁜 경우는 따로 있다. 첫 번째, 두 번째 돌멩이가 멀리 나갔는데, 세 번째 돌멩이가 엉뚱한 데로 튕기는 경우다. 결과적으로 헛고생만 한 셈이 되었다.


 최악의 경우는 처음부터 손가락이 빗맞는 경우다. 이때는 땅이고 뭐고 체면이 말이 아니다. 헛스윙만 남발하니 친구들이 아예 '선수 교체'를 들먹인다. 승부를 위해선 어쩔 수 없다. 슬프게도 내가 마지막 경우였다. 나는 눈과 손가락 신경들이 자기주장이 강했다. 돌멩이는 늘 빗맞았고, 어쩌다 맞아도 겨우 내 코앞에 떨어졌다. 모든 놀이에는 운동신경이 필요한데, 나는 그게 없었다. 결국 늘 깍두기였다.


 깍두기는 잘하면 좋고 못해도 욕먹지 않았다. 처음부터 기대감이 없으니까. 다만 인기가 없을 뿐이다. 억울하진 않았다. 팀 내 공헌도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았으니. 팀 내 에이스, 즉 가장 잘하는 아이는 운동신경도 좋고 손가락 힘도 좋으며, 시야도 넓고 장단기 계획을 세워 경기에 임했다. 즉 첫 번째 돌을 튕길 때부터 넓은 땅을 향해 각도를 구상한다.


 이 놀이에서 가장 중요한 단계는 두 번째 돌이 날아갈 때다. 첫 번째 돌이 날아간 곳과 잘 연결되어야 하고, 세 번째 돌이 들어오기 좋은 동 선을 확보해야 하 기 때문이다. 간혹 첫 번째 돌멩이부터 똥 폼을 잡고 멀리 보내는 아이들이 있다. 이런 아이들은 대체로 초보다. 무조건 멀리 나가면 좋은 줄 안다.


 이때 노련한 승부사들이 등장하곤 한다. 영악하기까지 한데, 게임 초짜들의 허영심을 부추기는 것이다. 보통 다른 동네에서 이사 와서 이 동네 놀이를 잘 이해 못하는 아이들이다. 동네마다 놀이 종류가 달랐고, 같은 놀이도 규칙이 약간씩 달랐다. 신참은 무조건 동네 토박이들의 게임 규칙을 따라야 했다. 이때 튀어 보이고 싶고, 빨리 아이들과 친해지고 싶은 신입의 순수함을 이용한다.


 "이야. 대단한 데? 어떻게 돌을 그렇게 멀리 보낼 수 있니? 꼭 육백만 불 사나이 팔 같다.(그 당시 ‘육백만 불 사나이’라는 드라마가 유행이었다. 주인공은 사고로 신체 일부를 잃었고, 로봇기술로 팔을 대체해서 괴력을 발휘했다. 그 당시 남자아이들에게 영웅이었다.)" 그러면 초짜는 더욱 우쭐해져서 두 번째는 더 멀리 보낸다. 무조건 멀리 가면 좋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마지막 돌멩이가 홈으로 무사히 들어가면 그나마 좁은 땅이라도 갖지만, 무리하면 망한다. '아씨. 너무 멀리 왔어.' 멀리만 가면 좋은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초짜들의 설익은 욕심은 늘 화를 불렀다. 야바위꾼들이 보내는 환호에 으쓱해서다. 멀리 보내기만 하면 절대로 도형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 이는 기하학을 안 배워도 몸으로 알 수 있는 산지식이었다.


 곁에서 응원하면 이런 꼼수가 보인다. 단 구경을 할 때에 한해서만. 직접 참여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눈앞의 이익에 취해서 전체 그림을 못 본다. 자기를 향한 박수와 환호가 야속해진다. '나랑 친하면서, 어쩜 땅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좋아해 주는 척을 했을까?' 하면서.


 하지만 이내 괜찮아졌다. 한 판 망했다고 해서 세상이 끝나지는 않으니까. 한판이 끝나면 사각형 안쪽을 지우고 다시 시작하면 되었다. 대개 두 번째 판부터 욕심을 조금씩 걷어내게 된다. 첫 판에서 했던 실수를 다시 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두 번째 또 실수를 해도 상관이 없다. 그다음 날이 있으니까. 그날 놀던 자리는 발로 문질러서 원래대로 돌려놓곤 했으니까. 땅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당시엔 동네마다 직업적인 놀이꾼 아이들도 있었다. 그 아이들은 뭐든 척척박사였다. 땅따먹기를 하면 동네 땅을 다 따 먹었고, 구슬치기나 딱지치기를 해도 판을 싹쓸이해버렸다. 재벌도 부럽지 않았다. 당시엔 중고 구슬이나 딱지를 돈으로 사고팔았기 때문이다.


 놀이를 잘하는 아이는 그 동네에 있는 딱지나 구슬을 다 접수하고 나면, 여전히 배고프다는 식으로 옆 동네까지 원정을 갔다. 그 아이들은 그렇게 해서 집안에 산더미처럼 전리품을 쌓아나갔다. 딱지나 구슬을 신품으로 살 때보다 싸게 팔기도 하고, 먹을 것이나 다른 것들로 물물 교환하면서 부를 확장해 갔다. 그 아이들에게 갖다 바치기 위해 어마어마한 용돈을 쓰는 아이들도 있었다. 붙었다 하면 빼앗기는 게 불을 보듯 뻔한데.


 올 한 해 부동산 가격이 폭등했다. 부동산 열기를 방송할 때 꼭 나오는 말이 있다. 한 사람이 수백 채의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다는 이야기. 하지만 열기가 한번 시작되면 멈출 줄을 모른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으니. 서민들은 평생토록 직장 생활을 해도 집 한 칸 장만하기 힘들다. 어쩔 수 없이 결혼이나 연애마저 포기한다.


 수 백 채 아파트를 소유한 사람은 어릴 적 땅따먹기를 잘했을까? 그때나 지금이나 '땅따먹기 신'은 힘 조절을 잘한 것이다. 또 앞으로 어디가 오르는지 방향을 잘 알았다. 그 전엔 다양한 놀이로 딱지나 구슬도 많이 땄을 것이다. 나처럼 놀이 실력이 없는 사람은 그저 부러울 뿐이다.


 딱지 왕이나 구슬치기 왕 중에 기억나는 아이가 있다. 자신의 기술이나 비법을 친구들에게 열심히 알려주는 아이들이다. 또 구슬이나 딱지를 잃고 우는 아이들에게 자기 구슬을 조금씩 나눠주는 아이들이다. 그 아이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며 살고 있을까? 갑자기 궁금해진다.

이전 01화 달고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