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렉팅의 본질: 지시하지 말고 상상하게 하라

연출은 어떻게 영화를 완성시킬까?

by 김형범

​영화감독이란 과연 어떤 존재일까? 메가폰을 잡고 호통치는 독재자일까, 아니면 영감이 떠오르기를 기다리는 고독한 예술가일까? 영화라는 거대한 배를 움직이는 ‘연출(Directing)’의 본질을 파고들다 보면, 우리는 뜻밖에도 한 편의 코미디 영화에서 그 답의 실마리를 찾게 된다.


​우디 앨런이 감독하고 주연을 맡은 영화 《헐리우드 엔딩(Hollywood Ending)》에는 기막힌 설정이 등장한다. 한물간 영화감독이 재기를 위한 천재일우의 기회를 잡았는데, 극심한 스트레스로 촬영 직전 시력을 잃게 된 것이다. 그는 이 사실을 숨긴 채 촬영을 강행한다. 앞이 보이지 않는 감독이 현장을 지휘하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에서 우리는 연출의 가장 기초적인 정의를 목격한다.

​스태프들이 다가와 묻는다.

"감독님, 이 소품은 빨간색이 좋을까요, 파란색이 좋을까요?"

보이지 않는 그는 짐짓 고민하는 척하며 아무거나 찍어서 대답한다.

"빨간색."

그러면 미술팀은 그 한마디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비록 코미디의 한 장면이지만, 이는 연출이란 쏟아지는 질문에 대해 끊임없이 ‘선택(Choice)’을 내려주는 직업임을 명확히 보여준다. 감독이 확신을 가지고(혹은 가진 척이라도 하며) 결정을 내리면, 스태프들은 그 선택을 현실로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순히 ‘선택’만으로는 부족하다. 훌륭한 감독은 그 선택 뒤에 숨겨진 ‘비전’을 동료들에게 납득시키고, 그들이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게 만든다.


​최근 화제를 모은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데몬헌터스(K-Pop: Demon Hunters)》의 제작 비하인드는 이를 잘 보여준다. 매기 강 감독은 작곡가에게 다소 무모해 보이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노래 후반부로 갈수록 음이 계속 올라가서, 결국 가수가 부르기 불가능한 음(Impossible Note)에 도달하게 만들어줘요."

​이것은 단순히 고음을 뽐내기 위한 주문이 아니었다. 감독은 주인공 ‘루미’가 악귀를 막기 위해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아등바등하는 그 처절함을 음악으로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작곡가는 "불행히도 내가 그걸 해내야 했다"고 토로했지만, 감독의 명확한 비전 공유 덕분에 그 ‘불가능한 음’은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 핵심적인 서사 장치가 되었다. 감독은 동료에게 단순한 작업 지시가 아니라, 우리가 왜 이 산을 넘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Why)’를 공유함으로써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것이다.


​그렇다면 배우에게는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일본 배우 하시모토 칸나의 유명한 일화는 연출이 얼마나 구체적이어야 하는지를 증명한다.

​그녀가 출연한 작품에서 남자 동급생을 때리는 장면이 있었는데, 구타 장면이 너무나 리얼하고 타격감이 좋아 '학폭 논란'이라는 웃지 못할 해프닝까지 벌어졌다. 하지만 그녀에게 오빠가 둘이나 있고 어릴 때부터 치고받고 자랐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대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액션은 단순한 연기가 아니라 ‘현실 남매의 싸움’에서 우러나온 경험적 바이브였던 것이다.

​만약 연출자가 배우에게 그저 "실감 나게 때려봐"라고 추상적인 주문만 했다면 어땠을까? 배우는 머뭇거리거나 작위적인 연기를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훌륭한 연출은 배우가 상상할 수 있는 명확한 가이드라인을 준다. "학교 폭력 가해자처럼 때려"가 아니라, "네 얄미운 오빠가 리모컨을 뺏어갔을 때처럼 때려봐"라고 말해주는 것. 배우가 자신의 경험과 본능을 꺼내 쓸 수 있도록 구체적인 ‘상황(Context)’을 설계해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연출의 힘이다.


​결국 연출이란, 《헐리우드 엔딩》의 주인공처럼 수많은 갈림길에서 과감한 ‘선택’을 내리고, 《K-Pop: Demon Hunters》처럼 스태프들에게 그 선택의 이유와 ‘비전’을 공유하며, 하시모토 칸나의 사례처럼 배우가 그 안에서 맘껏 뛰어놀 수 있도록 구체적인 ‘상황’을 만들어주는 일이다.


​혼자 꾸는 꿈은 그저 몽상에 불과하지만, 감독이 정확한 가이드라인을 통해 동료들과 함께 꾸는 꿈은 스크린 위에서 비로소 현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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